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들이닥친 처가식구
“사부님께서 오셨다고?”
우희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여덟째에게 재차 확인했다.
“진짜 옥진 천선이 맞느냐? 옆에 있는 이들은 진짜 태율 진선과 진짜 맹아가 맞고?”
“사조(師祖: 사부의 사부)님의 실물을 뵌 건 처음입니다만……. 그래도 제가 대사백님과 맹아는 알아봅니다.”
“사부님이…….”
우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천선이 되어 올라가신 이후로는 한 번도 뵙지 못했다. 같은 신선이라도 천선은 함부로 만날 수 없었다. 맡은 일이 워낙 막중한 까닭이다. 혹시 대사형이 갑자기 유람을 떠났던 것도 사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서였을까?
“헉! 사부님, 옷이요! 여기선 옷을 입으셔야죠!”
급한 마음에 알몸으로 뛰어나가던 우희가 여덟째의 부름에 아차, 하고 멈췄다.
“던져!”
이겸이 침상 안쪽에서 집어 건넨 옷을 여덟째가 던졌다. 우희가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소매가 저절로 팔에 끼워지며 매듭이 알아서 조여졌다. 뒤따라 날아간 비단 띠가 우희의 부스스한 머리를 순식간에 정돈해 한 갈래로 묶어 주었다.
역시 신선의 도술이 최고라니까.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 비녀를 꽂을까요, 저 뒤꽂이가 어울릴까요, 단장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지만 우희의 성격엔 이렇듯 순식간에 준비가 끝나는 편이 통쾌했다.
제자를 데려오길 잘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극락정에서 한 명 데려올걸.
우희는 환히 웃으며 침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여덟째가 제 사부 뒤를 따랐다. 이겸은 침상에 혼자 남았다. 방금 전까지 우희가 누워 있던 옆자리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선계엔 남녀유별이 없나…….”
제자들이 우희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모습을 보면 장유유서는 확실한 것 같은데 말이다. 어째서 사부가 자고 있는 침소에 들어오고, 나신을 보거나 보여도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신선들은 다 이런가.
“아직도 모르는 게 많거늘 이런 상황에 신선이 셋이나 더 나타나다니.”
이겸은 약간 골치가 아파졌다. 새로 등장한 이들이 앞으로 도움이 될지 상황을 꼬아 놓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우희는 그들에 대한 신뢰가 두터울지 몰라도 이겸은 달랐다.
어쨌든 손님이 왔다는데 집주인으로서 나가 봐야 마땅했다. 이겸은 엷은 한숨을 내쉬며 새 의복을 가져오라 명했다.
* * *
저 멀리 보이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에 우희가 눈시울을 붉혔다. 유람 한 번에 수백 년이 우습게 흘러가는 것이 선계라지만 신선에게도 각자 특별한 존재가 있다.
우희에겐 사부님이 그러했다. 옥진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친부모 대신 어린 우희를 거둬 길렀고, 우희에게 집과 형제자매와 신선으로서의 새 삶을 주었다.
그 때문에 우희는 지금도 새해마다 사부님께 연하장을 썼다. 적당히 새해평안을 비는 보통의 연하장이 아니라 두루마리를 한참 말아야 할 길이의 서신이었다.
“사부님!”
우희가 큰 소리로 옥진을 불렀다.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인데도 옥진은 윤이 흐르는 검은 비단옷을 걸치고 있었다. 옷이라면 응당 달려 있을 만한 매듭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검은 물 한 줄기를 떼어 내 몸을 감싼 듯했다.
옥진이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우희가 자신을 부르기 전부터 이미 제자가 거기 있음을 아는 표정이었다.
“사부님!”
우희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환호와 비명 사이 어딘가에 해당하는 소리를 냈다. 극락정에서는 하늘 같은 사부이자 주인이지만 옥진 앞에서는 영원한 막내 제자였다.
누가 봐도 왕비의 귀인이기에 문지기들은 서로 잽싸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서둘러 손님 셋을 대문 안으로 들였다.
드넓은 정원을 단숨에 가로질러 옥진 앞에 도착한 우희가 곱게 포갠 두 손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제자, 사부님을 뵙습니다.”
아이처럼 달려온 것이 무색할 만큼 예의 바른 몸가짐이었다. 옥진이 예를 거두어도 좋다고 말했다. 우희는 금세 방글방글 웃으며 옥진의 팔짱을 꼈다.
“어쩐 일이세요? 어떻게 오신 거예요? 대사형의 연락을 받으신 건가요? 그럼 대사형은 제 사정을 어찌 알고?”
“우리 막내는 여전하구나.”
옆에 서 있던 태율이 말했다.
“여전히 대사형은 안중에도 없고 사부님께 찰싹 매달리기 급급하지.”
그가 다소 과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아이 키운 공은 없다고 하나 봅니다, 사부님. 수련에 도움되는 약초라면 그게 마계 끝에서 자란다고 해도 어떻게든 캐 와 먹였는데…….”
“허풍은.”
우희가 태율을 향해 눈을 흘겼다.
“모르는 이가 들으면 혈귀가 득시글대는 해골산에서 목숨 걸고 가져온 줄 알겠네요.”
태율은 강했다. 옥진의 제자 중에 가장 먼저 진선이 되었고, 이는 비슷한 나이의 신선 중에서도 드물게 빠른 승급이었다. 평소 약초만 만지고 산다고 해서 그를 얕보았던 자들은 정식으로 맞붙었을 때 하나같이 목숨만 겨우 건져서 달아나야 했다.
근데 딱 봐도 한눈에 알겠지 않나? 위험한 사람이잖아. 내 대사형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객관적으로 봐도 치명적인 극독처럼 생겼는걸.
우희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태율의 대체 어떤 부분에서 얕볼 만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지 말이다.
태율은 검은 옷의 사부와 대비되는 백의 차림이었다. 종잇장보다 얇은 흰옷을 겹겹이 걸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이 묘하게 흔들렸다. 깊은 눈매에 긴 속눈썹, 그리고 얇은 분홍빛 입술.
아무리 약초밭을 가꿔도 색선은 색선이었다. 그의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며나는 색(色)이 보는 이를 긴장케 만들었다.
지금도 봐라. 단왕부의 하녀들이 죄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태율만 보고 있지 않나. 그는 선계에서도 유명했다. 태율 진선이 지나간 자리에 어린 선자들이 나뭇잎처럼 쓰러져 있다는 이야기가 괜히 도는 말이 아니었다.
물론 우희에게 태율은 제2의 양육자 같은 존재였다. 무엇보다 태율에게 잡히면 항상 무언가를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옥진이 우희를 가르쳤다면, 태율은 우희를 먹였다. 다 몸에 좋은 것이긴 했지만 모든 것이 마냥 맛있지만은 않았다.
“가슴이 아프구나.”
태율이 천연덕스럽게 가슴께를 눌렀다.
“그간의 노고를 부정당하다니.”
그는 여전히 슬픈 얼굴로 품속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마개를 열자마자 새콤한 향기가 느껴졌다. 지나치게 익숙한 전개였다. 우희가 인상을 썼다.
“또, 또, 또!”
“막내야 이리 온.”
“어떻게 보자마자 또 먹여요? 이건 또 뭐야?”
“착하지.”
태율이 손을 까딱거렸다. 냉큼 이리로 오라는 뜻이었다. 우희는 사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지만 옥진은 막내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이에 우희는 단념하고 태율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시선이 우희의 단전에 잠시 머물렀다. 됐다는 듯한 눈빛이 아주 짧게 옥안(玉眼)을 스치고 지나갔다.
호리병 입구가 입술에 닿기 전, 우희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근데 이게 뭐예요?”
태율은 대답 대신 호리병 안의 액체를 막내의 입에 탁 털어 넣었다. 새콤한 향기 때문에 청귤이나 유자의 맛을 기대했는데 실상은 소태보다 쓰고 떫었다. 당장에라도 혓바닥을 닦아 내고 싶었다.
우희가 질겁하며 본능적으로 뱉으려 하자 태율이 친절하게도 막내의 입술을 꼭 오므려 주었다.
잔인해! 그럼 애초부터 향기를 입히지 말란 말이야. 각오라도 하고 먹을 수 있잖아.
“우리 막내는 미식을 좋아하잖니. 정확히 말하면 미식‘만’ 좋아하지.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도 입에 쓰면 안 먹으니까.”
태율은 우희의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양 웃었다.
“네 삶엔 도대체가 쓴맛(苦)이라곤 없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구나.”
우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뭔 미친 소리냐 싶었다. 세상 어느 누가 쓴맛을 좋아하냐. 게다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일부러 쓴 약을 만들어다 먹이나 말이다.
“타액이랑 섞여 있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넘겨야지?”
여전히 우희의 입술을 잡고 있는 채로 그가 말했다. 약의 쓴맛은 점점 더 지독해져서 이젠 혀를 통째로 뽑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덧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끝까지 삼켜야 이걸 풀어 줄 셈이구나. 우희는 눈을 감으며 쓰디쓴 침을 꼴깍 삼켰다. 마지막 잔여물이 목을 넘어가는 순간, 태율이 제 입술을 우희에게 갖다 댔다.
자유로워진 입술의 틈새로 태율 진선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흡사 우희의 몸속으로 한 줄기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수고했다.”
태율이 우희의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심히 흐뭇한 표정이었다.
“잘 삼켰어.”
“끝까지 안 알려 줄 거예요?”
우희가 심통 난 얼굴로 사탕을 받아먹었다. 약과 똑같은 냄새가 나서 경계했으나 이번엔 진짜 유자와 꿀을 갠 맛이었다.
“알려…… 줘야지. 어차피 알려 주려고 왔는데.”
우희는 열심히 입안에서 사탕을 굴렸다.
“인간들이 가장 비통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흘린 눈물의 정수란다.”
우희의 눈동자가 사탕처럼 도르르 굴렀다.
“그게 전부예요?”
“일단 주재료는 그거야.”
“일단, 이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두는 게 수상하잖아요. 그래서 부재료는 뭔데?”
태율이 웃음 지었으나 사부 옥진의 미소와 비교하면 인자함이 부족했다. 아마 본성이 인자함과 크게 상관없어서 그럴 것이다.
“자꾸 웃지만 말고요.”
대사형의 배에 주먹을 먹이려는 찰나 이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잖은 음성이었다.
“단왕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왕비의 사부와 대사형 되신다고요. 단왕 진이겸입니다.”
신선들의 고개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돌아갔다. 이겸을 처음 만나는 옥진과 태율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시선을 받는 이가 다소 오싹하리만큼 집요한 탐색이었다.
특히 두 쌍의 눈은 이겸의 중심부를 지그시 보았다. 옥진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우희도 첫 만남에 거길 보더니 이들도 다르지 않군. 색선들의 공통점인가?
이겸은 새삼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천하제일의 양기라고 찬탄하던 우희의 말이 사실인지, 그렇다면 ‘그게’ 바로 보이는 건지, 언제까지 저들은 특정 부위만 살필 것인지 꽤 난감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우희의 친정 식구였다. 이겸에겐 처가와 같다는 뜻이다. 인간계에서 24년을 성실히 살아온 진이겸에겐 오라버니가 막내 여동생에게 입 맞추는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희의 대사형은 확실히 그녀의 제자들과 달랐다. 입을 맞출 때,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겸을 쳐다보던 것에서 직감했다.
“우리 막내가 왕비라니.”
태율이 우희를 귀여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마지막으로 왕비를 해 본 적이 언제였지? 아니, 왕이었던가?”
“괜히 없는 말 지어내서 사람 속 들쑤시지 마시죠?”
우희가 되받아쳤다. 그녀가 이겸의 편을 들어 주고 있는데도 이겸은 속이 편치 않았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떤가?”
옥진이 이겸을 향해 넌지시 제안했다. 이겸은 집무실로 안내하려다가 왕비궁으로 생각을 틀었다. 이동하는 동안 사부의 옆에 달라붙어 재잘대는 우희의 목소리가 한없이 밝았다.
한편 이겸은 처가 식구들이 언제까지 자신의 허리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관찰할 것인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