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이렇게나 날 좋아하면서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진맥은 어제 바로 받았잖아요.”
우희가 피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게 시늉이라는 걸 아는데도 이겸은 순간적으로 흠칫하고 말았다.
“그렇긴 하지만—.”
“별일 아닌데 자꾸 의원을 부르면 제가 나이 드신 분 뵙기가 참 민망해져요.”
“만약의 경우란 게 있잖습니까. 왕비께서도 죽지 않은 인간이 홍진을 토하는 건 처음 보신다면서요.”
“그건 그래요.”
우희가 스스로의 몸을 내려다보며 희한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이겸은 평온한 말투를 유지하려 애쓰며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다.
“선계의 율법에 대해 밝으십니까?”
“음, 배워야 할 건 다 배웠죠.”
“신선이 인간과 30일 이상을 보내면 어떤 벌을 받는지도 아십니까?”
우희는 즉답하지 않고 이겸을 빤히 쳐다보았다. 질문의 의도가 궁금해서일까? 그녀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했다.
“신선은 시간이 흘러도 죽지 않고 낙뢰를 맞아도 죽지 않아요. 얼핏 대단하게 들리지만 방향을 조금만 틀면 어떤 식의 벌을 받는지 감이 올 거예요.”
우희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주홍빛 꽃물 아래 또렷하게 드러난 빈틈을 그녀도 의식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냉상벽(冷霜壁)이란 곳이 있대요. 선계와 인간계 사이의 틈인데 어떤 글자를 쓰는지만 들어도 온기라곤 없는 곳인 걸 알겠죠?”
찰 냉(冷)에 서리 상(霜). 이겸은 묵묵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눈 덮인 절벽 끝에 매달린 채 1만 년을 보내야 하는데 먹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얼음뿐이고 세 시진 이상 기절할 수 없어요. 30일의 기한에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맞아야 하는 낙뢰가 곱으로 늘어나요.”
원래 맞아야 하는 낙뢰 횟수를 묻기 전에 우희가 먼저 말했다.
“1만 년간 매일 한 번. 그러니까 1만 번이죠.”
“신선이 아무리 불사의 몸이라고 해도…….”
“몸은 살아 있어도 정신이 망가질 거예요.”
우희가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 선계에서 1만 년은 별로 긴 시간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다들 견뎌 보려 한대요. 벌이 끝나면 환생한 정인을 다시 찾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아예 손등이 보이게 돌려봐도 손톱의 주홍색이 점점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그런데 눈보라 몰아치는 절벽 끝에 매달린 채 시간을 보내다 보면 고통도 고통이지만 외로움이 사무치는 거죠. 거기엔 아무도 없고 벌을 받는 자신뿐이니까요.”
극락정에서 제자들을 호령하던 우희가 떠올랐다. 단왕부에서든 극락정에서든 그녀 주변엔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관심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희.
빙벽에 묶여 홀로 벌을 받는 그녀.
벼락을 맞는 고통은 대체 어떤 것일까. 이겸은 아득해졌다.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도 했다가 문득 정인이 보고 싶어 슬퍼지기도 했다가……. 그러다가 원망에 이르면 정말 망가지는 일뿐이겠죠.”
우희가 남 일처럼 말했다.
“벌 받고 나서도 무사한 신선은 몇 안 된대요.”
“엄혹하군요.”
“애초부터 하지 말라고 만든 거니까요. 선계의 규율은 교화가 목적이라기보다 그냥 진짜 벌을 내리기 위함이에요. 제가 느끼기엔.”
“인간은요? 신선이 그런 벌을 받을 동안 인간은 그저 환생을 거듭합니까?”
“네.”
우희가 시간차를 두고 웃었다.
“현생의 기억 따윈 깨끗이 잊고요.”
“그건.”
“불공평하다고 말하시려는 건가요?”
자긴 어렸을 때 사부님께 그렇게 투덜댔다며, 우희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이건 선계의 규율인걸요. 상을 받는 이도, 벌을 받는 이도 신선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인간계의 법에 신선을 끼워 넣진 않잖아요. 신선이 반역자의 후손을 살려 주면 장형 백 대. 이러지 않잖아요. 반대로도 마찬가지예요.”
쉬운 설명이었다. 막내 제자를 귀여워했다는 사부님은 그런 식으로 규율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본인의 제자를 거느리게 된 우희는 사부님에게 들은 대로 제자들을 가르쳤을 터다.
이겸은 자신이 보지 못한 우희의 지난 시간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걸 들으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하긴 이 때문에 벌 받는 신선의 원한이 깊어진 경우도 있대요.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혹독한 벌을 버티다 보면 또 달라질 테니까요. 제가 듣기론, 환생한 정인을 찾아가 죽인 신선도 있다고—.”
우희가 돌연 말을 멈췄다.
“한데 전하께선 왜 이런 걸 물으세요?”
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하의 성정상 단순한 호기심일 린 없는데.”
이겸은 시선을 화병으로 돌렸다. 백년해로를 뜻하는 원앙 한 쌍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낭만과는 거리가 먼 책사의 말에 따르면 현실에서 원앙은 일부일처나 백년해로와는 거리가 멀고 자유로이 관계를 맺는다고 하였다.
젊은 왕비의 방에 원앙 물건을 놓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나, 어쩌다 보니 우희의 성정과 맞아떨어지게 됐다.
자유롭고 호방한 이를 눈보라 치는 절벽에 매달리게 할 순 없었다. 자신이 이번 생에 그리움으로 병을 얻어 죽는다고 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자신은 참으면 된다.
참는 것이야말로 진이겸이 제일 잘하는 게 아니던가.
하나 우희의 상대가 범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겸은 조용히 결심을 굳혔다. 두 사람을 만나게 해선 안 된다고. 감정이 시작되기 전에 둘을 떼어 놓아야 했다.
원래 연분인 이들을 갈라놓는다고 욕을 듣는대도 상관없었다. 이런 자신이 이기적인가? 우희 본인의 의사도 중요하지 않는가? 여러 의문이 스쳤으나 1만 년의 형벌을 받는 우희의 모습 앞에선 모든 게 무의미할 따름이었다.
“왕비께선 극락정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아서요.”
우희가 선뜻 이해 가지 않는 눈으로 이겸을 쳐다보았다.
“심상찮은 기운의 인간이 걱정되어 봉무국으로 넘어오셨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그가 범왕이라면 신선의 도움까진 필요치 않습니다.”
“갑자기 범왕이 왜 여기서 나오죠?”
우희가 물었다.
“선계의 규율 이야기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요?”
“엮여 봤자 좋을 게 없는 자입니다. 남의 약점을 잡고 휘두르는 데서 만족을 느끼죠. 선계의 엄혹한 규율을 알게 되면 이 역시 본인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겁니다.”
“그러니까 전하의 말뜻은.”
“범왕에게 선계를 알려 주지 마세요. 신선과 옷깃 한 번 스치는 일 없이, 그는 철저하게 인간으로서 죽어야 합니다.”
우희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이겸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주저하는 기색이었다. 주저함과 우희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제가 범왕과 엮일까 봐 걱정되세요? 그래서 극락정으로 돌아가라는 건가요?”
“예.”
“그럼 여기 머물면서 그와 만나지만 않으면 되죠.”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이겸은 우희의 표정에서 뭔가 감추는 게 있음을 읽어냈다.
“혹여 벌써 그자와 만나셨습니까?”
이겸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범왕은 이미 만취 상태로 단왕부에 침입한 전적이 있었다. 설마 이번엔 왕비궁으로 직진했는가? 목소리에 어쩔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났다.
“길에서 마주쳤어도 모를걸요. 전 범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쪽은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압니다.”
자기가 한 말에 더욱 초조해진 이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자는 어디 있습니까? 그이가 돌아오는 대로 극락정으로 가세요.”
“왜 절 자꾸 극락정으로 보내시려는지 모르겠네요. 가더라도 별수가 없어요. 소천이랑 몸을 바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다시 돌아올 필요 없으십니다.”
우희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다시 오지 말라고요?”
뜨겁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가 힘겨웠다.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것이다. 진이겸은 절제에 익숙하니까.
속내를 드러내면 안 되는 황궁에서의 유년 시절에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겸은 조용히 반복했다.
“네, 다시는 봉무국 땅에 발을 들이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조건을 덧붙였다.
“저희 모두가 죽을 때까지.”
“이겸.”
“부탁입니다.”
이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희의 앞에 섰다. 그녀는 하지 말라고 강제하면 없던 오기가 생기는 부류였다. 무조건적인 금지로는 우희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하나 색선 본인의 입으로 말했듯이 그녀는 강강약약이라. 진심으로 도움을 구하는 상대에겐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에 이겸은 무릎을 꿇었다. 우희는 더없이 총명하므로 이겸의 무릎 꿇음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이다.
“이해가 잘…… 안 돼요. 당신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우희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지난번엔 매년 하루씩 30년을 만나자는 말을 하더니 이젠 그냥…… 가라고요?”
“미안합니다.”
“미안하면 당장 일어나요. 협박하는 거야 뭐야.”
이겸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 왕비궁에 의원이 들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이, 내가 피 토하는 시늉만 해도 움찔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희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바뀌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싫어요.”
우희가 힘주어 말했다.
“여기 있을래요. 어차피 지금 전 인간의 몸이니까 30일의 제약에 해당되지 않아요. 극락정에서 준비가 끝날 때까지 있어도 괜찮다고요. 게다가 범왕은…… 지켜봐야 돼요. 그 사람이 그……인지 확실히 하지 않으면.”
범왕 이야기만 나오면 우희는 태도가 이상해졌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어떻게든 구실을 찾아서 둘러대는 목소리가 점점 혼잣말처럼 작게 기어들어 갔다.
“범왕이 정말 그……라면 하우희 정도의 인연으로는 판도가 바뀌지 않을 거예요.”
다른 것도 아니고 인연이란 단어에 겨우 잡고 있던 이성이 툭 끊겼다. 갑자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대는 이미 두 번이나 여길 떠났으면서. 매번 돌아왔지만 또다시 떠났지 않나.
돌아오고 나서도 어찌했나. 불안에 떠는 날 달래고 추슬렀지.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잃어버리시면 안 돼요.」
말을 하는 그대도, 그걸 듣는 나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또 떠나려 하는구나. 한데 생각보다 내 상태가 심각해 보이니까 떠난 후를 대비하려는 거구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대답했다. 그대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 줄 아니까. 당시 나를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한편으론 기대했지. 잘 지내겠다고 약속하면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떠나려는 그 마음을 거둬 줄까 싶어서.
‘그런데 이제 떠나라고 하니.’
이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대는 범왕을 봐야겠다며 돌아가지 않겠다는군…….’
이겸이 고개를 숙였다. 오장육부가 불길에 타들어 가는 듯했다. 범왕을 향한 질투심 때문인지 불길 속으로 걸어가던 꿈속의 우희가 자꾸만 떠올라서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대체 이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런 게 남아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그때 우희가 갑작스레 이겸에게 달려들었다. 두 눈에 화가 서려 있었다.
“이렇게나 날 좋아하면서.”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