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러게 왜 붉은 실을 끊어서
“우리 우희는 미식을 즐기지. 서왕모의 달고 즙 많은 복숭아가 틀림없이 네 마음에 들 거다. 한입 베어 물면 그 향긋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데, 피로가 씻은 듯이 가시고 갈증과 허기마저 느껴지지 않는단다. 천선들도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과일이야.”
맹아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넌 매일 하나씩 먹도록 해 주마.”
“3천 년에 한 번씩 열매를 맺는다는 반도원(蟠桃園)의 복숭아를요?”
매일 먹는 게 가능하냔 뜻으로 되물었더니 맹아가 대수롭잖은 투로 답했다.
“썩지 않게 저장은 가능하니까.”
그러고는 덧붙였다.
“아껴 뭐 하느냐. 어차피 마군이 나타나면 반도원도 잿더미가 될 텐데. 너 한 입 더 먹이는 게 낫지.”
“서왕모 님과 이야기는 된 건가요?”
“그이도 내 옆에서 마군과 싸웠다. 끔찍한 해악을 익히 알고 있을 터. 네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복숭아가 무어냐. 반도원을 통째로 줄 수도 있거늘!”
우희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맹아가 돌연 어깨를 움츠렸다.
“근데 진짜로 반도원을 원하는 건 아니지?”
“…….”
“아니지?”
“농사엔 별 흥미가 없네요.”
“휴, 다행…….”
가슴을 쓸어내리던 맹아가 우희의 눈초리를 알아채고 헛기침했다.
“그래도 매일 복숭아 하나는 확약을 받았느니라.”
우희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안달이 났나 보다. 맹아는 서둘러 다음 보상을 늘어놨다.
“미모가 빼어난 선동(仙童) 5백 명을 네게 주겠다. 인간계에서의 삶이 끝나면 넌 즉시 선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자미연(紫微淵)의 주인이 되는 게야. 거기서 선동들의 시중을 받으며 편안히 수련에 임하면 되느니. 노선관과 네 사부가 이따금 들러 천궁의 업무를 가르쳐 줄 터다.”
“자미연의 우희 진선.”
“어떠냐? 어감이 썩 괜찮지?”
맹아가 눈썹을 들썩거렸다. 우희 네 취향은 진즉에 파악하고 있다며, 자신이 직접 선동을 엄선하겠다고 말했다.
“인간계에서 마음에 드는 놈이 있으면 이 늙은이에게 귀띔하려무나. 그렇지. 진이겸의 수하들이 제법 반반하더구나. 인간으로 죽게 놔두기 아까우면 네 옆에 붙여 주랴?”
“그런 것도 가능한가요.”
“가능하다마다.”
선계의 규율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방법을 찾겠다고 했다. 상당히 아슬아슬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란다.
우희는 꼿꼿한 바늘 같은 장륜언이 쾌감을 부정하며 무너지는 상상을 잠깐 음미해 보았다. 위세준에게 나쁜 짓을 시켜 보면 어떨까. 말수 없이 침잠한 곽현의 허리가 덜덜 떨리는 장면도 떠올려 봤다.
“구미가 당기긴 한데요…….”
“그렇지? 그렇지?”
“누구 한 명 때문에 힘들 듯.”
맹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감히 상제가 허락한다는데 누가 반대하느냐며 새뽀얀 볼을 바르르 떨었다.
“차기 마군 후보요.”
“아.”
“1만 년이나 절 쫓아다녔잖아요. 평생에 사랑은 단 하나뿐이래요. 지금도 제 입에서 범왕 이야기만 나오면 미쳐 버리려고 한다니까요?”
“이거 원, 갑갑하구먼.”
맹아가 허공에서 부채를 빼 들었다. 한낱 부채로 속의 천불이 식겠냐만 부채질조차 안 할 순 없었다. 그러고 보면 애당초 이겸이 마군 후보까지 된 것도 우희를 향한 집착 때문이었다.
“그놈이 아직 덜 살아서 그래.”
맹아가 침을 튀기며 욕했다.
“그놈도 한 10만 년 살다 보면 혼인이고 나발이고 서로 평온한 관계가 최고임을 알게 될 터다. 옭아매고 구속하는 건 저, 저, 저 냉상벽에 묶여서 벌 받을 때나 당하는 게지.”
분노의 부채질 소리와 탄식이 오가던 중이었다. 세 신선이 동시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입구를 등지고 있던 맹아가 우희에게 물었다.
“내 뒤에 있지?”
“……네.”
“좀 전부터 있었던 것 같지?”
“네.”
맹아가 몸을 돌렸다. 이로써 세 신선 모두 이겸과 마주 보게 되었다. 태율과 바둑을 두고 있어야 할 남자가 왜 여기 있을까. 무엇보다 어디까지 들었을까.
맹아는 갑자기 우희의 옆으로 가서 공손한 자세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은 우희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진짜 몸종일 때도 안 하던 시중을 들었다.
“옥황상제께서 단왕부를 찾아 주시다니 실로 대단한 영광입니다.”
맹아의 부채질이 맹렬해졌다. 우희는 부질없는 짓은 그만두라며 상제의 옆구리를 찔렀다.
“1만 년 전에 우희를 제게서 데려가셨다고요.”
“엄청 일찍부터 들었구먼…….”
맹아가 구시렁댔다.
“네놈 옆에 뒀으면 혼례식은 진이흔과 올렸을 텐데 그건 그것대로 못 견뎠을걸…….”
우희는 맹아에게서 부채를 빼앗았다. 그러고는 빼앗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속삭였다.
“그런 건 소리 내서 말하지 마시라고요.”
“사실인데 어쩌란 말이냐?”
“그게 사실인 것과 본인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는 건 별개라고요.”
맹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우희는 거래 조건을 다 듣기도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겨서 머리가 아팠다.
그때 맹아가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검지와 중지를 붙인 다음 힘을 모으자 맹아의 손끝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우희는 그게 기억을 지우는 도술임을 알아보았다. 좋아. 그렇지. 옥진도 제자리에서 상제의 결단을 응원했다.
“월하노인의 붉은 실도 끊을 수 있다면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건 일도 아니겠죠.”
이겸이 마치 모든 술수를 꿰뚫어 본 사람처럼 말했다.
“아니면 아예 시간을 뒤로 돌리시렵니까? 제가 선계의 도술엔 무지하여 어디까지 가능하신지 가늠치 못합니다.”
다만, 하고 말을 이었다.
“곁에서 우희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선계는 규율이 엄격하더군요. 신선은 일견 무책임한 듯 보여도 누구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자들이라 스승의 가르침을 귀히 받들며,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자 했습니다.”
맹아의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낱 현선도 이러할진대 만물을 관장하시는 상제의 양심은 어떨지요. 소인 진이겸, 그 깊은 심계를 짐작조차 못하겠습니다.”
“아악!”
맹아가 이겸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손끝에 맺혀 있던 푸르스름한 기가 어느새 황금빛이 되어 날아갔다.
이겸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간 빛은 뒤쪽의 장식 화병을 박살 냈다. 산산조각 난 화병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흰 가루가 되었다.
“죽이자! 저놈을 죽이자!”
“안 돼요!”
“상제폐하, 진정하시지요!”
“죽이자고!”
맹아가 핏발 선 눈으로 길길이 날뛰었다.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이 애집(愛執)에 돌아 버린 놈이 감히…… 상제 앞에서 양심을 운운해? 이 개차반 같은 새끼가……. 네놈은 이번 생의 진이흔을 잔혹무도하다고 싫어하지만 직전의 생에서 너는 뭇사람을 벌벌 떨게 하는 폭군이었다. 나는 매일 내 피로써 무고한 혼들을 씻으며 내 오판이 불러온 결과에 후회했거늘.”
맹아가 허공에다 주먹질을 했다. 죽이자는 말이 헛말은 아닌 게 주먹이 공중을 가를 때마다 이겸 뒤의 가구가 쪼개지거나 화병이 박살 났다. 우희와 옥진이 필사적으로 맹아를 막았다.
“태초부터 마군을 상대해 왔고 숱한 마군 후보자를 봐 왔지만 네놈은 그중에서도 최악! 최악질이도다! 어디 돌 데가 없어서 애집에 돌아, 살아 있는 원귀가 되려 해?”
역시 죽여 버리겠다며 달려들었다. 우희가 맹아를 끌어안고 외쳤다.
“죽이면 안 된다고요! 사후에 마군이 될지도 모르는데 지금 죽이면 어떡해!”
맹아의 몸부림이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맹아는 감격과 통한의 눈물을 글썽이며 우희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 말이 맞다. 우리 우희, 과연 저 처죽일 놈과는 달라. 혼란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고 있구나.”
맹아는 그간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 같다며 체한 사람처럼 가슴을 두드렸다. 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돼 부끄럽다고도 덧붙였다.
혹시 깜빡한 것일까? 맹아는 우희의 몸종으로 있는 동안 이보다 부끄러운 짓을 숱하게 저질렀다. 아무리 후보 시험의 일환이었다고 해도 참작이 가능한 정도를 넘어섰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지적을 하기에 적절치 않은 상황이었다. 우희는 상제가 왕비궁 전체를 가루로 만드는 것만큼은 막고자 했다.
한편 이겸은 이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처음과 다름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게 왜 붉은 실은 끊으셨습니까.”
이런 소리로 상제 속이나 긁으면서 말이다. 맹아가 다시 눈을 희번덕거렸다. 신선 수련하는 데에 목소리는 필요 없지 않으냐며 중얼대는 게 당장이라도 이겸의 목을 조질 참인 듯싶었다.
우희는 맹아 앞에서 손가락을 여러 번 튕겨 주의를 끌었다. 목을 분지를 기세로 이겸을 노려보던 맹아는 우희에게 눈을 돌리자마자 솜털 보송한 아기 여우를 보는 표정이 됐다.
이런 극단적인 편애.
우희는 내심 자기가 줄 하나는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옥황상제가 내 편이라니. 게다가 혼자 맨땅에서부터 수련해서 마군을 상대할 힘을 키우라고 압박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리해 보죠.”
우희가 말했다.
“첫째, 저와 소천이의 몸이 뒤바뀐 것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일이군요. 전 고뇌할 필요 없이 계속 단왕비로 살면 되는 거네요.”
“그렇단다.”
“둘째, 진이겸과 진이흔은 이번 생이 최대 고비예요. 이겸은 제가 달래고 가르쳐서 신선으로 만든다고 해도…….”
손가락을 꼽아 가며 말하던 우희가 이겸을 흘낏 봤다.
“진이흔은 어떡해요? 상제폐하, 제가 색선인 건 아시죠? 배운 게 하나뿐이기 때문에 전 그 방법으로밖에 제자를 못 가르쳐요.”
우희는 자신의 육신을 가리켰다.
“게다가 지금은 인간의 몸이잖아요. 신선일 때는 도력을 운용할 수라도 있었죠. 인간일 때는 직접!”
우희가 양쪽 검지 끝을 맞댔다.
“접촉으로밖에 할 수 없다고요.”
“그렇지.”
“진이흔도 저 때문에 환생했으니까 제 손으로 해결해야 할 텐데 어떡해요.”
맹아가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왼팔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한 뼘 반 길이의 단검이 소환됐다. 자루부터 칼날까지 검 전체가 먹빛이었다. 흔한 장식 하나 없이 투박했다.
“정화보검이니라.”
우희는 얼떨결에 두 손으로 단검을 넘겨받았다. 손바닥을 통해 검의 울림이 느껴졌다.
“정화보검은 횟수가 정해져 있는 영물이다. 새롭게 살을 찢어 그 피가 묻을 때마다 기회가 한 번씩 사라지니라. 기회는 단 세 번. 세 번 안에 심장의 피를 묻히지 못하면 자연히 파괴되지.”
“손가락을 찔러도 기회가 깎이는데, 찌르기는 또 심장을 찔러야 돼요? 하여튼 선계는 규율 까다롭기가 유난스러워요……. 음, 그러니까 이걸 진이흔의 심장에 꽂으란 거죠.”
어쨌든 그는 봉무국에서 왕의 신분인데 내가 그를 죽이면 일이 시끄러워지지 않겠냐고 물었다.
뭐, 황후는 되게 좋아하겠다만.
“몸은 죽지 않는다. 영물이라고 했잖느냐. 정화보검은 오로지 혼백을 소멸시키거든.”
맹아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남은 평생 멍하게 살다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더는 환생하지 못하고.”
“가여워라.”
우희가 혀를 찼다.
“이겸은 저랑 신선이 되는 동안 그 사람은 그렇게 소멸한다고요? 마음이 안 좋네.”
마군 후보인 것과 별개로 좀 불쌍했다. 맹아가 가볍게 웃었다. 넌 인간일 때도 진이흔을 안타까워하는 유일한 사람이더니 지금도 비슷한 말을 한다고 했다. 이는 붉은 실을 끊지 않았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였다.
대화를 듣고 있던 이겸의 눈빛이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