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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48화 (48/100)

48화. 1만 년 연하남의 제안

“상아야, 놀라거나 울지 말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대답해 보렴. 이참에 네가 원하는 바를 생각해 봐도 좋고.”

우희가 상아를 앉혀 놓고 물었다.

“만약에 내가 사라진다면.”

여기까지 말했는데 벌써 시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장 우희가 연기처럼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우희는 단왕비 실종 소동이 바로 며칠 전의 일임을 새삼 실감했다. 시녀는 주인의 실종이 자신의 부주의 때문이라고 줄곧 자책 중이었다.

안됐지만 그래도 물어볼 건 빨리 물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로 사라지는 거야. 가령 신선의 부르심을 받는다든가?”

“그게 무엇입니까. 죽는 거랑 다름없지 않사옵니까.”

“어허! 죽다니! 상아 넌 저잣거리의 재담꾼 이야기도 못 들어 봤느냐? 신선의 부름을 받는 것은 보통 영광이 아니다. 이 더럽고 위험한 세속을 떠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평화로이 살아가는 것이야.”

말하고 보니 왠지 이 흐름을 타야겠다 싶었다. 우희는 갑자기 태세를 바꾸어 상아를 다그쳤다.

“상아 너는 내가 평화롭게 살아가길 원치 않는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상아가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저도 마마를 따라가겠어요.”

“정원이 한 명이야.”

여지없이 잘라 내는 우희의 말에 상아가 울상을 지었다.

“신선은 힘든 사람 소원 들어주는 좋은 분이라 알고 있사온데…… 어찌 그리 기준이 빡빡한지요.”

이 부분은 우희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옛날 옛적부터 내려온 선계의 규칙이었다. 언제 진선으로 승급할지 기약조차 없는 우희가 뭘 어쩌겠냔 말이다. 주인이 어깨를 으쓱하고 말자 상아가 재차 매달렸다.

“저는 정원 외로 쳐 달라고 하면 아니 되겠사옵니까? 과거 보는 분들이 수발들 하인을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듯이요. 그렇지. 원래 시녀나 하인은 셈에 넣지 않는다고 아옵니다만.”

“안 돼.”

우희가 단언했다.

“인간계가 어쨌든 선계는 안 된다.”

“너무 쩨쩨하옵니다…….”

상아의 입이 댓 발이나 튀어나왔다. 우희가 어떻게 선계의 규칙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시녀 한 명도 더 받아 주지 않는 곳이 어디 있냐고, 과연 거기가 정말 살기 좋은 곳이 맞느냐며 우울한 혼잣말을 이어 갔다.

“극락이 따로 없단다. 이것만은 확실하니라. 그러니 상아야, 내 조금 달리 묻겠다. 너는 신선의 부름을 받는 기회를 내게 양보해 줄 수 있겠느냐?”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얼굴로 대답을 주저하던 상아가 결국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애당초 마마께서 받으신 부름이지 않사옵니까. 제가 어찌 감히 양보를 하니 마니 할는지요.”

“좋아. 아주 좋다. 하면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넌 어찌할 것이냐? 평북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아뇨!”

상아의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 시녀의 성량을 떠올리면 이는 거의 포효성이라 할 만했다.

“저 혼자 거길 가서 무엇 하겠사옵니까. 전하께서만 절 쫓아내지 않으시면 그냥 왕부에서…… 설거지나 할 것이에요.”

주인과 헤어지는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풀죽은 모습이 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상아는 가능했다. 상아는 대문 밖에서 비 맞는 강아지처럼 축 처진 상태로 우희에게 물었다.

“마마, 이건 그냥 마마께서 하시는 온갖 희한한 말씀 중에 하나일 뿐이지요?”

상아 몫의 돈은 진작 챙겨 뒀다. 이젠 본인의 의사까지 확인했다. 이겸에게 확답을 듣는 일만 남았는데 이건 오늘내일 중에 할 작정이었다. 어쨌든 왕부로 다시 넘어온 소기의 목적을 거의 이룬 셈이었다.

한데 이 와중에 여기저기서 신선의 양심을 찌르네. 이겸에 이어 상아 너까지 이러느냐? 세상 둘도 없이 처량한 몰골로 상아가 거듭 답을 구했다.

“별뜻 없이 물어보신 거지요?”

우희는 따끔거리는 양심을 멀찍이 치웠다. 믿음과 불안으로 일렁이는 얼굴에 대고 거짓말하는 것도 이제 며칠만 참으면 끝난다.

“그럼.”

입술 양쪽을 힘껏 끌어올리며 우희가 대답했다.

* * *

‘몸이 영 찌뿌듯한데.’

우희는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예전에 비해 이겸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었다. 자연히 몸 안에 양기가 차곡차곡 쌓이게 됐는데, 이를 발산해서 내공으로 만들지 못하니 몸이 근지러운 기분이었다. 산해진미를 먹는 건 좋지만 소화가 덜 된 느낌이랄까.

역시 새벽 수련을 쉰 탓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검을 들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대낮부터 왕비가 검술을 연마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일 순 없었다. 운철검을 구해다 준 위세준과 왕비의 엄청난 달리기 실력에 놀란 뱁새 호위병. 현재 단왕부 내에서 이 두 사람만이 왕비와 무(武)를 연관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아는 것도 단편적인 사실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단왕비의 새벽 수련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밤에는 진이겸에게 가야 되니까 아침까지 꼼짝 마라야.’

미남을 껴안고 자는 건 좋지만 시간을 마음대로 못 쓰게 된 건 아쉬웠다. 우희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한쪽 다리를 차올렸다. 이제는 맞춤옷처럼 잘 맞는 소천의 육신이 머리 위로 곧게 올라갔다.

한동안 다리를 차올리며 고민하던 우희가 돌연 눈을 반짝였다.

이겸에게 가기 전까지 왕비궁 뒤뜰에서 하면 될 게 아닌가. 개인적 용무 때문이니 출입을 금한다고 미리 호위대장에게 말하면 며칠 전 같은 소동이 일어나진 않을 것이다.

왕비가 무슨 일을 벌이나 엄청 궁금하겠지만 그런다고 별수가 있겠어? 시녀가 왕비를 데리러 가기 전까지는 뒤뜰 방향만 쳐다볼 테지.

다시 검을 휘두른다는 기대감에 우희의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저녁상을 만족스레 비운 우희는 왕비궁 호위대장을 불렀다.

* * *

간만에 검을 잡자 흥이 났다. 우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련에 임했다.

출입 엄금이란 말에 흔들리던 호위대장의 눈동자나 ‘너도 포함.’이라는 말에 충격받은 상아의 표정은 허공을 가르는 검의 움직임에 이내 사라졌다.

새벽보다 무더운 기온이 유일한 단점이었으나, 수련이 끝난 다음 냉탕에 풍덩 뛰어들 생각을 하니 그조차 좋아졌다.

「검만 잡았다 하면 날아다니는구나.」

검선(劍仙)에게 갈 아이가 어쩌다 내 밑으로 들어왔느냐며, 핀잔인 듯 칭찬하던 사부님이 떠올랐다. 우희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훔쳤다. 물통을 기울였으나 물이 나오지 않았다.

“벌써 다 마셨어?”

왕비궁에서 제일 큰 물통을 가득 채워 왔건만 어느새 비어 있었다. 우희는 시녀에게 새로 채워 오라고 명할지 잠깐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도 같았다.

“상아가 왜 안 왔지? 때 되면 데리러 오라고 했는데.”

계속해도 되나? 우희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거기 있으면 안 될 위치에 달이 떠 있었다. 시간이 이리 늦었는데도 아무도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는 게 신기했다. 아랫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특정한 한 명은 자신의 명령을 거스를 텐데 말이다.

“왕비,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오싹할 데가 있나. 우희는 조용히 눈을 굴렸다. 이겸이 자신의 머릿속에 뭔가를 심어 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할 판이었다.

진이겸을 떠올리자마자 기다렸다는 양 등장하다니 이것도 우연일까?

“어, 네. 들어오세요.”

왕비궁 뒤뜰엔 여닫이문이 없는 대신 등나무줄기가 넝쿨진 회랑이 있었다. 등꽃이 필 무렵이면 열 보(步) 길이의 회랑이 연보랏빛 화려함으로 가득 찼다. 이겸은 회랑과 뜰의 경계에서 답을 기다리다가 우희의 말에 비로소 걸음을 내디뎠다.

어라, 오늘은 꼬리를 달고 왔네.

검은 무복 차림의 현이 이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우희가 현을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저도 모르게 말을 걸어 보려다가 얼른 이성의 끈을 잡고 버텼다. 당장은 이겸을 맞는 게 우선이었다. 하우희가 아무리 양기 꽃의 유혹에 약하다지만 그 정도 지각은 있었다.

“전하, 제가 너무 늦었죠.”

우희가 검을 슬쩍 뒤로 감추며 말했다. 이겸이 워낙 빠른 걸음으로 등장했기도 하거니와 검을 숨기기에 마땅한 곳이 없었다.

“상아가 절 데리러 왔을 텐데 아마 제가 소리를 못 들었나 봐요.”

“그렇다더군요. 방금 혼이 빠진 얼굴로 본왕을 맞았답니다.”

“으.”

우희가 미안함에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 이겸의 잘 여민 장포 아래로 침의 끝단이 보였다. 적어도 오늘은 장포를 여밀 참을성은 발휘되었나 보다.

“죄송해요.”

“……검을 수련하신다지요. 곽 호위에게 들었습니다. 왕비께서 뒤뜰 출입을 금하고 거기서 나오지 않으신다는 말을 듣자 곽 호위가 알려 주더군요. 아마 수련 중이실 거라고요.”

어떻게 알았지?

우희의 놀란 시선이 현에게 날아갔다. 현은 늘 그랬듯 눈을 내리깔고 있을 따름이었다.

“본왕이야말로 미안합니다.”

당신은 또 왜요?

우희의 시선이 이겸에게 돌아왔다. 뜬금없이 사과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 때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얼마나 신변이 불안했으면 왕비께서 직접 검을 잡으셨겠습니까. 도가 수련과는 아예 영역이 다르지 않습니까.”

“어, 그게 말이에요.”

“본왕의 불찰입니다. 이날 이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죄송스럽습니다.”

우희는 어떻게 대꾸해야 좋을지 고민했다. 오해를 풀자면 너무 많은 해명을 자세히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우희는 말없이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렇게 하면 상대방이 제 편할 대로 해석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겸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비께서 검을 다루는 사실이 알려져 봤자 앞으로 정적들의 술수만 복잡해질 뿐이겠죠. 소문나는 것을 막으려면 주변 입단속부터 해야 하고요. 제일 좋은 점은, 아예 처음부터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겸은 다만 그 ‘주변’에 자신까지 포함될 줄 몰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한데 왕비께선 독학 중이신 겁니까?”

아무 교본이나 옆에 갖다 놓을 걸 그랬나. 우희는 쓸모없는 후회를 해 봤다.

“전 원래 서책을 보고 배우는 파가 아니라서. 전하께서도 아시잖아요.”

“본왕이 봐 드릴까요?”

이겸의 다정한 제안에 우희는 하마터면 큰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여기가 인간계라 망정이지, 선계였다면 우희 말고도 수많은 신선이 동시에 폭소했을 터였다.

이겸이 백전불패의 장군인 건 알고 있다. 봉무국에서 이겸을 상대할 이가 드문 것도 안다.

하지만 난 지나가는 천선도 놀라게 한 실력의 하우희인걸! 애초에 인간과! 신선은!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1만 년 연하남의 제안이 우희 귀에 얼마나 귀엽게 들리겠느냔 거다. 차마 거절한다는 선택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우희는 자꾸 새어 나오는 수상한 미소를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르칠 입장이 아니신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희는 그 중얼거림이 이겸의 뒤에서 넘어왔음을 알아차렸다.

이게 우리 곽 호위의 목소리구나!

그러고 보니 현은 왕비의 새벽 수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수련 장면을 짧게라도 봤다면 우희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도 가늠했을 터였다. 이겸에겐 왕비의 수련에 관해서만 고하고 왕비의 수준에 관해서는 함구한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겸이 뭣 모르고 이렇게 깜찍한 제안을 하지.

현과는 기회를 봐서 따로 오붓하게 대화를 해 봐야겠다. 우희는 시선이 마주친 현에게 눈으로 말을 전했다.

그때까지는 다시 입 다물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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