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이겸의 회유법
“그건 그렇고 부부가 둘 다 선계의 존재를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네요. 소천이도 그렇고 전하도요.”
우희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진즉에 극락정부터 데리고 갈 걸 그랬나?”
이겸의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혼잣말이었다. 우희는 자기가 방금 한 말을 부정했다.
“그건 별로였을 듯.”
이겸은 단왕비 몰래 뒷조사를 했다. 이제까지 흘려들은 정보를 토대로 조사해 나가는 동안, 이겸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은은한 향기가 나는 안개 속으로 몸을 던지면 어찌 될지 모르면서도 우희의 뒤를 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우희 스스로도 많은 고민을 했고 말이다.
“심 낭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본왕은 더 이상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요.”
이겸이 여덟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여덟째는 황도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심상찮은 기운에 대해 알아보러 막 단왕부를 나섰다.
“그러니 자꾸 저희 둘을 부부라고 부르지 마세요. 기분이 조금…… 그렇습니다.”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하시니.”
우희가 생선요리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생선살과 짭조름하고도 향긋한 장유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이번 기회에 알게 됐는데, 색선의 양심과 입맛은 중요한 연관이 있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이겸이 극락정에 대해 알게 되니까 갑갑하던 속이 내려갔다.
우희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인간계의 시간은 선계보다 빨리 흐르는 까닭에 단왕부로 돌아오자 어느덧 야심한 시각이었다.
그사이 왕부 사람들은 주인의 갑작스런 부재에 당황한 분위기였으나 저번과 달리 부부가 동시에 사라졌다는 점에서 판단을 유보한 상태였다.
과연 단왕 부부가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로 대문 앞에 나타나자 책사가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이겸은 놀란 이들의 마음을 달래며 왕비와 잠깐 저잣거리 구경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늦어졌다고 말했다.
단왕 부부는 요즘 두 번째 신혼을 만끽 중이었다. 왕부 사람치고 이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눈에서 서로 꿀이 떨어지는 부부가 귀가가 늦어진 이유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다들 어련히 알아듣고 평소의 저녁 식사에 버금가는 야식 상을 차렸다. 끼니를 놓쳤다는 왕비의 말에 두 번 세 번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데 둘은 진짜 인연이 아니긴 한가 봐요. 소천이는 그 겁 많은 아이가 선계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바로 부엌하녀로 쓰셔도 좋으니 극락정에 남게 해 달라고 무릎을 꿇더니, 전하께선 이제 아예 심 낭자라고 칭하시네요.”
이겸이 게살로 빚은 완자 그릇을 우희 앞으로 옮겨 주었다. 우희는 반색하며 완자 하나를 냉큼 입에 넣었다. 단왕부의 좋은 점은 역시 밥이 잘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 제 껍데기는 소천이 건데.”
“어찌 그리 쉽게 분리가 되냐는 뜻입니까?”
우희가 입안의 것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겸이 조용히 대꾸했다.
“외양만 같을 뿐, 그 외의 모든 점이 다르십니다. 착각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요. 본왕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시기는 분명 올봄이었고요.”
쓴웃음 비슷한 것이 그의 입가에 잠시 머물렀다.
“왕비께서도 보셨지 않습니까. 심 낭자는 속세를 떠나기만을 간절히 바라 온 사람이며, 본왕은 처소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부인을 대하기가 어려워 그대로 둔 자입니다. 저희 사이엔 절대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었죠.”
“하긴 그래요.”
우희가 이겸의 말을 받았다.
“심지어 소천이는 자기 몸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별로 주장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양기 때문에 전하와 입 맞췄다고 했을 때 경악했으면서도, 그 이상 진도를 나가도 되냐는 말에 선자님 마음대로 하시라고 했거든요.”
“네……?”
“그래도 자기 몸인데. 남이 함부로 쓰면 기분 나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얘가 벌써 득도를 했나? 희한했죠.”
우희는 청채를 한가득 집었다. 푸릇푸릇한 것도 씹어 줘야지. 빠르게 볶은 채소의 감칠맛에 감탄하고 있자 이겸이 찻물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반갑게 잔을 받아 따뜻한 차를 삼키니 입안이 개운해졌다.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우희의 그릇 위로 매운 향이 풍기는 가지요리가 놓였다.
쌀밥과 함께 입으로 떠 넣던 도중이었다. 우희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전하께선 안 드세요?”
“먹고 있습니다.”
“한 입도 안 드신 것 같은데요.”
이겸은 탕을 한 그릇 뜨나 싶더니 그조차 우희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거 봐.”
이겸은 뭐가 잘못됐냐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우희가 들고 있던 그릇을 내려놓았다.
“방금 정말 말도 안 되는 의혹이 스쳤는데요. 전하께선 설마 이 색선 하우희를…… 먹을 것으로 회유하실 작정인가요?”
이겸의 시선이 본인의 밥그릇으로 옮겨 갔다. 처음 상태 그대로인 쌀밥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아주 조용하게 맨밥을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이제 됐냐는 양 우희를 쳐다봤다.
“그 어이없는 표정은 뭐예요? 뭐가 떳떳한 거야. 상이 차려진 지가 언젠데 이제 맨밥 한 입 먹어 놓고.”
장난이었나? 이겸이 소리 없이 웃었다. 이겸의 젓가락이 다른 요리를 향해 움직였다.
“본왕이 이래 봬도 단왕 진이겸인데 어찌 그런 하수를 쓰겠습니까.”
그제야 음식을 제대로 먹더니 그래도 이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다는 투로 물었다.
“한데 단왕부의 요리가 입에 잘 맞으신 건 확실하죠?”
“맛이 특별하게 좋긴 해요.”
“그럼 됐습니다.”
자기가 만든 요리도 아니면서 되게 뿌듯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희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겸의 전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해 뒀다가 정원에 그네를 설치한 남자였다. 부인의 머리를 직접 빗겨 주고 손톱에 꽃물을 들여 주며 기뻐하기도 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당장 내일부터 요리까지 손을 대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진이겸은 분명 요리도 금방 익힐 것이다.
‘비단 찢는 소리가 듣고 싶다고 하면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느냐고 물으면서 직접 찢을 사람이야.’
우희는 진이겸의 행동력이 다소 우려스러웠다. 게다가 이겸은 어딘가 맹목적인 부분이 있었다. 다른 때엔 괜찮은데 오직 자기 부인의 일에 한해서만 그랬다.
‘하수가 먹을 걸로 낚는다면 고수는 어떤 수단으로 회유하지?’
이겸의 뜻을 떠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아예 시작조차 말라는 말도 있지 않나.
평소의 우희라면 웃고 넘길 말이지만, 지금은 평소도 아니고 진이겸은 보통 인간도 아니기에 우희는 오랜만에 인간계의 상식을 따라 보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직 여덟째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겸은 조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눈을 떴다. 우희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하자 그가 다정히 만류했다.
“저도 같이 가려고요. 제자가 소식 물어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릴 순 없잖아요.”
황후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는 구실이 어떨까. 이겸은 잠깐 생각해 보더니 그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심하셔야 합니다. 본왕의 정적들도 조회에 참석하러 오니까요.”
우희는 잠기운 그득한 얼굴로 웃었다.
“그들이야말로 조심하라고 하세요. 신선은 살생을 멀리하지만, 이 나라의 황후께선 다르시니까.”
이겸이 마주 웃었다.
“하긴 맞는 말입니다.”
웃느라고 길어진 입술이 우희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너무 자연스러운 입맞춤에 우희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로부터 반 시진 뒤.
“으응…….”
이겸이 고개를 틀며 우희의 입 안으로 더욱 깊숙이 혀를 넣었다. 도톰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우희의 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밀착한 채로 혀가 엉켰다. 타액으로 젖은 소리가 색정을 부추겼다.
“조금 더.”
이겸이 우희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입을 벌리세요.”
“이게 끝…… 응, 흐으…….”
“좋아요.”
이겸이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금 겹쳐지는 입술.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혀를 문질러 대는 느낌이 오싹했다.
‘응? 잠깐. 마차 안?’
우희가 눈을 떴다. 그제야 현실파악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지금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이었다. 당연히 문 너머엔 마부가 말을 몰고 있었다.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여닫이문 한 짝뿐이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뒤늦게야 이겸에게 물어볼 말이 떠올랐다. 우희가 말을 하려 하자 그것을 또 하나의 반응으로 받아들인 이겸이 손을 움직였다. 아주 은근하고 자연스럽게 우희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가만 놔두면 곧 치마도 걷어 올리겠다.
“왜 틈만 나면 입을 맞추시죠?”
일단 이 질문을 하기 위해 이겸의 어깨를 밀어야 했다. 붙어 있는 입술을 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마차에 착석하고 한동안은 나란히 앉아 있었건만. 턱을 괴고 창틈으로 아침 풍경을 보던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 지경인 것이다.
이겸이 중단된 입맞춤에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의관을 정제한 미남자가 아침부터 입가에 연지 얼룩을 묻히고 있으니 상당히 위험해 보였다.
“이러다 마차에서 색사도 치르겠네요.”
이겸의 눈이 잔잔히 빛났다. 한 번도 그런 발상을 해 본 적 없는데, 우희의 말에 뭔가 깨달음을 얻은 모습이었다.
“전하, 지금 하자는 뜻이 아니에요.”
“알아들었습니다.”
“과연 어떤 식으로 들으셨을지 의문스럽지만 넘어갈게요.”
우희가 거울을 꺼내 제 모습을 살폈다. 오늘은 일부러 장신구도 생략하고 옷은 엷은 나뭇잎 색으로 입었건만 이 모든 것은 우희의 얼굴을 가리지 못했다.
“이건 누가 봐도 너무 ‘하다가 나온’ 얼굴이잖아…….”
연지가 번진 것 때문인가 싶어 손수건으로 입가를 깨끗이 지워 봤다. 역시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 리 없었다. 우희는 괜히 옆에 앉은 사람을 흘겼다.
“무슨 관리가 조회에 참석하러 가는 마차 안에서 혀를 섞어요?”
“그런 말씀을 색선에게 듣고 있자니 감회가 남다르군요.”
“하여튼 입만 살았어.”
이겸의 입술이 웃음을 눌러 참는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우희의 손수건을 빌려 가 본인의 입가를 닦았다.
“정말 입만 살았습니까?”
우희가 힘주어 이겸의 어깨를 때렸다. 아프라고 때린 건 맞는데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신음 흘리는 표정이 너무 야했다.
“단왕 전하, 부디 몸조심하면서 사세요. 색선들이 어떻게 양기를 흡수하는 줄 알아요? 세상에 하우희 같은 색선만 있는 줄 아세요? 전혀요. 천만의 말씀. 저랑 사부님, 제 사형사저들이 특별한 경우고, 다른 색선들은 흡혈귀나 다름없어요. 양심도 없고 자제도 모른다고요. 그런 자들의 눈에 전하 같은 양기가 딱 들어온다?”
우희는 이겸의 팔을 잡아 송곳니를 박아 넣는 시늉을 했다.
“제발 죽여 달라고 말할 힘도 없을 때까지 양기가 빨리실걸요.”
이겸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부터 느끼는 바지만 이겸은 우희로부터 명령이나 협박을 들을 때마다 내심 기분 좋은 얼굴을 했다.
희한한 취향이라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마부가 곧 황궁에 도착한다고 알렸다.
“아무튼 왕비의 말씀은 본왕이 몸가짐을 좀 더 정숙히 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바로 그거죠. 소천이는 좀 더 늘어져도 되고, 전하께선—.”
입술이 겹쳐졌다. 마치 꿀사탕을 빨아먹듯이 우희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살 굴려 맛보고 간 이겸이 싱그럽게 웃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기막힌 시점에 마차가 멈췄다. 마부가 발받침을 내린 다음 문을 두드렸다. 이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리셔야 합니다, 왕비.”
“……두고 봐요.”
“발 디딜 때 조심하시고요.”
“감히 색선에게 도전을 해?”
먼저 내린 이겸이 손을 뻗어 왔다. 우희는 코웃음으로 물리친 뒤 혼자 힘으로 땅에 내려섰다. 이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마치고 황후궁으로 가겠습니다.”
본인의 잘못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입술 도둑이 뻔뻔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