70화. 범왕 진이흔
범왕 진이흔은 날 때부터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안하무인은 이흔을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다. 다행히 이흔은 황자였고, 어머니는 황제의 총애를 그럭저럭 받았다.
그래서 착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황제가 자기편을 들어 줄 거라고 말이다.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신경 쓰는 시늉이라도 할 거라고.
왜냐면 자신은 그의 아들이니까. ‘우리 이흔’은 벌써부터 힘이 세고 몸이 날래니 장차 혁혁한 공을 세울 거요, 라고 그가 말하며 웃었으니까.
썩은 내장 같은 개소리였다. 끔찍한 착각임은 물론이고.
처음 시작은 아이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흔은 자기가 반년 넘도록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 물건이 이겸의 허리춤에 태연히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당연히 화가 났다. 분하기도 했다. 그걸 언제 하사받았냐고 묻자 이겸은 이틀 전에 폐하께서 주셨다고 대답했다.
이겸의 답을 듣고 나니 분노는 두 배가 되었다. 아버지는 이흔이 그 진상품을 간절히 원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허허 웃을 뿐 주지 않았다. 동시에 거절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거절했다면 당장 서운하긴 해도 마음을 접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자꾸 조건을 걸었다. 과녁 정중앙을 연속으로 맞히면 생각해 보자는 둥, 이 책을 통째로 외우면 짐의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지 않겠냐는 둥.
계속 그런 식으로 작은 희망을 던져 주었다.
‘한데 그 결과가…… 이렇다니.’
분을 억누른 채 물었다. 대체 뭘 했기에 그 진상품을 하사받았느냐고 말이다. 벌써부터 영민하기로 소문 자자한 이복동생이었다. 외국 사절단의 수수께끼를 풀기라도 했다면 황제의 체면을 세운 것이니 이해라도 하겠건만.
이겸은 산수화 속 선동처럼 고운 얼굴로 별일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그간의 학업성취를 확인하는 폐하의 질문에 자긴 평소대로 답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계속 과분한 상을 내리려 하셔서 곤란했다고. 때마침 눈에 띈, 그 방에서 제일 검소해 보이는 물건을 고른 거라고.
어떤 말에 이흔의 심기가 눌렸을까? ‘흔쾌히’ 하사하셨다는 말에?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는 말? 그것도 아니면 진상품의 유래도 모르는 어린애가 제일 ‘검소’해 보인다며 멋대로 내린 평가가 싫었을라나.
이흔은 그날 이겸과 싸웠다. 말 그대로 황자들 사이에 주먹질이 오갔다. 자신의 보검과 하사품을 맞바꾸자는 이흔의 제안을 이겸이 거절한 게 원인이었다.
사실 민간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번 벌어질 싸움이었으나, 문제는 이흔과 이겸이 황자라는 데에 있었다.
이흔은 호되게 벌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질을 당했다. 어린 내관을 교육시키는 자가 불려 와서 이흔의 등을 매질했다. 벌을 받는 자리엔 황제와 이겸은 물론이고 황자들의 어머니까지 동석해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매를 맞는 동안에도 이흔의 머릿속은 멍한 상태였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당하고 있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흔보다 두 살 어린 이겸도 마냥 맞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흔의 얼굴에도 생채기가 많이 났다. 이복동생이 깨문 손등엔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가둔 죄인도 몸이 낫기를 기다렸다가 형을 가하건만, 어린아이끼리 싸운 직후에 홀로 매질을 당하는 현실이 당황스러웠다.
이흔의 어머니는 황제에게 자비를 구하지 않았다. 매일 탕약을 먹어야 할 만큼 몸이 허약했으나 사리분별만은 확실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걸 알고 있었을 터였다.
진이흔만 몰랐다. 새까맣게 몰랐다.
어쨌든 황제는 여태껏 이흔에게 썩 나쁘지 않은 아버지였으므로 그를 믿었다.
어머니는 그날 밤 아들의 등에 약을 발라 주며 우리 모자는 영춘궁(永春宮)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했다.
「어째서요? 어머니도 후궁이고 영춘궁 마마도 후궁이잖아요. 두 분의 품계도 같잖아요. 그럼 진이락과 진이겸과 저도 같은 거 아닌가요?」
분함에 눈가가 불그스름해진 채 반박했다.
「심지어 전 단왕보다 나이도 많은데.」
「결코 같을 리 없지.」
어머니가 손수건에 대고 한동안 잔기침을 했다. 한때 엷은 미소만으로도 주변을 화사하게 물들였던 미인은 이제 나이가 들었고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입궁이야 어미가 빨랐지만 총애는 영춘궁을 따라잡을 수가 없단다. 그이는 폐하의 무한한 애정을 받고 있어. 게다가 출신도 좋지.」
「하지만…….」
「네게 곧 현실을 알려 줘야지 싶었다. 한데 어미와 달리 사방에 활개치고 다니는 네 모습이 보기 좋아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오늘에 이르렀구나.」
「…….」
「이흔, 어미는 오래 못 살 거다. 운 좋으면 내년 단풍을 보려나. 아니, 정말이란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녀는 일어나 앉으려는 아들을 눌렀다. 아직 약을 덜 발랐다고 했다. 어깨를 누르는 손길에선 종잇장만큼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치고 박고 싸운 진이겸이 어머니보다 힘이 좋지 싶었다. 이흔은 어머니의 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네겐 뒤를 봐줄 외가가 없지. 자기들에게 콩고물이라도 좀 떨어질까 기대하는 천리만리 타향의 그들은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야. 그 말인즉, 이흔 너는 홀로서야 한다는 뜻이다.」
「어머니가 황후마마께 꾸준히 문안을 드리러 가는 것도…… 그래서인가요?」
이흔은 머리회전이 빨랐다. 자신을 쏙 빼닮은 부분이라며, 어머니는 평소에도 흐뭇해했다.
이제 몸을 낮추는 법만 익히면 될 텐데 어째 그 부분은 폐하의 기상을 닮고 말았느냐며 혼잣말하시던 것도 들었다.
「폐하께서 영춘궁을 총애하시긴 하나 조강지처를 폐하진 않으실 테니까. 같은 의미로 태자도 황후마마 소생 중에서 고르셨고.」
어머니가 다시 기침을 했다. 이번에야말로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이흔은 궁녀를 불러 탕약을 내오라고 했다.
왠지 싸늘한 표정의 궁녀는 규정을 들먹였다. 마마께서 복용하는 약재는 유달리 비싸기 때문에 하루 한 첩밖에 드실 수 없다고 대꾸한 뒤 상전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
거짓말이었다. 어제만 해도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두 첩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흔, 익숙해져야 한다.」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그저 살아남는 것에만 집중하렴. 형식과 규범은 그다음이야. 다행히 너는 무예에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 무훈을 쌓는 편이 좋을 거다. 태자전하와 궤를 같이하되, 생사까지 함께할 필요는 없단다.」
이틀 뒤.
수업을 들으러 가던 중에 소리 죽여 웃는 궁인 무리를 보게 됐다. 이흔이 근처에 있는 줄 모르는 무리는 오만방자한 범왕이 드디어 혼쭐났다면서 웃었다.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아직 어리고 성총이 적으니까 오만방자하다는 뒷말이 도는 거였다. 이흔의 판단은 그러했다.
이흔은 그때부터 황후와 태자의 권력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했다. 납작 엎드렸다가 뒤를 치는 법도 배웠다. 앓다가 죽을 것 같아도 무예 연습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친모가 세상을 뜬 지 수년이 지났지만 이흔의 위세는 나날이 높아져 갔다. 범왕의 적은 무조건 끔찍하게 죽는다는 이야기가 봉무국 전역에 퍼졌을 즈음엔, 더 이상 숙덕거림이 들려오지 않았다.
범왕 진이흔은 오만방자한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
황자의 신분으로 매번 선봉에 서서 크고 작은 난을 진압하고 외적을 일망타진하는 장군에게 누가 감히 오만방자하다고 입을 댈 텐가 말이다.
원한은 반드시 열 배로 갚는 범왕에게 잘못 보였다간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태자가 폐위됐다. 황제는 진이락을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이흔도 감옥에 갇혔다. 태자의 횡령에 가담한 죄목이었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으니 갇힌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너무 기다린 듯이 잡아 가두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진이락의 짓일까? 아니면 진이락이 죽고 못 사는 오은이라는 여자의 입김일까? 어쩌면 진이겸이 혀를 놀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흔은 진실을 알았다.
진이락이 태자가 되었어도 아직 모든 일의 최종결정권은 숨이 끊기기 일보 직전의 황제에게 있었다.
황제는 두려웠던 것이다. 내관을 불러 등을 매질하곤 했던 어린 자식이 더는 본인의 통제를 받지 않는 현실이 겁난 거다.
이미 오래전에 이흔의 팔뚝은 노약한 황제의 허벅지보다 두꺼워졌고, 상대를 쳐다보는 눈빛엔 섬뜩함이 깃들어 있었다.
다만 이흔만큼 단기간에 대단한 전공(戰功)을 세운 무장이 드물었다. 그렇기에 한 번쯤 꺾을 시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
왕부에서 호사스럽게 살았던 이흔은 이후로 차디찬 감옥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폐태자가 먼저 유배지로 떠났다.
‘나를 처리하는 게 훨씬 골치 아플 테지.’
놈들은 자신을 죽일까? 왠지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냥 막 던지는 예측이 아니었다. 진이흔을 살릴 때와 죽일 때 따라오는 결과가 매우 분명했다.
‘인간은 역시 쓸모가 있어야 돼. 그래야 세력이 바뀌더라도 나를 계속 살려 둬서 써먹으니까.’
결국 이흔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범왕부에서 옷가지 하나 챙기지 말고 즉시 변경으로 떠나란 황명이 내려왔다. 국경수비군의 말단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변경에 보내는지 알 듯했다. 이흔은 기꺼이 장단을 맞춰 줄 셈이었다.
다시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기분은 엿 같았지만, 도(刀) 쓸 일이 많아진 것 하나는 좋았다. 적의 목을 단칼에 벨 때마다 이흔은 상대가 진이겸이라고 생각했다.
단왕 진이겸. 약점이라곤 없는 새끼.
진이락을 망가뜨리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선황이 영춘궁에게 푹 빠졌던 것처럼 진이락은 황후 오은에게 눈이 돌아가 있으니 여차하면 그쪽을 찌르면 됐다.
약점이 어딘지 빤히 보이는 인간은 이흔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데 아무리 밟아도 의연한 낯짝을 유지하던 진이겸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하지 뭔가. 심지어 그게 혼인하고 3년이 지나도록 덤덤하던 부인 단왕비라고?
단왕비의 말 한 마디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기세라고 했다. 뒤늦게 맞은 신혼의 단꿈에 침소에서는 달콤한 소리가 끊이지 않는단다. 이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냔 말이다.
과연 너 또한 선황의 핏줄이 맞구나. 희한하게도 진씨 일가의 사내들은 황족인 주제에 단 한 명에게 집착하는 면모가 있지. 시간이 좀 걸렸다만 우리 아우님도 예외는 아니었어.
그리하여 이흔은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귀비.”
이흔이 찻잔 뚜껑으로 찻잎을 밀어내며 말했다. 호오(好惡)가 확실한 황후와 달리 금 귀비는 진의를 감추는 데에 능했다. 그녀는 무도한 왕에게도 좋은 차를 대접했다.
“자고로 이득이 확실한 도박에는 가장 소중한 것까지 아낌없이 걸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 귀비가 잠자코 이흔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해야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이 귀비의 진실함을 믿어 주죠.”
그윽하고 향기로운 차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흔이 금 귀비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아마 스스로도 알 텐데요. 지금 귀비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가치 있는 것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