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50화 (50/100)

50화. 그대는 무엇을 피하려고

단왕, 단왕.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겸은 찻잔을 든 채 이것이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생각했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겸.”

불현듯 또렷이 들리는 부름에 이겸은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황후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제야 현실파악이 되었다. 이겸은 조회가 끝나고 안부인사차 황후궁에 들렀다.

원래는 혈육이어도 남자 일원은 사사로운 후궁 출입이 금지되나, 이겸만은 이런 규율에서 자유로웠다. 그는 수시로 황후궁에 들렀고, 황후도 이겸을 종종 불렀다. 어떤 달엔 남편인 황제보다 그의 동생을 자주 보기도 했다.

금 귀비의 친부를 위시한 세력이 이를 두고 몇 번이나 탄박했지만, 귀비의 온갖 청을 들어주는 황제도 여기엔 묵묵부답으로 임했다.

이겸은 이유를 알았다. 황후도 알고 있었다.

겨울바람을 닮은 황후는 좀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뿐인 혈육의 목숨은 직접 거뒀고, 황궁에서는 높은 담 밖에서와 마찬가지로 벗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황후가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가 바로 어릴 적부터 봐 온 이겸이었다.

황제는 두려운 것이다. 황후는 이미 자신에게 냉랭해진 지 오래인데 이겸마저 못 만나게 하면 당장 제 곁을 떠날까 봐 두려운 거다. 흔히 천하가 황제의 발아래 있다고 하나 그 또한 봉무국에 한정된 말일 뿐.

황후는 비절영의 수장이었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바람에 날리는 이파리처럼 흩어진 다음, 그들을 아는 모든 이가 죽을 때까지 자취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비절영의 뒤를 쫓는 건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이겸은 어긋난 두 연인을 잇는 가느다란 실낱이었다. 다만 이겸은 가끔 궁금했다. 황후는 단왕 자신을 볼 때 어떤 느낌일지.

황제와 이겸은 언뜻 보기엔 분위기가 많이 달라도 결국엔 형제임을 부인할 수 없는 외모였다. 황후의 말에 따르면 특히 근심에 잠겨 시선을 아래로 내릴 때 형제가 ‘소름 끼치게’ 닮았다고 했다.

괴롭지 않을까? 싫지는 않을까? 아니면 애증의 대상을 닮은 동생 쪽의 예의 바르고 가지런한 모습에서 작은 위안을 얻으시나?

이겸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거기까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물었다고 해도 황후가 답을 주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겸은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딴생각을 해서 죄송하다고 솔직히 사과했다.

“하여튼 너희 형제는 이상해. 뺨은 동쪽에서 맞아 놓고 왜 애먼 서쪽에 가서 울까?”

황후는 오직 이겸 형제 앞에서만 말을 가리지 않았다. 표창처럼 날아드는 지적에 이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형제가 쌍쌍이 우둔하여 옆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군요.”

“어디 우둔하다 뿐이냐. 우둔하지 않을 때조차 우둔한 척하며 상황을 저 좋을 대로 끌고 가는 건 어떻고. 사실을 직시하는 게 그리 두려워서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려는지.”

여기까지 말한 황후가 짧게 웃었다. 방금 본인이 한 말에 실소하는 투로 말을 이었다.

“한 명은 황제고 한 명은 왕인데 본궁이 헛소릴 했구나.”

황후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잘 살겠지.”

“왜 화를 냈을까요. 소천이 그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감히 닫힌 문을 두드릴 엄두가 안 났어요.”

이겸은 지난밤의 소천을 떠올렸다. 화가 치민 나머지 상대랑 말 한 마디도 섞기 싫은 표정이 소천의 얼굴을 스친 순간 이겸은 온몸이 굳었다.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뒤뜰에서의 일을 곱씹었다.

뭘 잘못했을까. 어떻게 해야 소천의 화가 풀릴까.

너무 답답했던 이겸은 호위무사 현에게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네 생각엔 왕비께서 왜 화를 낸 것 같으냐는 물음에 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 그게 어젯밤의 일이면 오늘 아침엔 조회 참석 준비 때문에 여유가 없었을 테고.”

황후가 이겸에게 고개를 돌렸다.

“왕비에겐 이따 저녁에 물어볼 생각인가?”

“저녁엔…… 화를 풀어 주고 있어야 합니다만.”

“좋은 생각이구나. 한데 이유도 모르는 화를 어떻게 풀어 주려고?”

이겸과 황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숨 몇 번 들이쉬고 내쉴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물을 생각이 없구나.”

“저는.”

“왕비의 미움을 살까 무서우냐?”

황후는 늘 그랬듯이 정곡을 찔렀다. 이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화나게 만들었잖습니까. 한데 그 상대가 왜 화가 났는지 알려 달라며 채근하면 더 화가 나지 않을까요? 제가 마마께 말씀드렸나 모르겠는데, 소천은 지금껏 한 번도 그리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황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너와 살면서 한 번도 화내지 않을 수가 있지. 사고 전엔 영 생기가 없었다고 쳐도, 사고 후엔 딴사람처럼 활발하던데.”

“……제가 사람을 화나게 합니까?”

뜻밖의 지적에 이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말투는 단호했다.

“화나게 하지. 네 형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에 대해 좀 더 물으려는 순간 황후가 갑자기 질린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이겸, ‘제가 말씀드렸나 모르겠는데.’라고 했느냐? 넌 올봄부터 왕비 이야기를 조금씩 하기 시작해서, 언젠가부터 왕비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다. 정세를 논하다가도 왕비를 떠올렸어. 나중엔 본궁까지 혼자 있을 때 단왕비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거든.”

이겸이 할 말을 찾는 동안 황후는 속에 쌓인 질문을 던졌다.

“넌 심소천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야…….”

“아니, 사람으로 여기고 있긴 한 건가?”

왜 하필 지금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으나 ‘색선’을 운운하던 소천이 떠올랐다. ‘양기’를 열심히 먹은 다음에 제자들이 기다리는 ‘극락정’으로 가는 소천의 뒷모습은 대체 어디서 기인한 장면일까. 끔찍한 악몽 속에서 화염을 향해 걸어가던 뒷모습과 겹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이겸은 본의 아니게 침묵을 지켰다.

“넌 왕비에게 푹 빠졌지. 다치지 않게 지켜 주고픈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왕비도 생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네 행태는 상자 속의 나비를 대하듯 하잖느냐. 왕비가 검을 다루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며. 그럼 넌 그에 관해 궁금하지 않으냐? 언제부터 배웠는지, 어떻게 깨우쳤는지.”

황후가 말을 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의혹이 숱한데도 너처럼 총명한 자가 묻지 않는다면 화가 날 수밖에. 그런 주제에 본인 목숨은 허술하게 다루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지.”

모든 문장이 귀에 따갑게 꽂히는 가운데 황후의 마지막 말이 이겸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 주고픈 마음이 그이인들 없을까?”

* * *

귀가하자마자 이겸이 꺼낸 첫 마디는 단왕비의 안부였다. 단왕비가 오전 내내 건녕각에 있다가 늦은 점심을 먹으러 왕비궁으로 갔다는 보고를 듣자 가슴이 술렁였다.

대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아 어둡고 서늘한 건녕각은 이겸조차 들르지 않은지 좀 됐다. 저번에 소천과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한데 그곳을 소천 혼자 갔다니.

건녕각엔 소천이 좋아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풍경마저 쓸쓸했다. 창을 활짝 열어 봤자 보이는 것이라곤 오래도록 다듬지 않아 무성히 우거진 수풀뿐이었다.

애초에 거긴 무언가를 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숨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므로.

자신은 그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던가. 어떤 마음들을 꾸역꾸역 삼켰던가. 이겸은 그걸 알고 있기에, 소천이 스스로 건녕각에 갔다는 사실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그대는 무엇을 피하려고 거기에 갔지?’

황후는 소천이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낸 거라고 말했다. 이에 자신이 보인 첫 반응은 부정이었다.

「다른 거라면 몰라도 그 이유만은 아닐 겁니다. 소천은 저를 그렇게까지는―.」

가시를 삼키듯이 괴로운 이야기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소천이 절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나 마마의 말씀처럼 그리 깊은 마음은 아닙니다.』

「세상 겸손한 얼굴로 오만한 말을 하는 건 여전하구나.」

황후는 색을 곱게 들인 생과자를 집으며 말했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있느냐?」

「소천은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사람 같습니다.」

「마치 본궁처럼 말이지.」

「어떤 면에서는요.」

「본궁은 지금도 필요하면 황궁 담을 넘곤 한다. 선황이 살아 계실 적이라고 달랐던가. 태자비에 책봉된 이후로도 수시로 나갔어. 하지만 매번 돌아왔지. 말해 보렴, 이겸. 내가 돌아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겸은 황후의 의도를 파악했다. 자신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게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머릿속으로는 마마와 소천은 다른 경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겸은 나직이 답했다.

「폐하께서 여기 계시니까요.」

「다시.」

「……오은은 진이락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까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벌벌 떠는 건 네 정원의 돌한테나 하라고, 사람에겐 그러지 말라는 황후의 말이 아른거렸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왕비궁이었다. 평소 소천의 곁에서 자주 보이는 시녀가 젊은 호위병과 대화 중이었다. 아마 매화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담 위에 올라가서 살짝 보고 내려오면 되지. 마마께서 출입 금지라고 하신 건 뒤뜰이니까, 바꿔 말하면 뒤뜰에만 발을 안 들이면 문제없다고.”

“그렇게 너 편할 대로 해석해도 되면 명령이란 게 왜 있겠냐?”

상아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매화였다. 구슬림이 먹혀들지 않자 대번에 눈을 매섭게 뜨더니 호위병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너무 불시의 공격이었던 탓에 호위병은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 남은 건 얼얼한 정강이를 움켜쥔 채 비명을 삼키는 일뿐이었다.

“이 뱁새가 어디서 훈계야!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난…… 엄연한 이름이…….”

“마마께서 뱁새라고 부르셨으면 뱁새지. 지금 네 이름이 중요해? 내가 담 너머로 보려면 창고에서 커다란 사다리를 꺼내 오는 일부터 시작해야 된단 말이야. 얼마나 귀가 밝으신데. 금방 알아채실 거라고.”

매화는 왕부의 밥을 오래 먹은 시녀답게 조용한 목소리로 맹렬히 화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몸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호위병에게 마구 쏘아 대던 시녀는 이겸을 뒤늦게 발견한 뒤 화들짝 예를 갖추었다.

“왕비께선 어디 계시느냐?”

“예, 전하께 아룁니다. 마마께오선 아까 전부터 뒤뜰에 계십니다.”

“출입 금지 명을 내리셨고?”

“그러하옵니다.”

명을 어기는 것과 주인에 대한 걱정은 별개다. 호위병까지 한 묶음으로 벌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겸은 그대로 자리를 뜨는 쪽을 택했다. 시녀의 배짱과 야무짐이 마음에 들었다.

“왕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젯밤과 같은 허락을, 같은 장소에서 구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득 소천이 처음 건녕각을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이겸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그녀가 했던 말을 빌려 왔다.

“그럼 전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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