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부부 사이에 끼어서
이게 무슨 짓이람
“그게 제 이름이 맞긴 한데요.”
우희가 떨떠름하게 인정했다. 이겸에게 본명을 불리는 기분이 묘했다.
“전하께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으니 터놓고 말씀드릴게요. 지금 여러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요. 우선 소천이는 인간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대요. 저는 극락정에 남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했고요.”
이겸의 시선이 소천을 향했다. 질책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길을 받는 입장에선 그런 세세한 데까지 알아챌 여유가 없었다.
“그만 좀 째려보세요. 애가 무서워하잖아요.”
“본왕은 째려…… 보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표현을 발음하기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한데 소천이 그만 겁주라는 말을 방금 전에도 하지 않았던가?
우희는 이 점을 일일이 걸고넘어지다가는 대화에 진척이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기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소천을 쳐다보지 말라고 말했다. 명령에 가까운 어조였는데 이겸은 기분 좋은 말을 들은 듯이 미소 지었다.
“하여튼 원래 몸으로 돌아가려면 도술을 써야 하는데요. 지금의 저는 도술을 쓸 수 없고 소천이는 가능해요. 문제는 소천이가 극락정에 머무는 동안 도력을 상당 부분 잃어서 몸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이에요.”
“다른 분들은 이를 도울 수가 없습니까? 예를 들어 운산의 대사형께선요.”
“좋은 질문이에요. 불가능해요.”
우희가 칭찬과 대답을 동시에 했다.
“몸을 바꾸는 도술은 오직 당사자만이 할 수 있어요.”
여기까지 말한 우희가 갑자기 표정을 달리했다.
“잠깐. 몸을 바꾸는 건 당사자만 가능해도, 잃은 내공을 채우는 건—.”
태율은 강하다. 우희 본체와 10제자를 합친 것보다 강하다. 괜히 진선으로 승급한 것이 아니었다. 태율이라면 우희 본체가 잃은 내공을 순식간에 채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쟁반을 들고 나타난 맹아가 낯선 손님을 힐끔대며 말했다.
“불가능해요. 태율 진선께선 출타 중이시거든요. 지금 운산 사향원에 안 계세요.”
“그럼 어디 있느냐? 맹아 넌 그걸 언제, 어떻게 알았고? 왜 내게 째깍 고하지 않았느냐?”
우희가 질문을 한꺼번에 퍼부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차 한 잔 내오는데 이리 오래 걸려?”
“……이건 새로 우린 차예요. 부엌에서 나오기야 아까 나왔는데 분위기가 영 험악하더라고요. 저처럼 하찮고 어린 몸종은 알아서 몸 사려야지요.”
“거기까지.”
호들갑은 됐다고 잘라 내자 맹아가 시들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신난 모양새구만. 싸움 구경을 할 수 있을까 목 빼고 보다가 차가 식어 버린 게 분명했다.
“이틀 전에 태율 진선께서 직접 만든 과자를 보내셨어요.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는데요.”
맹아가 품속을 뒤적이더니 곱게 접힌 편지를 꺼냈다. 우희는 보고가 늦은 몸종을 사정없이 째려보며 편지를 폈다. 과연 태율의 글씨가 맞았다.
“신선들이란.”
별 내용은 아니었다. 대사형은 오랜만에 북쪽으로 유람을 떠나니 귀여운 막내는 과자를 먹으며 잘 놀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1만 년이 지나도 숫제 아기 취급이랄까.
“이러면 못 찾는 겁니까?”
언제 옆으로 왔는지 편지를 슬쩍 들여다본 이겸이 이해 가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북쪽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너무 이상한 모양이었다.
“네, 못 찾아요.”
우희가 되물었다.
“선계란 굉장하죠?”
이겸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실 내공 채우기야 시간이 좀 걸릴 뿐이에요. 아무리 늦어도 가을이 끝나기 전엔 다 될 거예요. 그때까지 안 되면 진짜 너희들의 문제고.”
우희가 10제자를 서늘한 눈으로 훑었다. 갑자기 자신들에게 돌아온 화살에 10제자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중요한 건,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나면 저는 전하 곁에서 30일 이상 지낼 수 없어요. 선계의 규율이 그래요.”
이겸이 잠깐의 시간차를 두고 물었다.
“정확히 어떤 규율이죠?”
“신선은 인간과 정을 통할 순 있어도 도합 30일 이상을 함께 보내선 안 된다. 우린 인간과 아예 다른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사에 깊이 관여하면 균형이 깨져 버려요. 왜 이런 규율을 만들었는지 이해는 가요.”
우희는 씁쓸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30일 같이 지낸 후에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만날 순 없어요. 한 인간의 생을 통틀어서 30일인 거니까.”
“하지만 단왕비는요? 심소천에게는 평생 극락정에 있어도 좋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겸은 방금 자신이 한 말에서 답을 찾은 눈치였다.
“정을 통하지 않아서 가능한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요. 명목상 열한 번째 제자로 들인 거기도 하고요. 제자로 삼은 인간은 30일의 규율에서 예외가 되거든요.”
“그럼 절 열두 번째로 받아 주세요.”
순간 소천이 숨을 멈췄다. 소천의 모든 신경이 우희 자신에게 쏠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몇 번이나 확답을 주었는데도 ‘선자님’이 말을 번복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우희가 슬프지만 단단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그건 힘들겠어요. 제겐 선약이 있어서.”
우희는 소천의 손을 꼭 쥐었다.
“신선들은 불사의 존재라 시간관념이 흐릿하고 약속을 흘려보내기 일쑤랍니다. 제 사부님은 이 점을 누차 강조하셨죠. 너희들은 달라야 한다고. 한번 내뱉은 약조는 어떻게든 지키며 살라고. 이 말씀은 곧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다니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우희의 입가가 약하게 떨렸다. 기다리는 입장이 되고 보니 그제야 사부의 말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는 소천이에게 이미 안전을 약속했어요. 하우희는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킵니다. 전하가 계신 곳은 이 아이에게 안전하지 않은 곳이에요. 무엇보다 인간들에 학을 떼고 도망치듯 온 아이인데 또다시 인간 옆에서 지내게 할 순 없죠.”
우희는 자신의 말을 들은 이겸이 혹여 소천을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한편 소천이 또 본인 탓을 하지 않을지 걱정됐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이건 하우희의 결정이었다. 누군가를 탓한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하께선 평범한 신분이 아니시잖아요.”
우희가 말을 계속했다.
“단왕부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하루아침에 그들을 등질 수 있으세요? 저는 지금 책임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사부님 앞에서 했던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전하께도 ‘내 사람들’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으시잖아요.”
이겸은 섣불리 반박하지 않았다. 우희는 이겸의 그런 점이 좋았다. 당장 눈앞의 사람을 잡으려고 허튼 약속을 늘어놓지 않는 점이.
“제가 방금 어떤 방법을 하나 떠올렸는데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이기적인 부탁이라 입 밖으로 내기조차 꺼려집니다.”
이겸이 착잡한 숨을 흩어 냈다.
“폐하께선 이와 비슷한 일을 감행하셨죠. 전 그 결과를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몸은 옆에 있을지 몰라도 한 번 떠난 마음은 쉽게 되돌릴 수 없더군요.”
한 자 한 자 씹듯이 내뱉은 말에서 그의 감정이 묻어났다.
“30일……. 지금부터 매년 하루씩 만나면 30년을 볼 수 있는 거네요.”
“이겸.”
“쉰넷이면 무장으로서 짧지 않은 생이에요. 서른을 못 넘기고 명을 달리하는 병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쯤이면 태자도 정해졌을 거고요. 다만 유일한 걱정이 있다면, 그대의 눈에 쉰넷의 인간이 눈에 찰지.”
이겸이 웃음을 참았다.
“그게 지금 당장의 제 걱정입니다.”
1년 중에 단 하루라니. 이게 무슨 견우직녀 설화냔 말이냐. 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54세면 짧지 않은 생이긴 무슨. 단왕은 24세인 지금도 이토록 대단한 권세를 누리는데 그때엔 더 많은 사람을 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겸은 부드럽게 잘라 말했다. 거기까지는 마음 쓰지 말라고. 그 부분은 자신이 감당할 문제라고.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 가운데 갑자기 첫째가 끼어들었다.
“사부님,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하오나 인간계 쪽이 이상합니다.”
“어떻게 이상하다는 것까지 보고해야지.”
우희가 몸종을 눈짓했다.
“맹아가 혼나는 걸 보고도 똑같이 구느냐?”
“죄송합니다. 불그스름한 황토빛 기운이 봉무국의 황도를 향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를 들은 이겸이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봄철도 아닌데 꽃가루가 날아오는 것일까요?”
“아뇨, 선계에서 기(氣)에 대해 말할 땐 무조건 인물을 가리키는 거예요. 아니면 이형의 존재거나.”
우희가 눈가를 살며시 찌푸렸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은 저렇듯 움직임이 감지될 만큼 강한 색을 지니지 못해요.”
우희의 가슴이 이유 모르게 두근거렸다. 봉무국에 전쟁의 바람이 불어닥치려는가? 하지만 딱히 전쟁이 일어날 시국처럼 보이지 않던데.
“아무래도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우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첫째가 통로를 열었다. 누가 봐도 본인을 돌려보내려는 분위기에 이겸이 우희의 팔을 잡았다.
“그대는요? 우린 아직 이야기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같이 가야죠.”
이겸이 들으면 기뻐할 말 대신 다른 핑계를 댔다.
“여기서 지낸다고 몸을 당장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우희는 소천의 손을 토닥이려다가 한 팔이 이겸에게 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아주 찰나지만 ‘인간 부부 사이에 껴서 이게 무슨 일이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우희는 조금도 도움 안 되는 생각 따윈 얼른 떨쳐 내고 소천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가 놓았다.
“내 다시 넘어가야겠다. 참, 상아의 일은 잘 해결했느니라. 한데 이제 네 남편도 실상을 알게 됐으니—.”
“더는 제 남편이 아닙니다.”
“그 호칭은 재고해 주세요.”
양쪽에서 반박이 터져 나왔다. 우희는 아까 떨쳐 낸 의문이 또다시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인간 부부 사이에 껴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거야.”
왜 신선이 변명하는 입장으로 전락했는지 모르겠다. 우희는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며 실수라느니 습관이라는 말을 둘러댔다.
앞선 방문과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엔 여덟째의 멱살을 잡고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아직 사형들처럼 통로를 열 순 없지만 변신술에 능하고 비둘기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이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비둘기와 달리 우희의 말만 듣는다는 부분도 중요했다.
“너흰 내공을 열심히 채워 놓고 있어라. 관산 입구에 얼쩡대는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다가 양기를 쪽쪽 빨아내도록 해. 하나가 아쉬운 상황이니까.”
“예, 사부님!”
“하여튼 대답만 잘하지.”
우희가 제자들을 훑어본 뒤 이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은 뭐예요?”
이겸이 스며나는 웃음을 누르는 중이었다.
“이상하게 웃고 계시네.”
“원래 명령이 자연스러운 분이셨구나 싶어서요. 그것도 모르고 저와 책사는 일전에 평북 심가를 다루시는 걸 보고 새삼 감탄했었습니다.”
“아아, 그거.”
우희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기세등등했던 이유를 이젠 아시겠죠.”
옆에서 끌려오던 여덟째가 사부님은 기세등등한 정도가 아니라 천궁(天宮) 한가운데서도 발 뻗고 주무실 것이라며 입을 놀리다가 우희에게 응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