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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65화 (65/100)

65화. 상제께서 여기에요?

왕비궁에 이르자 일행은 자연스레 두 무리로 갈라졌다. 태율이 이겸을 콕 집어 바둑 한 판을 두자고 말했고, 이겸은 어째서인지 거절하지 않았다.

우희가 입모양으로만 ‘일은요?’ 하고 물었다. 이겸은 괜찮다고 답한 뒤 태율을 안내했다.

‘바둑 두러 가는 거 맞지? 지금 주먹질하러 가는 거 아니지?’

왠지 모르게 비장한 분위기가 감돌아서 우희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이겸이 강하다고 해도 인간에 불과한데, 부디 대사형이 짓궂은 장난을 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니다. 여덟째야. 네가 따라가 보거라. 저 두 남자 감시해.”

까마득히 높은 천선이자 사조님을 뵙게 되어 감개무량하던 여덟째였다. 또다시 남자를 감시하러 가라는 명에 여덟째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별수 있나. 자신은 극락정의 여덟째 제자고 우희의 말은 천명과도 같았다.

“예, 사부님.”

여덟째가 미련 가득한 눈으로 옥진을 쳐다봤다. 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 여기 계실 거죠, 라는 뜻을 전하며 옥진에게도 예를 갖췄다.

맹아는 그새 두어 번 와 봤다고 익숙하게 차를 따르는 중이었다. 우희는 맹아에게서 찻잔을 받은 다음 옥진에게 건넸다.

“과연 천하제일이로다.”

옥진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마르지 않는 샘이요, 뿌리가 땅 끝까지 뻗어 있는 과실수라. 동이 터 오기도 전에 족히 일곱 번은 피고 지겠구나.”

우희가 사부의 뜻을 바로 알아듣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부와 제자는 찻잔 너머로 시선을 교환했다. 차를 한 모금씩 마셔 목을 축였다.

“우희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남다른 무게가 실려 있었다. 우희는 사부가 인간계에 내려온 이유를 알려 주길 잠자코 기다렸다.

“사부가 예전에 마군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네.”

우희가 답했다.

“다른 이에게 마군 이야기를 하지 말라던 당부도 기억하고?”

이번엔 선뜻 답할 수 없었다. 완벽하게 까먹고 있었다. 우희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저, 여덟째한테 말했는데…… 입막음해야 하나요?”

“여덟째라면 네 제자이니 괜찮다고 해 두자.”

옥진이 그렇게 갑자기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며 안심시켰다. 우희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태초에 천지가 개벽한 후로 옥황상제께서 만물을 주관하고 계시니라. 상제의 곁엔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선관 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오랜 과로로 몹시 쇠약해지셨단다.”

마군과 과로 누적된 신선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희는 일단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데 곧 마군이 임한다는 예언이 내려온 게야. 너도 알다시피 마군의 등장 자체를 막을 순 없단다. 오로지 전력을 다해 대비할 뿐이지. 여하튼 두 분은 큰 시름에 잠기셨다. 특히 노(老)선관께선 자기 대신 상제를 보필할 자를 어서 찾으셔야 했지.”

우희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헝클어졌다가 갑자기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때 두 분의 눈에 흥미로운 인연이 들어온 거다. 1만 년 뒤, 인간계에서 천선이 될 몸이 하나 나오는데 안타깝게도 몸 주인이 될 혼이 너무도 허약하여 꽃봉오리조차 맺지 못하고 죽을 터라.”

“왜 제가 좀 아는 이야기 같죠…….”

“상제께선 안타까움에 가슴을 치셨단다. 저이를 살리면 반드시 대단한 천선이 될 텐데 이를 어찌할까.”

옥진의 섬섬옥수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우희가 자리했다.

“힘껏 찾아보니 당시 인간계에 하우희라는 소녀가 있었지. 하우희는 선기를 지녔긴 하나 한계가 뚜렷하여 아무리 수련해도 진선조차 될 수 없었다.”

사분사분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얼음장 같은 평가에 우희는 잠시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 진선조차 될 수 없었구나.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1만 년 전부터 정해진 사실이라니 뭐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에 상제께선 고뇌하셨지. 최고의 육신에 최고의 혼을 넣으면 그만일 텐데.”

“네…….”

“그냥 육신을 빼앗자니 원래 몸 주인에게 못할 짓이지 않느냐. 그리하여 둘의 자리를 바꾸기로 하셨단다. 원래 몸 주인은 수련 없이 신선이 되는 것이니 나쁘지 않은 보상이라 여기셨지.”

“그렇죠. 수련은 제가 했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영혼이 없었다. 우희는 도력을 쌓겠다며 온갖 험한 곳을 누비고 다닌 지난날을 떠올렸다.

제자의 멍한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하려던 옥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이다음부터는 당사자에게 직접 들으라고 하였다.

“마침 상제께서도 여기 오셨단다.”

“상제께서……. 네?”

우희가 놀란 나머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 사, 상제께서요? 옥황상제? 천궁의 주인께서 여기 오셨다고요?”

“인사드리렴.”

우희는 옥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일, 이, 삼, 사…… 십까지 센 다음 다시 사부를 보았다.

“아직 안 오신 것 같아요.”

“저기 계시잖니.”

우희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눈을 꾹 감았다 떠도 보이는 광경은 똑같았다. 만두 머리 맹아가 손을 꽃받침처럼 편 채 천진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사부님, 그러니까 상제께선 어디 계시나요?”

“네가 지금 보고 계신 분이란다.”

우희가 즉시 제 눈을 찌르려 했다. 맹아가 꺅,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우희야, 우희야, 네 몸이 얼마나 귀한 몸인데 어찌 그리 쉽게 상하게 하려느냐. 나와 노선관이 간신히 찾아낸 귀하디귀한 몸이니라.”

맹아가 우희의 눈에 대고 호오, 입김을 불었다.

“어디 보자. 괜찮으냐? 이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는고?”

이제는 얼굴 앞에다가 손가락을 흔들기까지 했다. 우희는 충격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러자 맹아가 또다시 호들갑을 떨면서 우리 귀한 우희가 바보가 되어 버렸다며 난리를 피웠다.

“상제……?”

“아이고, 드디어 말을 하는구나.”

외모는 여전히 만두 머리 소녀인데 말투가 달라졌다. 맹아는 옥진보다도 더 연식이 느껴지는 말투를 구사했다.

그것이 소름 돋게도 잘 어울렸다. 실제로 선계에는 어린 소년의 외모를 지녔지만 무슨 사건이 터져도 덤덤한 노신선이 제법 많았다.

그러니 상제가 열대여섯 살 소녀의 외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알겠다. 문제는 우희가 맹아를 거둬 맹아라고 이름 지어 준 이후로 상제를 몸종으로 굴려 먹었다는 데 있었다.

“제가 너무 굴렸나요? 그렇다면 사죄드립니다.”

우희는 몸이 날랬다. 아까 전까지 어린 몸종으로 대하던 이에게 얼른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됐죠? 그럼 전 여기서 빠질게요.”

“어허!”

상제 맹아가 우희를 부둥켜안았다. 우희가 아무리 바르작거려도 자기보다 키 작은 소녀의 품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대는 옥황상제다.

“우희야, 착하지? 잠깐만 이야기를 더 들어 보자꾸나.”

“뭘 더 들어요? 이미 결론이 다 나왔는데! 태초부터 뼛골 빠지게 일한 노선관께서 다음 마군 때까지 못 버티겠으니까 그 자리에 절 꽂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꽂은 다음엔, 어? 저도 과로사 직전까지 일해야겠죠!”

맹아가 감격 어린 얼굴로 우희를 올려다봤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본다니까……. 바로 그 말이니라.”

기가 막혔다.

“어쩜 우리 우희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칠꼬. 이러니 내가 널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느니라. 응당 상제 대리로서 백옥구슬 늘어뜨린 면류관을 씌우고 천궁의 보좌에 앉혀 마땅하느니.”

무엄하게도 상제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려서 그 품을 벗어나려던 우희가 멈칫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잠도 못 자고 착취당하는 노선관의 모습이 좀 옅어지려 했다.

“면류관이요?”

“그러엄.”

맹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내 너를 앉히려 하는 자리는 보통 천선의 자리가 아니라 상제 대리니라. 그 말인즉 내가 없을 땐 하우희가 만물을 주관하는 상제라는 뜻이지.”

“내가…… 옥황상제?”

“솔깃하지 않으냐?”

맹아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어떻게든 우희의 입에서 좋다는 답을 끌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넘어오려나? 곧 넘어올 것 같은데?

맹아는 우희를 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런 다음 허공에 대고 옷소매를 크게 떨치자 왕비궁 응접실이 돌연 천궁으로 바뀌었다.

이제까지 별별 절경을 다 보았다고 자부하던 우희는 지평이 넓어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단순히 천궁이 화려해서가 아니었다. 별을 박은 듯 반짝이는 기둥들이 아득히 높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구름 계단 위에 자리한 보좌는 인간계의 수많은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위압감을 띠었다.

보좌 앞에는 밤하늘 한 자락을 베어 온 양 검은 흑요석 탁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놓인 면류관은 눈부시게 새하얘서 분명한 대비를 이뤘다.

“저기가 바로 미래의 네가 앉을 자리니라.”

어느새 상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맹아가 우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마에 새겨진 영롱한 문양이 돋보였다. 어깨 부분이 처마처럼 날렵히 올라간 상제의 예복은 면류관과 같은 설백색이었다.

갑자기 키가 커졌나 했더니 구름을 밟고 올라서 있었다. 우희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굉장히 솔깃하네요.”

“그렇지?”

“이왕 신선이 되었으면 천상계에 올라가는 꿈도 꿔 봐야죠.”

“그렇단다. 거기다 그냥 천상계 신선도 아니고 상제 대리!”

우희는 보좌를 올려다보며 입맛을 다셨다.

“꼬박 1만 년 수련한 몸을 다른 사람에게 주라니 허탈하지만요. 옥황상제께서 보장하시는 미래를 거절한다면 그것대로 이상하지 않겠어요?”

“우희야! 잘 생각했다. 내 절대 너를 후회하지 않게—.”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예요.”

우희의 시선이 보좌에서 다시 맹아에게로 이동했다.

“마군과 맞서 싸우는 일? 중요하죠. 세상의 안위가 걸려 있는데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없죠. 당장 저를 키워서 상제님의 오른팔로 만들어야 하니 마음이 무척 조급하실 거예요.”

맹아가 뜬금없이 자긴 왼손잡이이니 너는 내 왼팔이 될 거라고 속삭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희는 맹아를 몸종으로 부릴 때 자주 골치 아팠음을 떠올렸다. 아랫것으로 부릴 때도 그랬는데 이자를 직속상관으로 모셔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가 마군이 될지도 아시는 거죠?”

맹아가 토끼 눈이 되더니 슬그머니 옥진을 쳐다보았다. 옥진은 고개를 돌려 천궁 기둥의 별을 세기 시작했다. 천궁 기둥이 단왕부 왕비궁의 기둥으로 돌아왔을 때도 옥진은 그놈의 기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본디 마군은 누구의 몸에 임할지 모른다고 했죠. 하지만 아예 예상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두 분을 보아하니 대충이라도 아시나 보네요.”

“어, 그게.”

“범왕 진이흔이 맞나요?”

우희가 먼저 의심 가는 자의 이름을 댔다. 맹아의 입꼬리가 축 처졌다.

“실은 나랑 노선관이 간과한 게 그 점이니라. 1만 년 전, 널 옥진에게 데려가기 전에 우리끼리 네 미래를 보았거든. 널 인간계에 그대로 두면 어떤 삶을 살지 말이다.”

맹아가 이쯤에서 귀밑을 긁적였다.

“지방 향리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경국지색인지라. 부모의 근심이 깊어 가는 와중에 한 소년과 연을 맺게 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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