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49화 (49/100)

49화. 대책 없는 믿음

문제는 현의 중얼거림을 우희만 들은 게 아니란 점이었다. 밤의 뒤뜰은 몹시 조용했고, 작은 소리도 바로 옆에서 한 말처럼 들렸다. 이겸이 호위무사에게 방금 한 말의 뜻을 물었다.

우희는 고요한 얼굴을 향해 엄청난 눈빛을 쏘아 보냈다. 최대한의 압박을 담아 쳐다보자 현이 의아한 시선을 되돌렸다. 왜 말하면 안 되냐는 의문이었다.

우희의 미소가 더욱 화사해졌다.

왜 말하면 안 되는지 궁금하니? 내 실력은 절대 독학으로 이룰 수 없는 경지기 때문이지. 방금 네 주인이 한 말을 너도 들었잖아. 도가 수련이랑 검법 수련은 아예 영역이 다르단 말이야.

너희 눈엔 색이나 양기나 내공이 하나도 안 보이고 안 느껴지잖니. 그러니까 네 주인 귀엔 왕비가 열심히 수련해서 색선이 되겠다고 하는 말도 마냥 귀여운 포부로만 들리는 거라고.

하지만 검은 어떠냐? 검은 완전히 달라요. 20년 동안 바깥출입을 삼가던 규중규수가 갑자기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심지어 독학을 했다면 검을 쥐는 법부터 틀리기 마련이거늘.

우희가 눈에 힘을 더 주었다.

우희의 본체는 이겸, 세준, 현이 동시에 덤빈다고 해도 눈 감고 이기는 수준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7백 명의 정예병에 이겸이 이끄는 15만 철기병이 떼로 달려들어도 홀로 잠을 자지 않고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물론 지겨우면 훌쩍 어디론가 날아가 눈을 붙이고 차 한 잔 마신 뒤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다. 뭔들 가능하지 않을까? 하우희는 불사의 신선인데.

당연하지만 소천의 몸으로는 아직 그 정도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 15만 7백 명과 동시에 싸울 능력은 안 되고, 이겸과 세준과 현을 한꺼번에 상대할 순 없었다.

그래도 세준과 일대일로 붙어서 쉽게 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세준은 불세출의 무장이니 현재 우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터다.

‘그나저나 우리 곽 호위는 내가 어쩌다 이런 실력을 갖게 됐는지 안 궁금한가?’

우희는 현의 독특함을 새삼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왕비의 수련을 목격했다면 당장 단왕에게 고했을 것이다. 상아, 매화, 뱁새라면 외부에 발설은 안 하겠으나 우희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묻긴 했을 거다.

한데 현은 왕비의 최측근도 아니면서 그간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실력자가 됐는지도 썩 궁금하지 않은 눈치였다.

‘하여간 특이해.’

사고 구조가 남다른 듯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왜 단왕에게 이유를 말하면 안 되냐고 한다. 우희는 속으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곽 호위의 뜻은 공사다망한 전하께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 절 가르치시긴 힘들 거란 뜻이 아닐까요. 완전히 기초부터 새로 잡아 주셔야 할 테니까요.”

우희가 생긋 웃으며 이겸의 팔짱을 꼈다. 그 상태로 고개만 돌려 뒤쪽의 현을 쳐다봤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말을 전달했다. 입 다물어, 라고. 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그때부터 계속 우희만 응시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얼른 씻고 올게요.”

“그 검은…… 위 장군이 구해다 준 건가요?”

부드럽게 묻는 이겸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우희는 이제 이겸의 다정함을 구분할 수 있었다. 불안함이 깔린 다정함은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절박함이 깃든 다정함은 어쩐지 눈빛이 서글프다. 애정을 담아낸 다정함은 그야말로 얼굴에서 꿀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맹렬한 질투심과 그런 자신에 대한 싫음이 뒤엉킬 때 이겸은 바로 지금 같은 태도를 취했다. 어조도 부드럽고 표정도 다정한데 왠지 모르게 우희의 뒷골이 싸하게 된다 할까.

‘진이겸 그대의 고통이 이해는 가. 왕비는 양기에 정신이 팔렸고, 단왕부는 알고 보니 양기의 명가였지. 마냥 믿음직했던 수하들과 경쟁하는 날이 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뭐, 정예병 복장 단속시켰을 때부터 좀 눈치채긴 했어.’

그는 이미 세준이 검을 구해다 줬음을 알고 있었다.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있을까. 우희는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겸은 잠깐 자기가 검을 살펴봐도 되냐고 물었다.

“과연 위 장군의 안목은 탁월하군요. 황도에서 이만한 운철검을 구하기란 쉽지 않죠.”

“그래서 고맙다고 두 번이나 말했어요.”

웃으면서 손등을 토닥인 것까진 말하지 말자.

“하지만 본왕에게 말씀하셨다면 봉무국 전체를 통틀어서 훌륭하다고 손꼽히는 검을 드렸을 텐데요.”

“그 정도면 국보급 아닌가…….”

“실제로 선황께서 하사하신 검이긴 합니다.”

우희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런 흐름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니, 이제는 정말 익숙하고도 남아야 하지 않나. 이겸은 선황이 가장 총애했던 황자이자 현재 봉무국의 2인자였다. 그가 가진 것은 무조건 천하제일 수준이라 보면 됐다.

‘그래도 국보이자 가보를 막 초심자에게 주고 그러면.’

우희는 지극히 상식적인 의문의 고리를 끊었다.

‘하나도 안 아깝겠지. 오히려 내가 사양하는 게 섭섭할 거야. 저거 봐. 운철검 내려다보는 눈빛이 묘하게 섬뜩하잖아. 나 몰래 눈빛으로 부러뜨릴 수 있다면 벌써 그러고도 남았을걸.’

우희는 이겸의 손에서 검을 거둬 갔다.

하여튼 왕부에서 제일 얌전한 줄 알았던 남자가 실은 욕정과 질투의 화신이었다니. 평소의 색선 하우희라면 좋아 죽었을 테지만 현재의 우희로선 골이 띵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랄까.

“제 실력엔 이걸로도 차고 넘쳐요. 보검은 마음으로만 받아 둘게요. 그렇게 귀한 검은 자칫 망가뜨릴까 봐 걱정된다고요.”

우희의 말에 이겸이 갑자기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하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가 소리 내어 말한 것은 다른 내용이었다.

“왕비의 실력은 어느 정도십니까?”

“네?”

이겸의 팔짱을 낀 채 자연스레 뒤뜰에서 나갈 계획이었다. 오늘은 온 김에 왕비궁에서 자고 가라고 하자. 현이 침소까지 따라오지는 않을 테니 주종을 이쯤에서 갈라놓는 것도 좋을 터.

대강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겸이 다짜고짜 우희의 실력을 묻는 게 아닌가.

“정말 궁금하세요? 전 아무래도 보여 드리기 좀 그런데…….”

단왕비와 난처함이라니.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래도 이겸은 왕비가 싫어하는 일을 절대 강요하지 않으므로 우희는 열심히 곤란한 척 연기를 했다.

“본왕이 웃을까 봐 그러십니까?”

근데 요 인간 남자가 살살 심기를 건드리네.

“본왕은 검을 다룰 때 절대 웃지 않습니다. 비록 그게 처음 검을 잡는 아이를 가르칠 때여도요.”

도발에 홀랑 넘어가지 마라, 우희야. 평정을 유지하자.

우희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이겸과 너무 오래 붙어 있었나 보다. 진이겸은 이제 하우희 손바닥 위라고 여겼건만, 그게 반대로도 작용할 줄은 몰랐다.

“제 실력에 관해선 곽 호위에게 못 들으셨나 봐요.”

우희가 애써 웃는 낯으로 앞뒤의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감시하고 일러바치면서 돈독한 한 쌍 아니었어? 그런 은은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물론 양쪽 다 들으라고 한 말이 맞았다.

“전하, 제게도 저만의 비밀로 남겨 두고 싶은 부분이 있답니다.”

이놈의 왕부는 무슨 황궁처럼 넓어서 이제 겨우 등나무 회랑에 이르렀다. 그래도 이만하면 잘 대처 중이라고, 우희는 스스로를 북돋웠다.

“왕비께서도 짐작하실 테지만 곽 호위는 워낙 말수가 적어서요. 본왕이 굳이 묻지 않으면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답니다.”

그럴 것 같더라. 우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응수했다.

“한데 정말 자신이 없어서 그러시는 거라면 이 이상 밀어붙이지 않겠습니다.”

거기까지.

우희의 몸이 이성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이겸의 팔짱을 나긋이 꼈던 팔은 순식간에 상대가 도망치지 못하게 옥죄는 역할로 바뀌었다. 왼팔이 이겸을 붙드는 동안 오른손의 검은 정확히 이겸의 목덜미를 노리고 날아갔다.

단왕의 드러난 목덜미 앞에서 금속성이 튀었다. 새하얀 달빛이 두 자루의 검을 비추었다.

세 걸음 뒤에서 이겸을 따라오던 현이 어느새 검을 빼어 우희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우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현의 검을 비껴서 목표물의 목을 그을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후였다.

어디 목을 긋다 뿐인가. 허공에 튀는 목표물의 피가 바닥에 뿌려지기도 전에 그대로 동작을 이어 호위의 허리를 벨 방법도 알았다.

중요한 건, 우희가 거기까지 파악한 사실을 다른 두 사람도 알아차렸다는 점이었다. 검 앞에서 태연한 이겸의 목이 우희의 눈에 박혔다.

‘뭐야, 진짜.’

아까 왕비가 직접 검을 잡는 것에 대해 그가 보인 자책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순간 이겸은 정말 미안해했다. 아마 지금도 계속 미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겸 이 사내는 자책감과는 별개로 왕비의 검 실력을 알고자 자신의 목을 내놨다. 우희의 공격에 방어할 수 있었을 텐데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우희의 검이 본인을 해치지 않을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작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거였다.

‘미쳤어. 대체 내 어디를 믿고 이러는 거야? 당신은 인간이야. 제아무리 백전불패의 무장이라도 죽음까지 피할 순 없어. 독을 바른 날붙이가 당신 배를 쑤시면 그걸 쥔 게 어린애의 손이어도 당신은 바로 죽는다고. 내가 실수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우희는 부아가 치밀었다. 재차 도발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짜증에, 그리고 자신을 향한 이겸의 대책 없는 믿음에 화가 났다.

또한 스스로가 끔찍한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양기만 먹고 튀어야지. 오늘부터 건드리지 말아야지. 검에 서툰 척해야지. 결심하는 족족 손바닥 뒤집듯이 엎고 마는 행태가 바보가 아니면 뭐냔 말이다.

“오늘은 혼자 잘래요.”

우희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내뱉는 듯한 말투에 이겸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걱정 끼쳐 드린 점은 다시 한 번 사과드려요. 이제 전하께서도 제 수련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이후 같은 이유로 출발이 늦어지면 말씀드릴게요.”

입으로는 사과한다는 사람이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우희는 팔짱을 풀고 이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돌아가실 땐 따로 배웅 안 해도 되겠죠. 그럼 전 물러갑니다.”

“왕비.”

“안녕히 주무세요.”

우희는 고개를 숙이는 둥 마는 둥 인사하고는 회랑을 빠져나갔다. 방금 전만 해도 팔에 매달려 생글거리던 왕비였다. 그랬던 왕비가 검 실력이 궁금하다는 도발에 다짜고짜 목을 겨누더니 이젠 말도 못 붙이게 화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검은 대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배웠느냐. 상식적으로는 이겸이 의심을 품고 추궁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건만.

“왕비, 잠깐만.”

진이겸은 끝까지 저자세였다. 팔을 잡아 돌려세우기는커녕 우희의 앞을 막아서지도 않는 태도에 화가 더 치밀었다.

“소천.”

호위병 수십 명이 지키는 왕비는 금이야 옥이야 손도 못 대면서, 자기 목은 왜 그리 무방비하게 내놓고 다닌데? 목숨이 몇 개라도 돼? 전쟁터에서 자꾸 살아 돌아오니까 본인이 진짜 불사신인 줄 아는 거야 뭐야?

욕탕으로 직행한 우희는 저만큼 떨어져 있는 이겸을 노려보며 문을 세게 닫았다. 냉탕으로 뛰어들어도 홧홧한 속은 어째선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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