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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53화 (53/100)

53화. 뜻밖의 삼자대면

침입자가 신분을 밝히지 않자 10제자들의 공격 태세가 더욱 사나워졌다. 이들은 사부 앞에서만 전전긍긍할 뿐, 외부에서는 저마다 장래를 촉망받는 선인이었다. 다들 도력으로 뽑은 무기를 고쳐 잡았다.

저기서 이겸이 한 걸음만 더 다가온다면 10제자는 바로 무기를 날릴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한데 저자는 인간이 아닙니까? 인간이 어떻게 선계로 들어왔죠?”

누군가가 첫째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까 내가 연 길을 통해 넘어왔을 수도 있다. 사부님께 예를 갖추느라 모두가 잠시 통로에서 눈을 뗐지 않느냐.”

“아무리 그래도 인간이 초대 없이 선계에 들어오면 심한 내상을 입을 텐데요. 저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수상하군.”

둘째가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는 5척의 도(刀)를 이겸 쪽으로 들이댔다.

“어디의 끄나풀인지 당장 실토해라.”

우희가 손을 들어 올렸다. 소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고, 제자들은 이겸의 목을 딸 기세고, 이겸은 10제자가 으르렁대든 말든 우희만 쳐다보는 중이었다. 이 상황을 정리할 이는 하우희밖에 없었다.

“거둬라.”

우희의 한 마디에 제자들이 멈칫했다.

“내 손님이다.”

다들 수긍하기 어려운 눈치지만 사부의 말을 거스를 순 없었다. 10제자의 손에서 무기가 사라졌다. 시선은 여전히 이겸에게 고정한 채였다.

“선자님…….”

“걱정 말렴. 소천이 넌 이미 극락정 사람이야. 옥황상제의 명이라고 해도 널 돌려보낼 일은 없을 테니.”

안전을 약속하는 말투에 소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천의 손을 굳게 잡고는 자신의 뒤로 한 발짝 물러나게 했다.

상황을 주시하는 눈은 많은데 그 무엇도 이겸의 고요한 시선을 이기지 못했다. 우희는 이겸을 마주 봤다. 이래서야 어느 쪽도 먼저 입을 열지 않을 분위기였다.

“전하, 극락정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우희답게 뒷말이 붙었다.

“아무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이겸이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10제자는 내상 입은 기색이 없는 인간을 경계했지만 우희는 실상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이 이겸과 입을 맞춘 뒤 몽롱한 상태로 극락정 초대를 언급했던 기억이 났다.

“정말 통로로 뛰어드신 거예요?”

우희가 눈앞의 이겸에게 물었다.

“예.”

그가 짧게 답했다.

“그게 어디로 통하는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제가 저번에 얼떨결에 초대하지 않았다면 지금 전하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을 거라고요.”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겸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눈앞에서 그대가 사라지는데 본왕더러 두고 보라고요? 한 번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두 번은 안 됩니다.”

이겸은 이 말이 끝난 직후 주변을 훑어봤다. 신선이 사는 곳 중에서도 경치가 수려하기로 소문난 극락정이건만 이겸은 어째 큰 감흥이 없어 보였다. 시선이 다시 우희에게 돌아오기 바빴을 따름이었다.

“지난번에도 여길 오신 겁니까?”

우희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여기가 관산의 극락정인 거군요. 색선 하우희가 꽃다운 소녀 서른 명과 함께 산다는—.”

이에 대해 우희가 첨언하기 전에 이겸이 말을 마저 이었다.

“거짓 소문을 내셨다고요.”

“그게 거짓말인지 어떻게 아세요?”

“본인이 와룡당 당주라고 주장하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제 소식통의 말에 따르면 행색은 추레하나 정신은 또렷하다더군요. 와룡당 측에서는 사기꾼으로 판단한 모양인데, 노인은 대노한 한편 망신스러워하고 있다 합니다.”

우희는 생전 처음 듣는 듯한 이야기에 흐린 눈을 했다. 옆에서 제자가 사부의 회상을 도왔다.

“와룡당 당주라면 올해 초봄 아침 식사로 드신 양기입니다.”

“그래?”

“예, 그날 놈의 양기를 드시고 인간계에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제 기억은 그렇습니다.”

우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갑작스런 불쾌함이 치솟은 탓이었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난다. 오만함으로 가득 찬 놈이 아니었더냐. 양기 자체도 별로더니 아직 구차하게 살아 있어서 내 꼬리가 밟히게 해?”

“……처리할까요?”

행동력의 넷째가 끼어들었다. 우희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이겸이 이 자리에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너무 조용하고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있어서 순간 흠칫한 것은 비밀이다.

아니, 근데 이 인간 사내는 왜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 양기나 신선의 존재를 안 믿는 자인 걸 내가 빤히 아는데. 왜 이토록 평온해 보이냐는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서 진이겸이 가장 침착한 것 같았다.

“전하께선 어디까지 아시는 거예요?”

“전서구를 빼돌렸습니다.”

우희의 눈이 커졌다.

“그 전엔 소식통에게 관산의 극락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고요.”

이번엔 입이 벌어졌다. 10제자 사이에서 ‘저놈’의 정체가 뭐냐는 수군거림이 돌았다.

“운산의 사향원은 이곳만큼 유명하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강호인이 혹할 만한 전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운산의 산세가 그리 험한데도 산에서 다치거나 죽은 이가 드문 까닭은 산신령의 수호 때문이라는 말이 돈다 하네요.”

“거긴 제 대사형이 사는 곳이거든요.”

“대사형께선 함자가 어찌 되시는지요? 운미공자, 만월약선, 옥선랑, 태곡선생 중에 무엇으로 불러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그게 모두 대사형의 별명이긴 해요. 저희 쪽에선 보통 태율 진선이라고 부르지만.”

이겸은 마치 봉무국의 관직명을 외듯이 신선들의 계급을 읊조렸다.

“현선 다음에 진선, 마지막이 천선이죠? 서책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우희는 그저 눈을 깜빡였다.

“사부님에 이어 대사형까지. 본왕이 미처 만나 뵙지 못한 분들이 많네요.”

이겸은 우희가 왕비궁 뒤뜰에서 자면서 웅얼거린 말까지 끄집어냈다. 이쯤 되니 천하의 하우희 등줄기가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평북 심가는 하늘이 무너져도 여아에게 검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아뿐인가요. 지난 20년 동안 무술 선생이 심가의 대문을 넘은 적이 없죠.”

왜 진이겸을 한없이 무른 남자라고 착각했을까. 마음의 벽이 한번 허물어지면 눈 가리고 귀 막고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사람이라고 여겼을까. 우희는 제 발등을 찍은 기분이었다.

깐깐한 장륜언이 왜 단왕을 철두철미함의 표상이라고 추어올렸겠어?

이게 우희가 깜빡한 이겸의 실체였다. 그는 본시 상대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뒷조사를 확실하게 하는 이였다. 이겸의 그런 일처리 덕분에 단왕 세력은 오래도록 굳건히 유지되어 왔다.

여태 단왕비만이 예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젠 단왕비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희의 표정은 일견 아무렇지 않아 보이나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진이겸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도력을 써서 강제로 기억을 지워야 되나?’

신선들은 원래 인간과 깊이 엮이지 않았다. 게다가 인간의 생은 짧았다. 뭔가 문제가 터져도 어딘가로 피해 있다가 돌아오면 백 년은 금방이었다. 문젯거리였던 인간은 오래전에 죽고 없었다.

굳이 해결하기보다는 흘려보내는 것이 신선들의 방식이었다. 우희 역시 신선이었기에 이런 방식에 익숙했다.

‘근데 이번은 아니야. 어떻게든 해결해야 돼.’

왜 진이겸만 얽히면 모든 것이 예외가 되는 걸까. 우희는 기억 지우는 술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던가 곰곰이 되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가르친 듯했다. 하긴 신선들 사이에서도 별로 인기가 없는 도술이었다.

이겸이 불현듯 우희 뒤에 숨어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극락정에 머무는 동안 소천은 화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우희의 본체에 들어가 있는데도 사고 전의 소천을 떠올리게 했다. 티 없이 순하고 맑아 보였다.

“심소천.”

정확히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부름에 소천이 숨을 멈췄다. 차마 이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가늘게 떨었다. 이로써 우희의 고민은 중단되었다.

“얘가 도대체 왜 그렇게 전하를 무서워하나 했네. 말투 안 바꾸세요? 여기가 무슨 재판정이에요?”

하지만 이겸은 우희의 말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본왕의 말투가 이상했습니까?”

“어어? 이거 봐. 저한테 말하실 때랑은 완전히 다르잖아요.”

“어떻게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우희가 턱짓으로 소천을 가리켰다. 하려던 말을 마저 해 보라고 했다. 이겸이 다시 소천을 쳐다봤다.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왕비.”

“저, 전하를 뵈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소상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희와 맞잡고 있는 소천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사람이 이토록 가련하게 떨고 있는데도 이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진이겸의 얼굴은 이렇구나. 우희는 상대의 새로운 면을 보았다.

“저번 기회에 돌아오시지 않은 연유는 무엇인지요?”

“그것은…….”

“여기 있는 사람들 말고 이 사실을 아는 자가 또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아마, 는 확답이 아닌데요.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군요.”

한눈에도 겁먹은 부인한테 잘하는 짓이다. 우희가 끼어들었다.

“제가 전쟁터까지 전하를 따라가 본 적은 없지만요. 첩자를 추궁할 때 어떤 식으로 압박하시는지는 좀 알겠어요.”

이겸의 눈썹 사이에 얕은 골이 패었다.

“첩자를 심문할 때는 훨씬 가혹합니다만.”

“예를 든 거예요.”

“지금은 그저 설명을 요구한 거잖습니까.”

우희와 이겸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희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진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혹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계신 건가요? 저랑 소천이를 대하는 태도가 아주 다르다는 사실요.”

우희가 갑자기 제자들에게 물었다.

“나만 다르게 느끼는 것이냐?”

10제자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우희는 소천에게 질문의 방향을 돌렸다.

“내 착각이니?”

소천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짧고 빠르게 흔들었다.

“선자님을 대할 때의 전하께선…… 입가가 느슨하십니다.”

“역시 세심한 우리 소천이.”

“전 그조차 여전히 어렵고 두려운데 선자님은 아무렇지 않으신 것 같고요.”

바로 이전에 소천을 칭찬했던 우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에 대한 소감까지 따라올 줄 몰랐던 까닭이다. 이겸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밀어 올렸다.

와, 방금 그 미소 되게 얄미웠어.

“올해 초봄의 사고 때문이에요. 그날 다리를 지나는데 어디선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왜 제 귀에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어요. 강 아래로 떨어지는 소천이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뛰어내렸죠. 저의 본체는, 그러니까 이 몸은.”

우희가 소천을 가리켰다.

“협곡 사이도 날아다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일도 아니었죠. 한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더는 힘을 쓸 수가 없었고 그대로 추락했어요. 눈을 떠 보니 육신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하고 우희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선 이 모든 것을 듣고도 괜찮아 보이시네요.”

“제가 허황된 것을 믿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직접 겪은 바까지 부정하는 자는 아닙니다.”

이겸이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우희. 이게 그대의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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