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이겸의 표정은 한없이 어색했지만 그의 반박은 본인답게 논리적이었다.
“기록이 없습니다. 역사서에도 없고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노래를 모아 둔 서책에도 전혀 없어요. 즉 한때 존재했어도 유명하지 않다는 뜻인데, 그런 노래를 한 소절만 부른다고 기억이 나시겠습니까.”
“그럼 답은 하나뿐이네요.”
우희가 활짝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르셔야겠네.”
이겸이 곤혹스러워했다. 이에 우희가 눈을 더욱 반짝였다.
“음탕한 노래인가 봐요. 그죠?”
“아닙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어요. 분명 그런 노래일 거야.”
“이젠 이상한 방향으로 기대를 하시네요. 아예 말을 꺼내지 말 걸 그랬습니다.”
왜 이렇게 진이겸을 놀리는 게 귀엽고 재밌지? 우희는 즐거움이 완연한 얼굴로 상대를 달랬다.
“알았어요. 진지하게 듣고 나서 기억을 되짚어 볼게요.”
보란 듯이 허리를 펴고 자세를 고쳐 앉자 이겸이 우희를 흘끗 보았다. 그가 목을 가볍게 가다듬었다.
이겸이 첫 소절을 부르자마자 우희는 자신이 좋아하는 유의 노래가 아님을 깨달았다.
“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마저 나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騅不逝).”
비통한 곡조는 이겸의 낮은 목소리를 만나 자못 엄숙해졌다.
“오추마가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리(騅不逝兮可奈何).”
다음 소절을 부르기 전에 이겸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주 미미한 머뭇거림이었지만 우희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놓칠 수가 있을까? 이겸이 노래를 시작했을 때부터 우희는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졌다.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할까(虞兮虞兮奈若何).”
이겸이 좀 더 느리게 마지막 가사를 반복했다.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할까(虞兮虞兮奈若何).”
모르는 노래였다. 우희 역시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단순히 슬프기로 따지면 이보다 애통한 노래도 많았다.
그런데 몸이 이상했다. 조금만 움직이면 땀이 흘러내리는 여름이건만 우희의 몸은 한겨울에 북풍한설을 맞는 것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이상한 게 어디 몸뿐일까. 돌연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콱 조여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다가 갑자기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이 내려앉았다.
우희가 괴로움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다음 순간, 몸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짐과 동시에 우희가 허리를 숙였다.
“왕비!”
피를 토했다. 우희는 제 입에서 나온 선혈이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할 뻔한 몸을 이겸이 붙잡아 주었다. 어째 쓰러진 쪽은 우희인데 이겸의 얼굴이 더 사색이었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아, 아뇨. 됐어요.”
“각혈하며 쓰러지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갑자기…….”
이겸은 우희의 몸에 손을 함부로 대지도 못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상태를 더 악화시킬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저 눈으로만 상태를 살피다가 말했다.
“설마 노래 때문입니까?”
“네?”
“제가 부른 노래가 무언가 나쁜 영향을 끼친 게 아닙니까? 저는 그쪽 분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주술이라든가 저주라든가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주술…….”
“지금은 어떤가요? 그렇게 아파 보이신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우희는 사실 이겸의 질문보다도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바닥에 뿌려진 피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우희가 멍하게 집어 든 것은 팥알 크기의 알갱이였다. 말랑한 핏빛 알갱이를 두 손가락으로 짓이기자 그것은 톡 소리를 내며 터졌다.
“이게 왜 이 몸에서 나오지?”
우희가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없는데.”
조심스레 이마의 열을 재고 맥을 짚어 본 이겸이 우희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방금 봤어요? 제가 터뜨린 거.”
“원래 바닥에 있던 게 아닌가요?”
“바닥은 깨끗했어요. 제가 토한 피에 섞여 나온 거예요.”
순간 이겸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우희는 얼른 복잡한 생각을 중지시켰다.
“선계에선 그걸 홍진(紅塵)이라 불러요. 네, 속세의 홍진에서 벗어난다고 할 때의 그 홍진 맞아요.”
“왕비께 해가 되는 건 아닙니까?”
이겸에겐 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중요해 보였다.
“해가 되진 않아요. 이걸 뱉는다고 막 죽고 그러지 않거든요.”
우희가 알갱이를 터뜨렸던 손가락을 이겸의 코에 들이밀었다.
“흙냄새가 나는군요.”
누가 봐도 핏덩이를 짓이겼는데 비릿한 피가 아닌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우희가 손수건으로 입가와 손을 닦았다.
“제가 얼떨떨해진 이유는요. 이건 평생 수련을 한 인간이 죽고 나서 뱉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이걸 뱉고 나야 비로소 선계에 들어올 수 있어요. 근데 저는…… 소천이의 육신은 아직 죽지 않았잖아요? 수련을 한 지도 얼마 안 됐고요.”
이겸에게 부축을 받으며 일어났다. 홍진을 뱉고 나자 몸은 언제 아팠냐는 듯이 대번에 괜찮아졌다.
소천이에게 네 몸은 어찌 이러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아이인들 알까. 훨씬 오래 산 하우희조차 생소한 경험인데.
하여튼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가설에 근거 하나가 더 추가됐다. 우희는 차로 입을 헹궜다. 그동안 이겸은 피가 섞인 탓에 갈색이 되어 나오는 찻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하께선 요주의인물에 관해 들으신 것 없으세요? 전 황후마마께 제일 위험한 자를 꼽아 보라니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름 하나를 대셨어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여덟째에게 보고받은 사실은 감춘 채, 우희가 이겸을 떠봤다.
“범왕이 황도에 들어왔다더군요.”
이겸은 상대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싫은 표정으로 말했다. 잠깐 우희의 양심이 따끔했다. 자기는 비밀 몇 개를 감추고 있는데, 이겸은 묻는 대로 대답해 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증거가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서 그래. 우선 나부터 이해를 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차기 마군에 관한 이야기잖아. 선인들도 쉽게 입에 올리지 않는 화제를 막 뿌리고 다닐 순 없어. 그런 의미에서 이겸에게도 입조심해야지. 윤곽이 확실해지면 그에게도 알려 줄 거야.
색선은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범왕이요.”
최대한 흥미 없는 척을 하려니까 이것도 나름 힘이 들었다. 우희는 범왕 두 글자를 주의 깊게 곱씹는 시늉을 했다.
“황후께서도 범왕을 지목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겸이 물었다. 내 연기가 너무 과했나? 왜 알고 있으면서 처음 듣는 척하냐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우희가 지레 찔려서 그리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 네, 진이흔이라고 단언하셨어요.”
“그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니까 기분이 묘하군요.”
이겸은 입도 대지 않은 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독배를 보듯 한 눈빛이었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았겠지만.”
“……그러게요.”
“황도에 들어왔으니 왕비와 접촉하는 건 시간문제일 겁니다.”
당연하지만 이미 ‘접촉’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 품으로 끌어당기던 이흔이 떠올랐다. 같은 무장이라도 이겸과 달리 손이 거칠었다. 몸통도 더 두꺼웠다. 우희를 훑던 야릇한 눈빛. 지금 생각하니 그건 사냥감을 살피는 눈이었다.
“범왕을 따르는 잔존 세력이 있습니다만 그들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고요. 저를 겨누는 건 범왕 개인의 원한이니까요.”
“그렇군요.”
“곽 호위를 왕비께 붙일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뛰어나도 신선을 능가할까 싶어서요. 그래서 말인데 제자분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돌아와도 진작에 왔죠. 흥미로운 보고를 늘어놓고는 다시 갔어요. 난 그걸 당신에게 숨기고 있고.
우희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뒤 대답했다.
“왔어요. 근데 별 소득이 없다고 해서 되돌려 보냈어요.”
“어디로요?”
“어디든요. 정보를 주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겸의 미간이 흐려졌다.
“그렇다는 말은 지금 왕비 주변이 비어 있다는 뜻이군요.”
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아예 자기가 달라붙어 호위할 기세였다. 우희는 손을 내저었다. 이 역시 필사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연기를 좀 해야 했다.
“비어 있긴요. 위험하긴요. 저 자신이 신선인데요.”
여덟째로부터 보고를 받기에도 혼자 있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멀쩡한 소천의 육신으로 홍진을 토하는 상황에 이른 이상, 진이흔과 단둘이 있게 될 가능성을 늘리고 싶었다.
이겸의 노래를 듣고 오늘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이흔과 맞닥뜨리면 어떤 기이한 일이 일어날까. 우희는 알아야 했다.
“제 목숨은 걱정 마세요. 범왕은 절 죽일 수 없어요. 저번에 뒤뜰에서 제 검 실력을 살짝 확인하셨을 테죠. 게다가 이건 남의 몸이잖아요. 최대한 잘 보전해서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거예요.”
이쯤에서 후퇴해야겠지? 괜히 어물쩍 남아 있다가 이겸에게 곤란한 질문을 듣고 싶지 않았다. 우희가 슬그머니 일어섰다.
“그런 의미에서…… 처소로 돌아가 잠시 누울게요. 아, 심각하지 않으니까 따라오실 필요는 없어요.”
“의원을 보내겠습니다.”
계속 사양했다간 더 수상해 보일 듯했다. 왕비궁에 오는 사람이 노의원인 게 낫지 이겸이나 현이 따라붙었다간 괜히 골치 아파진다. 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서는 우희의 뒤로 이겸이 조용히 물었다.
“한데 왕비께서도 정녕 처음 듣는 노래입니까?”
이번만큼은 시원하게 확답할 수 있었다. 우희는 자기도 모르는 노래라고 대답해 줬다.
* * *
그날 밤, 우희도 꿈을 꾸었다. 여태까지 신기한 꿈은 이겸만 꾸는 줄 알았다. 우희는 꿈꾸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이 또한 홍진을 토한 것과 같은 맥락일까?
꿈에서 우희는 어린 소녀였다. 저녁을 조금 짜게 먹었더니 자다가도 목이 말랐다. 졸린 눈을 비비고 부엌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졸음을 몰아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안방에서 두런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희는 조심스레 귀를 갖다 댔다.
『보냅시다.』
어머니는 울음을 꿋꿋이 참고 있었다. 생각과 동시에 우희는 놀랐다.
어머니라고?
『그 도관이라면 나도 소문으로 들었어요. 점잖은 여도사가 운영하는 곳인데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여자애들만 제자로 받는대요. 규모는 작아도 아이들 밥 굶기는 일은 없다고요.』
『하지만…….』
『별채 손님의 제안이 갑작스럽긴 하지요. 그렇지만 이건 기회인지도 몰라요.』
별채 손님이 언급되자 며칠 전에 해진 옷차림의 도사가 집을 방문한 사실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 하룻밤 신세를 지고자 한 것이 나흘째에 이르렀다. 우희의 집은 먹고사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서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었다.
『난 무서워요, 여보.』
어머니가 말했다.
『저 아이가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만 생각하면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이 재산이 좀 있대도 그래 봤자 지방 향리인데. 아닌 말로 내일이라도 호족 도련님이 지나가다가 우희를 끌고 가면 어쩌냐고요.』
『우희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거늘.』
『그러니까 더더욱.』
어머니의 말투가 결연해졌다.
『하루라도 어릴 때, 속세와 연을 끊는 게 좋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