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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51화 (51/100)

51화. 저를 좋아하십니까?

뒤뜰의 정자에 다다르자 소천이 어째서 대답하지 않았는지가 밝혀졌다. 이겸은 시원한 돌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는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늦은 오후에 이렇게 단잠을 자 버리면 정작 자야 할 때 눈이 말똥말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왕비를 깨우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겸은 곤히 자는 왕비의 옆에 앉았다. 언제나 곧은 단왕의 몸이 기울었다. 소천처럼 탁자 위로 상체를 엎드리자 기분 좋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왜 여기에 엎드려 잠들었는지 알겠군.’

엎드린 자세가 낯설면서도 편했다. 이런 자세로 있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더라. 이겸이 기억하기로 여덟 살 이후로는 한 번도 없었던 듯했다.

그때 잘 자던 소천이 미간을 찡그렸다. 붉은 입술 사이로 웅얼대는 말이 흘러나왔다.

“사부님…….”

소천이 중얼거렸다.

“망했어요…….”

이겸은 불분명한 발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더욱 곤두세웠다.

“완전히…… 망했어.”

그게 끝이었다. 소천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겸은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 같은 잠꼬대에 조금 멍해졌다.

사부님? 소천에게 사부라고 부를 만한 자가 있었나?

제일 먼저 생각이 미친 곳은 역시 검 수련이었다. 소천의 실력은 절대 독학으로 이룰 수 없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랬다. 그냥 평범한 꿈일 뿐인데 진이겸이 또 혼자서 어두운 생각을 거듭하는 게 아닌지.

“왕비, 언제까지 주무시려고요.”

조용히 말을 건넸으나 소천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겸은 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소천.”

“으응.”

“이 자세가 편하긴 한데 오래 있으면 다리가 저릴 겁니다.”

“응…….”

잠결에 대꾸하는 게 귀여웠다. 이겸은 발그레한 뺨에 입을 맞출까 고민했다. 무척 혹하는 생각이었으나 이내 그만둔 이유는 뺨에서 그만둘 자신이 없어서였다. 대신 이겸은 도톰한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딱 성가실 정도로 간지러웠는지 소천이 손을 빼서 날벌레를 쫓듯 휘둘렀다.

휘두르는 손을 부드럽게 잡았더니 소천이 눈을 떴다. 오른쪽 뺨에 동그랗게 눌린 자국이 이겸의 입가를 더욱 늘어지게 만들었다.

“……전하께서 왜 여기 있어요?”

소천이 아직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전하 얼굴 안 볼 건데.”

“그렇군요.”

“안 볼 거라고요.”

“그럼 눈을 감으시는 게 좋겠네요.”

이게 무슨 헛소린가 싶었는지 소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 이겸에게 잡혀 있는 손을 인지한 건 그다음이었다. 소천이 손을 홱 뺐다.

“왕비께서 화나신 이유를 알았습니다.”

소천이 남편을 등지고 앉았다.

“한데 본왕이 영 자신이 없어서요.”

이겸은 제 목소리가 너무 형편없이 들리지 않길 바랐다.

“혹시 왕비께선 본왕을…… 좋아하십니까? 자꾸 거리를 두려다가도 걱정 가득한 눈으로 보시는 이유가 그 때문입니까? 의심스러운 점이 산더미인데도 왕비의 검에 목을 내놓는 본왕이 답답하십니까? 그래서 화나신 건지요.”

이겸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소천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잠기운이 깨끗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원래는 그만 말하라고 쏘아붙이려 했을 것이다. 이겸을 노려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천은 너무 일찍 돌아보고 말았다. 파편처럼 흩어진 감정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채, 날것 그대로의 얼굴을 보여 버렸다.

그래서 이겸은 볼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과 분함과 혼란스러움이 가득한 얼굴을 보았고, 그것은 백 마디의 말을 대신하고도 남았다.

소천의 얼굴은 노을처럼 붉어져 있었다.

“누가 좋아한다고…….”

본인이 내뱉은 말에 본인이 충격받는 까닭은 대체 무엇이며,

“그런 이유가 아니거든요!”

한발 늦게 높인 왕비의 언성에 진이겸의 마음이 와르르 녹아내리는 연유가 무엇인지.

이겸은 이제 알게 되었다.

알고 나니 더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소천.”

“저리 가요. 제가 전하 얼굴 보기 싫다고 했죠? 아니, 제가 갈게요.”

“소천, 잠깐만요.”

“이름 좀 그만……!”

소천이 끝내 화를 왈칵 냈다. 자신을 잡는 이겸의 팔을 뿌리치더니 갑자기 분한 듯 이겸의 가슴팍을 세게 때렸다.

누군가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이었던가. 이겸은 두 번째로 날아드는 주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웃지 마세요.”

“그러죠.”

“거짓말. 그래 놓고 또 웃잖아. 바보예요? 맞아 놓고 웃게?”

소천은 여전히 화가 안 풀렸는지 세 번째로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이겸은 날벌레 쫓는 손을 낚아챘을 때처럼 날아드는 주먹을 가만히 잡았다.

“아무래도 세 번까지는 아플 것 같습니다.”

그대로 등을 끌어당겨 안았다. 소천이 벗어나려는 듯 품에서 몸부림쳤다. 이겸은 그녀를 더더욱 힘주어 안은 뒤 말했다.

“여기서 제 심정을 밝히면 눈치가 없는 거겠죠. 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군요. 왕비, 그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테니 제발 그 마음을 거두지 마세요.”

아까와 달리 포옹을 풀지 않을 것임을 깨닫자 소천이 몸부림을 멈췄다. 이겸은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그냥 거기 두십시오, 제발…….”

“전하께선 제가 본 인간 중에 제일 어처구니없는 바보예요.”

소천이 웅얼거렸다.

“세상 사람들이 죄다 전하의 눈에 들려고 애쓰는데 왜 이상한 곳에 꽂히신 거예요.”

“감히 누가 단왕비를 이상한 곳이라 일컫는단 말입니까.”

이겸이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단왕이고 그대는 제 왕비입니다. 남편에게 아내의 마음을 얻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답니다.”

소천이 구시렁거렸다. 이겸의 욕을 한 것 같았다. 이로써 진이겸은 더없이 행복해졌다.

* * *

“함정인 것 같아.”

우희는 결국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에 이르렀다.

“혹시 진이겸 저거 가죽 벗겨 보면 인간이 아닌 거 아냐?”

말하고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색선 하우희에게 원한을 품은 놈이 낯가죽 반반한 인간을 매수한 거야. 아니면 직접 저 몸에 들어갔거나. 혹은 이럴 수도 있지. 진이겸이 태어나기 전에 뭔가 꼼수를 써서 올봄부터 심소천과 지독한 애염에 빠지게!”

우희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나 순간 해결된 듯이 보이던 명쾌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희는 책상 위로 힘없이 엎어졌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어찌 이래.”

정자에서의 일 이후로 이겸은 원래 다정하던 사람이 한없이 녹아 버려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그를 마주 볼 때마다 우희는 속이 쓰렸다.

제발 그렇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듯이 굴지 말라고 빌고 싶었다. 신선을 미안해 죽게 한 최초의 인간이 되고 싶은 거라면 진이겸은 아주 잘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우희를 괴롭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극락정에서 왜 아직 소식이 없지? 날 부를 때가 됐는데.”

정확히 말하면 우희가 통보한 열흘의 여유에서 이틀이 지났다. 우희로서는 별별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내가 애들을 너무 윽박질렀나? 하긴 소천이랑 난 첫 만남이나 다를 바 없는데 불같이 화내는 모습을 보이긴 했어. 아…… 그래서인가? 그것 때문에 연락이 늦어지나? 하지만 제자들이랑 맹아가 잘 달래 줄 텐데.”

진이겸의 일 때문이든 뭐든 일단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야 될 것이 아닌가. 영원히 이렇게 남의 몸에 들어와 있는 채로 살 순 없었다.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만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혹시 소천이가 몸을 바꾸기 싫어하면 어떡하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선계와 인연이 있는 인간이 평생을 수련해도 결국 신선이 되는 자는 몇 안 되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한 번의 사고로 1만 년의 공력을 지닌 불사의 신선이 될 수 있다면? 거기다 주위 환경마저 인간계에 있을 때보다 훨씬 좋다면?

“아니야. 잠깐 봤지만 소천이는 속이 깊은 아이고, 제자들과 맹아도 내가 그리 가르치지 않았어.”

차라리 애들이 선계의 시간관념대로 행동하고 있어서 자꾸 늦어진다는 쪽이 설득력 있어 보였다.

남는 게 시간이다 보니 고민만 하는데도 며칠이 훌쩍 지나곤 하는 곳이 선계였다. 사시사철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아름답기만 한 곳에 머물면 말 그대로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소천은 인간이지만 지금 머무는 장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중일 터다. 제자들이나 맹아야 원래 유유자적한 선인이고.

“그 말인즉…… 내가 빠릿빠릿하게 안 움직이면 걔들이 사부님께 또 혼날까 봐 머뭇대는 동안 10년이 지날 수도 있단 뜻이지.”

우희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극락정 아이들을 탓할 때가 아니었다. 우희 자신조차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까닭이다.

“우희야, 우희야. 넌 지금 도술을 부릴 수도 없는 인간 몸에 들어가 있다고. 한데 여전히 신선처럼 생각하면 어쩌자는 것이야.”

갑자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어졌다. 지금이야 이틀 늦은 것이지만, 오늘의 이틀이 20년으로 늘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우희는 즉시 짧은 편지를 썼다. 극락정으로 한 통, 만약을 대비하여 대사형 태율이 사는 사향원으로 한 통. 그런 다음 전서구(傳書鳩)가 쉬는 안뜰로 이동했다.

단왕부는 빠른 연락을 위해 왕부 내에 훈련된 비둘기를 키우고 있었다. 비둘기마다 도착지가 달랐다. 우희는 두 마리를 빼내어 돌돌 만 편지를 발목에 매달았다.

“도술을 쓸 수 있다면 너희를 수고시킬 필요도 없겠지. 그거 하나가 아쉽고 미안하구나.”

머리를 쓰다듬자 두 비둘기가 동시에 목을 울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도력은 없어도 색선으로서의 매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푸드덕!

이윽고 비둘기들이 우희의 손을 떠났다. 비둘기가 각자 연락소에 도착하면 그곳 사람은 단왕비의 지시대로 심부름꾼을 파견할 것이다. 우희는 비둘기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하늘을 쳐다보며 배웅하였다.

* * *

구구구, 꾸룩, 구구구.

이겸은 집무실 창가로 날아든 비둘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발목에 편지를 단 비둘기 두 마리가 주인의 관심을 요구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발목의 매듭을 풀었다. 돌돌 만 편지 끝에 찍힌 단왕비의 도장이 이겸의 눈에 들어왔다.

‘나나 륜언이 날리지 않은 전서구는 무조건 내 처소로 돌아오는 것을 잊으셨군.’

이에 대해 소천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급히 연락해야 할 때 그녀 또한 단왕비로서 왕부의 비둘기를 이용할 수 있다고 설명해 줬다.

그러나 소천은 이제껏 한 번도 비둘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긴급한 연락을 나눌 상대도 없거니와 남편이나 책사를 통해야 하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터였다. 이겸의 생각은 그랬다.

이 모든 게 사고 전에 일어난 일이라 잊었을까.

‘시간이 좀 지나긴 했지만.’

이겸은 내용상 거의 흡사한 편지 두 장을 내려다보았다. 심부름꾼의 등에 붉은 민무늬 깃발을 꽂은 다음 관산과 운산 입구에 서 있게 하란 명이었다. 누군가 내려와 심부름꾼에게 말을 걸면 이 편지를 보여 주라고 했다.

딱 마지막 문장이 달랐다.

소천은 관산으로 보내는 편지 끝에 ‘단왕부 방문 요망.’, 운산으로 보내는 편지엔 ‘극락정 방문 요망.’이라고 써 놓았다.

이겸의 시선이 책상 위로 옮겨 갔다. 마침 각지의 비밀 소식통이 단왕에게 올린 보고를 읽고 있었다.

관산의 극락정에 대한 정보라면 무엇이든 좋으니 모조리 긁어모으라는 명령에 소식통은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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