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만일 그대의 짝이 내가 아니라면
이겸은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우희의 꽃물 들인 손톱을 쳐다봤다. 매일이 똑같은 여름인 것 같아도 우희의 손톱을 보면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손톱의 주홍색이 조금 밀려났다.
다시 꽃잎을 짓이겨 손가락에 묶어 주고 간지러운 하룻밤을 참게 하면 여백이 메워질 터다. 하지만 고운 손톱에 색을 덧입힌다고 똬리를 튼 불안까지 사라질까?
우희는 범왕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호기심인지, 또 다른 감정인지는 두고 봐야 알 것이다. 중요한 건 우희 스스로도 이를 자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겸에게 범왕 이야기를 들을 때 무관심한 척 연기를 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형편없는 배우였다. 황궁 연회 때와 비교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황궁 연회 땐 우희가 감춰야 할 게 없었다. 남들 앞에서 주목받는 일이었다. 원래 당당한 기질의 우희에겐 숨쉬기만큼이나 쉬웠을 것이다. 거기서 그녀는 이름이 심소천인 척만 하면 되었다.
색선은 검에도 능하고 인간계의 권력 구도에도 밝지만 거짓말만은 정말 못했다.
‘예전에 범왕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별 반응이 없었는데.’
이겸은 끝으로 갈수록 휘어지는 단도를 닦으며 생각했다.
‘제자의 보고를 들었을 때부터였어. 황도로 이동 중인 불그스름한 강한 기운. 봉무국에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듯했지.’
그녀가 자꾸 범왕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일까?
우희는 신선이었다. 본인 입으로 위험에 처한 인간을 구제하고 살생을 멀리한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범왕을 견제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혹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우희는 범왕을 모른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디까지 냉혹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겸의 주변인 중에서 범왕과 제일 비슷한 성정을 지닌 이는 황후 오은이었다.
오은은 일찌감치 범왕을 죽이자고 했다. 너희 형제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면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뜯어말려도 강행할 거라고 했다. 저놈은 죽여야 한다고. 후환이라는 단어는 범왕 진이흔을 두고 쓰는 말이라고 했었다.
결과적으로 오은은 범왕을 죽이는 데에 실패했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비절영 수하들을 보내서 암살하려 했지만 다들 범왕의 손에 죽었다.
이겸은 이제껏 범왕을 향해 살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형수가 그를 일컬어 후환이라 하는 이유를 알았다.
이흔은 이겸을 싫어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그랬다.
그는 이겸의 바르고 곧음이 싫다고 했다. 선황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도 계승권엔 관심 두지 않는 것이 싫다고 했다. 모두가 황제의 눈에 들려고 애를 쓰는데 이겸 혼자 태연하고 당연하게 특혜를 누리는 게 거슬린다고 했다.
자신들이 민가의 형제였다면 조금 달랐겠으나 불행히도 이겸과 이흔은 황자의 신분이었다. 이흔의 화살은 이복동생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향했다.
이겸이 스스로와 제 옆 사람들을 챙길 수 있기까지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이흔의 안에는 뿌리 깊은 가학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흔이 추방당하다시피 간 변경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건 전혀 놀랍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피를 봐야 하는 자가 살생을 허락받았으니 이보다 적성에 맞을 수가 있을까.
「맹장(猛將)이지. 봉무국에서 너와 싸워 승패를 가릴 수 없는 유일한 자일 것이다.」
친형이자 황제 이락이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손에 검을 쥐여 주고 적진으로 내몰면 일당백을 해내니, 최대한 살려 두고 쓰는 편이 좋겠지. 여차하면 적국과 내통한 죄목으로 제거할 수도 있으니까.」
「……변경의 거친 바람에 그 살기가 더 등등해질 것은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누군가는 저 험한 곳을 지켜야 한다. 실력은 믿을 수 있으되, 언제든 죽어도 아깝지 않은 자. 짐이 널 변경으로 보낼 순 없지 않느냐?」
친형 이락이 갈수록 황제다워지듯, 이복형 이흔은 점점 더 피와 가까워졌다.
이흔이 갑자기 황도로 돌아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단왕 부부의 금실이 지극하다는 소문이 저 멀리 변경 땅까지 닿은 까닭이다.
이흔은 우희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항상 시작은 같았다. 그러다가 상대가 경계심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상상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통스럽게 한 뒤 이겸에게 그것을 보게 할 것이다.
우희에게 도술을 부릴 수 있는 제자가 열 명이나 되는 점은 이겸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흔은 어떡해서든 그녀를 망가뜨릴 방법을 찾아낼 터다.
무슨 수를 써서든.
‘결국엔 그 길뿐인가.’
이겸이 눈을 감았다.
‘원래의 몸을 되찾은 다음 봉무국으론 발길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방법뿐일까.’
입안이 썼다. 사실 이겸이 부탁하지 않아도 우희는 이미 그러기로 결정한 후일지도 몰랐다.
신선은 불사의 몸이라고 한다. 죽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다. 벌써 1만 년을 산 우희에게 진이겸은 어떤 의미일까.
당장은 이겸에게 마음이 기울었을지 몰라도, 앞날을 생각하면 이겸과 깊이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겸 스스로 생각하기엔 그랬다. 우희가 지금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일 극락정으로 돌아갈래요. 다신 안 올 거예요.’라거나 ‘역시 당신과는 30일만 함께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하면 그녀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우희를 향한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앉혔을 때 어떤 결과에 이르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1만 년을 자유로이 살아온 이에게 내 옆에서 인간으로 살다 죽으라고 강요한 다음, 내가 이러는 이유는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속삭이면 그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이겸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모순이구나. 연심을 멈출 수가 없기에, 더더욱 멈춰야만 한다는 것이.”
우희는 자기 사람으로 거둔 소천이 이겸을 꺼리므로 이겸을 극락정에 둘 수 없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녀의 사부님이 가르친 대로.
이겸은 즉시 우희가 한 말을 이해했다. 먼저 한 약속이 있기에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미안해하는 우희가 좋았다. 그리고 우희의 좋은 점은 그녀를 더 밀어붙이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서로를 이해하기에 사랑이 있어도 헤어진다는 말. 예전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희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이겸 역시 하루아침에 단왕부를 놓아 버릴 수 없으므로.
“한데 이 와중에 범왕까지 겹치다니. 내 속이 타들어 가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신경이 쓰였다. 아니, 단순히 신경 쓰인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이흔과 우희만 떠올리면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이 모든 게 어떠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우희가 사라진 밤에 자신이 꿨던 기묘한 꿈이며, 거기서 나온 우희의 이름, 어느 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노래, 그 노래를 듣자 붉은 구슬을 토해 낸 우희까지.
왜 지금에야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희와 소천의 몸이 뒤바뀐 건 올해 초봄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건만, 여태 별 변화가 없다가 왜 이흔이 움직이고서야.
이겸은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자신이 닦던 단도의 날이었다. 어두운 생각이 칼날처럼 이겸의 안을 파고들었다.
‘실은 그녀의 상대가 내가 아닌 이흔이라면?’
단도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흔은 우희를 망가뜨릴 대상으로만 보는데 우희는 그에게 빠져드는 게 괴로울지. 아니면 이흔도 우희를 원하게 되어서 선계로 돌아갈 길을 차단해 버리는 게 괴로울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흔은 결코 이복동생처럼 헤어짐을 선택지로 두지 않을 거란 점이었다.
「왜 너는 다 가지고도 애초에 그걸 원치 않았던 척하는 거지?」
변경으로 추방되기 전날 밤, 이흔은 야음을 틈타 단왕부로 잠입했다. 이겸은 지금 앉아 있는 집무실 의자에서 그를 맞았다. 호위무사 현의 검이 침입자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이겸은 이복형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꼿꼿하고 단정한 자세로 그가 하는 말을 들었다.
「진이락이 다음 태자가 되겠지. 권력 다툼엔 일절 관심 없는 척하던 그놈도 결국엔 뜻을 꺾었다. 우릴 더러운 족속인 양 싸늘하게 무시하던 그놈이 말이야.」
이흔에게선 독한 술 냄새가 났다. 그렇게 만취했는데도 단왕부 집무실까지 올 동안 발각되지 않은 점이 그의 실력을 말해 주었다.
「그런데 난 항상 오만한 진이락보다도 겸양을 떠는 네놈이 더 싫었어. 아우님, 왜인 줄 아는가?」
「……저는 늘 버금가는 자리에 머무르며 가장 좋은 것을 취하기 때문이겠죠.」
이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이에 이흔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돌연 어깨를 떨었다.
「진이겸.」
비틀린 웃음에 새어 나오는 살심. 호위무사의 검에 본능적인 힘이 실렸다. 이흔의 목을 타고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네가 다 가졌음에도 행복하지 않음을 안다. 네 안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부분이 있지. 이 형은 오직 아우님의 행복만을 빌겠네.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저 변경에서, 아우님께 소중한 존재가 생기길 손꼽아 기다리겠다는 말이야.」
잠깐의 침묵 끝에 이겸이 입을 열었다.
「내일 먼 길을 떠나셔야지 않습니까. 이만 댁에 돌아가 쉬세요.」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전하께 아룁니다. 왕비마마께서 의원을 부르셨습니다.”
하인이 문 밖에서 보고했다. 의원의 출입 보고는 그가 맡은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이겸은 들고 있던 단도를 내려놓았다.
“왕비께서 편찮은 것이냐?”
“그건 알리지 않으셨습니다만…….”
“증세는?”
“심한 복통이라고 들었습니다.”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비궁으로 가는 동안 범왕과 관련된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오직 우희 그녀뿐이었다.
* * *
“월경통이에요. 아픈 사람은 무조건 쉬라고 말했는데도 상아가 기어코 참아 가며 일을 했더라고요.”
우희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저번에 제가 사라졌을 때 충격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나 봐요. 상아의 잘못이 아닌데도요.”
“왕비께선 그리 생각하셔도 본인은 다를 겁니다. 당시 상황을 계속 떠올리면서 본인의 잘못을 찾았을 테죠.”
이겸이 말을 이었다.
“잘못은 시정하면 되니까요. 시정하면 다음엔 다른 결과를 맞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요. 아마 상아는 그날 자기가 왕비 곁을 지켰다면 뭔가 달랐으리라 생각하나 봅니다.”
우희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게 아닌데, 싶은 것이다.
많은 말이 입안에 머물렀지만 이겸의 음성을 입고 나간 것은 우희의 안부 질문이었다.
“왕비께선 좀 어떠십니까? 의원을 부른 김에 같이 진맥을 받으셨다면 좋았을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