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57화 (57/100)

57화. 마군에 대해서 들어 봤느냐?

“사부님께 아룁니다. 대사형이 감지한 기운은 범왕 진이흔이란 인간의 것이었습니다.”

여덟째가 보고를 하다 말고 우희의 눈치를 살폈다.

“사부님, 왜 회초리를 집어 드십니까?”

“내가 널 데려온 이유가 뭔 줄 아느냐? 이 사부가 인간의 몸으로 얻은 정보와 신선인 네가 구한 정보가 비슷하다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우희가 허공에 대고 회초리를 휙휙 휘둘렀다.

“하여튼 계속하렴.”

여덟째가 긴장한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 범왕은 단왕 진이겸의 숙적으로 올해 스물여섯이며—.”

우희가 회초리를 돌연 탐탁잖은 눈으로 봤다. 이걸로는 안 되겠다 싶은지 더 센 도구를 찾는 눈치였다. 여덟째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대단한 선기(仙氣)를 지녔습니다. 제가 비록 1천3백 년밖에 살지 않았으나 이제껏 본 인간 중에 제일이라 할 만합니다. 선계로 이끌어 줄 사부만 잘 만난다면 바로 다음 생에 신선이 될 겁니다.”

우희는 오랜만에 몸을 풀 겸 검을 빼 들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여덟째의 보고에 들고 있던 회초리를 내려놓았다.

한편 사부의 뜻을 오해한 제자는 더더욱 말을 빠르게 했다.

“마계의 신선 여럿이 이미 그를 탐내는 눈치더군요. 제가 누굴 모시는지, 제 사부도 범왕을 탐내는지 궁금해하기에 일단은 태율 진선의 존함을 댔습니다.”

여덟째가 얼른 부연설명을 했다.

“그들은 다 현선이더라고요.”

“우리 대사형은 진선이지.”

“그렇지요.”

“급으로 눌렀구나.”

“예.”

우희가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잠시 숨 막히는 침묵이 지나갔다.

“잘했다. 내 너를 가르친 보람이 있어.”

여덟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희는 바로 이런 정보를 원했다며 제자를 칭찬했다.

“그리고?”

“말 그대로 숙적입니다. 그는 단왕이 기뻐하는 꼴을 못 봅니다. 4년 전, 단왕이 심 낭자와 갑작스레 정혼하자 범왕은 두 사람의 정이 깊은지 알아봤습니다. 명목상으로만 부부인 걸 알게 되자 흥미를 잃었고요.”

“한데 지금은 이겸이 왕비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도성에 자자하지.”

“이해가 안 됩니다.”

여덟째가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뭐가 그리 싫은 것일까요? 범왕과 단왕 둘 다 스무 해를 좀 더 살았을 뿐이잖습니까.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그리 깊은 골이 생긴단 말입니까.”

“그건 네가 신선의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우희가 담담히 말했다.

“인간계와 선계의 시간이 어찌 같겠느냐. 신선의 눈엔 찰나에 불과하나, 그들에겐 평생인 것이다. 속단하지 말거라.”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덟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당장 사부의 말에 복종하는 것일 뿐, 진짜로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다.

우희도 실제로 겪기 전엔 그랬다. 찰나의 존재에 불과한 인간 남자를 자꾸 사랑하고 마는 사저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했다. 이제는 사저를 보는 시각이 아예 바뀌었다.

사저는 어떻게 매번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제자로 거둬서라도 연을 이어 가고 싶은 상대는 없었을까? 재차 생각해도 울보 사저가 대단하게만 느껴졌다.

“범왕의 모습을 내 앞에 띄울 수 있겠느냐?”

“해 보겠습니다.”

여덟째가 내공을 운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눈을 감고 집중하자 물안개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제자가 본 범왕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오늘 아침엔 장강이라더니 본명은 따로 있었네.”

우희가 됐다는 듯 손을 저었다. 여덟째가 기운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사부도 신선이다 보니 인간들의 오랜 원한보다도 범왕의 강한 선기가 흥미롭구나.”

우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보하듯 방 안을 거닐었다.

“너도 알다시피 신선은 두 부류로 나뉜다. 인간일 적부터 선업(善業)을 쌓으며 수련하는 선계의 신선, 그리고 살생으로 수련하는 마계의 신선. 전자가 후자보다 신선이 되기 훨씬 쉽기 때문에 많은 이가 전자를 택하지. 그렇게 균형은 맞춰지는 것이고.”

마계의 신선들이 탐내는 인물이라니 우희의 귀가 솔깃했다. 진이흔이 그렇게나 대단한 인물인가?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런데 말입니다. 사부님께선 진이겸에게 뜻이 있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우희가 여전히 상념에 잠긴 채 되물었다.

“내가 언제 진이겸을 향한 뜻을 거뒀다고 말했느냐?”

“아니요.”

“한데 왜 그런 괴이한 질문을 하는 것이야?”

우희가 몸을 돌리자 여덟째가 어깨를 움츠렸다. 사부는 그저 걷는 방향을 바꾼 것뿐이었으나 제자의 입장은 또 달랐다.

“마군(魔君)에 대해서 들어 봤느냐?”

여덟째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우희도 너무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 한동안 기억을 헤집어야 했다.

“나도 내 사부님께 들은 것이다. 마군은 갖은 원념의 집합체라, 한번 나타나면 온 세상이 피로 물든다지. 마군을 물리치려면 신선들로는 부족하고 상제까지 나서야 한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마군이 나타난 것은 두 번.”

두 번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인간과 신선이 죽어 나갔고, 불로 지진 듯한 흉터가 옥황상제의 몸에 가득 남았다고 하였다.

“특이한 점은 누가 마군이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란 거다. 방금도 말했지만 이건 원념의 집합체야. 세상 곳곳에서 원한, 분노, 살심, 집착이 누적되다가 일정치를 넘어서면.”

우희가 걸음을 멈추었다.

“가장 적합한 인간의 몸에 임하여 마군이 된다고 들었다.”

사부님의 사부님이 들려 주셨다는 이야기다. 마치 호랑이 담배 태우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태도로 흥미롭게만 경청하던 여덟째가 순간 표정을 바꾸었다.

“사부님께선 혹시 진이흔이 적임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적임자라니까 표현이 좀 이상합니다만.”

“마계의 신선들까지 관심을 보인다니까 드는 생각이다. 너도 알겠지만 마계의 그치들은 남에게 하등 관심이 없어요.”

우희가 대번에 마계의 신선 이름을 몇 개 댔다. 여덟째는 그들이 마계 밖에도 이름을 날리는 미남자란 사실을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인간계든 마계든 우희 선자의 기억에 남으려면 무조건 수려하게 생겨야 했다.

“그들 중 하나가 19만 년을 살았던가? 대사형보다 나이 많은 자랑 밤을 보내니까 기분이 묘하더라고. 하여튼 그자가 취한 상태로 말했었다. 혼세를 이끌 마군이 오실 날이 머지않았다고. 그때가 되면 자기들이 천궁에서 살 거라나.”

사부 옥진 천선 외에 다른 누군가가 마군 이야기를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우희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캐물어볼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여덟째야, 앞으로 넌 진이흔을 밀착 감시하도록 해라. 돌이켜 보면 별일 아닐 수 있지. 하지만 사부는 갑자기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보고는 매일 하라고 이르자 여덟째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예를 갖췄다.

“참, 그리고.”

우희가 일어서려는 제자를 붙잡았다.

“사부와 나눈 이야기는 비밀에 부치는 거다. 알겠지?”

“진이겸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가 봐라.”

제자들이 속 썩일 때도 많지만 같이 극락정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시간이 영 헛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우희는 말귀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나가는 제자를 흐뭇한 눈으로 보았다.

“근데 이상하네. 왜 다른 신선 중에 마군에 대해 아는 이가 없지?”

우희는 신선 중에서도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편이었다. 이제까지 만난 신선들은 열에 여덟이 우희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마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연회에서 한 번쯤 언급될 법도 한데. 혹여 입 밖에 내선 안 되는 불문율이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아예…… 모르는 걸지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우희의 머릿속이 질문으로 그득 찼다.

신선들 태반이 모르는 이야기를 옥진 사부님은 어찌 아시는 것이며, 왜 제자 중에 가장 어린 우희에게만 들려주었을까.

중요한 건 상제도 온몸에 화상을 입어 가며 간신히 막는 존재를, 고작 1만 년짜리 신선 하우희가 막기란 불가능할 거란 점이었다.

* * *

“전하, 무슨 생각 중이세요?”

우희는 이겸의 얼굴 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뒤늦게 정신이 돌아온 이겸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오신 줄도 몰랐군요. 집무실엔 어쩐 일이십니까?”

이겸의 뺨에 차가운 옥을 갖다 대자 그가 엷게 웃었다. 우희에게서 옥을 건네받고는 손안에서 느리게 굴렸다.

“같은 여름이라도 극락정은 전혀 덥지 않더군요. 지내기 힘드실까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걱정되시면 저 혼자 넘어갔다가 여름 끝나고 올까요?”

해맑은 우희와 달리 이겸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다녀오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했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우희는 웃으면서 이겸의 맞은편에 앉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전하께서 아무렇지 않게 극락정을 운운하시니까.”

우희는 부채를 살랑이며 그림 구경하듯이 이겸을 보았다. 이겸은 다시 보고문으로 관심을 돌리는가 싶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투로 운을 뗐다.

“이름이 우희라고 하셨죠. 혹시 무슨 자를 쓰십니까?”

“깃 우(羽)에 바랄 희(希)요.”

“헤아릴 우(虞)가 아니고요.”

“네, 깃 우. 이렇게, 이렇게 쓰는 글자요.”

우희가 손가락으로 깃 우 자를 써 보였다. 아주 쉬운 글자였다. 사형, 사저들은 이름에 날개가 들어 있어서 네가 그리 경공술에 뛰어난가 보다며 웃곤 했었다.

“한데 왜 하필 많고 많은 뜻 중에서 헤아릴 우를 먼저 꺼내세요? 저랑 되게 거리가 먼 뜻이지 않나요.”

“그러게요…….”

상대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맞장구를 친 이겸이 급히 말을 주워 담았다.

“본왕의 말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절대 왕비께서 무언가를 염려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뭐,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우희가 산뜻하게 대꾸했다.

“다들 그랬어요. 저랑 같이 있으면 세상일이 단순해 보여서 좋다고. 저 스스로도 동의하는 바예요. 하늘이 무너져도 하우희 하나 솟아날 구멍은 있지 않을까?”

질문 아닌 질문을 끝으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자 이겸이 실토했다.

“실은 꿈 때문입니다.”

그가 손안의 옥을 힘주어 쥐었다.

“얼마 전 꿈에서 들은 노래가 계속 귓가에 맴돌아서요. 거기서 우희라는 이름이 나왔는데 글자가 다릅니다. 어디서 봤나 싶어 서재를 뒤져 보고, 한번 들은 건 잊지 않는 장 책사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도 모르더군요. 그 어디에도 관련 기록이 없습니다.”

우리 단왕 전하께선 음률에도 밝으셨네. 꿈속에서 얼떨결에 새 노래 한 곡 지은 거 아닌가. 우희는 이때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헤아릴 우가 아니라 깃 우 자인 것이다. 끙끙 앓으며 근심하는 것은 하우희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몸을 날려 상황을 해결하고 말지.

“무슨 노래인데요?”

우희가 말했다.

“부를 수 있으세요? 전 전하보다 훨씬 오래 살았으니까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날지도 몰라요.”

처음에 이겸은 남의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이 없다며 어색해했다. 이겸이 몸을 사릴수록 우희는 재밌어져서 자꾸 한 소절만 불러 보라며 채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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