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스멀스멀 시작되는 집착
일이 꼬여도 어쩜 이렇게 꼬였나.
우희는 짧은 밤나들이가 불러온 사태를 관망하였다.
너무 울어서 눈이 왕방울처럼 부은 시녀 상아는 당장 쓰러질 기색인데도 고집스레 우희의 시중을 들었다.
이겸은 조회 참석도 뒤로한 채 우희의 곁을 지켰다. 아침부터 의원이 왕부로 달려와 단왕비의 맥을 짚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왕비마마께선 참으로 건강하십니다.”
의원이 당연한 보고를 올렸다. 우희는 이제 만족하냐는 듯 이겸을 쳐다봤다. 겉모습만 놓고 봤을 때 의원의 진료가 필요한 쪽은 이겸이었다.
하지만 이겸은 의원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양 우희의 상태를 거듭 확인했다. 무슨 말을 해도 귀에 안 들어가겠다 싶었나 보다. 의원은 밤공기를 쐤을 환자에게 보약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다.
누가 봐도 보호자를 달랠 목적의 처방이었는데, 그걸 알아챈 사람은 넓은 왕부에서 우희뿐인 것 같았다.
“전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우희는 침상에 기대앉은 채 지난 한 시진 동안 하고 또 한 말을 되풀이했다.
왕비궁 뒤뜰에서 발견된 후로 시녀들에 의해 따뜻한 목욕을 당하고, 옷이 갈아입혀지고, 아기도 삼킬 수 있을 만큼 곱게 간 죽과 인삼탕을 마셨다. 죽과 탕을 마시는 것부터는 침상에서 당했으니 숫제 환자 취급이었다.
“예,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침상에 걸터앉아 죽을 떠먹일 기세였던 이겸이었다. 그는 의원의 약 처방까지 받아 내고 나자 간신히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아무도 모르게 다녀올 수 있었던 우희의 밤나들이가 이렇게 된 이유는 이겸의 꿈 때문이라고 들었다. 악몽 때문에 마음이 소란해졌고, 우희의 얼굴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하필 어제 악몽을 꿀 건 뭐야.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심지어 이겸은 평소에 꿈을 별로 꾸지 않고 숙면하는 편이었다. 그런 사람이 식은땀이 배어날 만큼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니 쉽게 다시 잠들지 못할 만은 했다.
거기까지는 우희도 어떻게든 이해가 됐다.
“전하, 근데 무슨 꿈이었는지 안 알려 주실 거예요?”
“기억이 안 납니다.”
꿈에서 본 풀떼기 하나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얼굴을 한 채로 이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저한테 궁금하신 점은 없고요? 밤새 일하다가 수색에 동원당한 장 책사는 해명을 원하는 눈치던데요.”
“왕비께서도 아시잖습니까. 그는 원래 모든 걸 알고 싶어 하는 자입니다. 하나 본왕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대의 안전입니다.”
이 와중에도 말은 참 듣기 좋게 포장한다. 우희는 이겸이 이토록 동요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둘이 손을 잡고 있다가도 어느 순간 우희가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그는 지금껏 불안한 마음을 몇 번이나 내비쳤었다. 근데 그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심지어 악몽을 꾸고 난 다음이네?
‘왕비가 아마 꿈에서 끔찍한 일을 당한 모양이야. 이겸 본인이 당했으면 한밤중에 내 얼굴을 보러 달려왔을 리 없지. 엄마 찾는 세 살배기도 아니고.’
다시 말하지만 하우희는 1만 년을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다. 인간계 돌아가는 사정쯤이야 척하면 척이었다. 다만 우희는 이겸의 꿈 내용이 궁금했다.
인간의 꿈이란 실로 오묘해서 어쩌다가 이계의 진실 한 자락을 비추기도 했다. 실제로 우희는 인간 사내의 양기를 빼먹고 다닐 때 이것은 꿈속이라는 암시를 자주 걸었다. 이용하기에 제일 편리한 수법이었다.
‘어쩌면 진이겸의 조상 중에 신선이 있어서 아끼는 후손에게 미래를 살짝 보여 준 걸 수도 있거든.’
우희는 끈기 있게 이겸의 심기를 탐색했다. 어디를 찌르고 들어가야 저 무거운 입을 열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역시 하우희는 정공법이려나.
“꿈에서 제가 죽었나요?”
이겸의 손에서 물수건이 떨어졌다. 수건은 찰방, 소리를 내며 대야 안으로 가라앉았다.
“왕비, 어째서 그런 끔찍한 말씀을 하십니까. 다시는 그런……. 모쪼록 입에 올리지 마세요.”
“에이, 그냥 꿈이잖아요.”
“꿈이라도 안 됩니다. 싫습니다.”
이겸에게선 쉽게 들을 수 없는 고집스런 말투였다. 이겸이 다시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물기를 짜낸 뒤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은 우희의 이마를 닦아 주었다. 우희는 눈짓으로 아랫사람들을 내보냈다.
곧 죽어도 주인 곁을 떠나기 싫은 상아였으나, 모두가 방에서 물러나는데 저 혼자 자릴 지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상아가 맨 마지막으로 침소 문을 닫고 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우희는 이겸에게 몸을 기울였다. 말 안 해 주고는 못 배기도록 은근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그럼 딱 하나, 장소만이라도 말해 주세요. 응?”
이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었다. 그는 우희의 말을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우희는 그의 품에 거의 안길 기세로 몸을 들이밀었다.
“전하, 원래 나쁜 것일수록 빨리 입 밖에 내서 떨쳐 버려야 한다고요.”
“본왕과 정반대의 의견이군요. 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안으로 삭여 버려서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만듭니다.”
이 부분에서 우희는 약간 혀를 내둘렀다. 어쩜 진이겸은 하나부터 열까지 진이겸 같은 행동을 하는 걸까?
걱정이 클수록 안으로 삭인다고? 그래, 빛도 제대로 안 들어오는 건녕각에서 혼자 앓는 거 봤다. 저기요, 단왕 전하. 참는 것도 한두 번이지 사람이 계속 그러면 없던 병도 생기는 법이에요.
“전하, 저는 어디를 다녀왔는지 이야기해 드릴 수 있는데—.”
이겸의 옷깃을 잡고 살살 잡아당기던 중이었다. 이겸이 더는 못 버티겠다는 듯 물수건을 던지고 우희를 끌어안았다.
“말하지 마십시오.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째서인지…… 들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여튼 진이겸, 촉은 좋아 가지고는.
우희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사실 이겸도 내심 뭔가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야심한 시각, 밀실에서 사라진 왕비. 온밤 내내 수많은 사람이 창고 틈새까지 수색했는데도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던 왕비가 뒤뜰에서 덜렁 나왔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한편으로 의문을 품은 이가 한둘이 아닐 터다. 그런데도 이겸은 끝끝내 듣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본능이 거부하는 것이다.
“알겠어요. 안 할게요. 소리 낼 필요도 없어요. 그냥 고개만 끄덕여 주세요. 제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만 확인하게.”
우희가 이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꿈에서 제가 안 좋은 일을 당한 거 맞죠?”
우희 자신에게 중요한 확인이라고 재차 말하고서야 이겸의 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티도 안 날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 끔찍이도 싫은 표정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어. 소천이를 돌려보내면 안 되겠네. 본인이 돌아가겠다며 빌어도 재고해 보라고 말려야 할 판이야.’
물론 우희는 소천의 뜻에 반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만일의 경우에 대해 알아 두고 싶었다.
우희는 지금 소천의 몸에 들어와 있지만, 이겸에게 소천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겸이 꿈에서 봤다는 사람은 심소천이다.
우희는 이겸의 꿈이 단왕 부부의 미래를 암시한다고 생각했다. 소천을 왕부로 돌려보내면 오래지 않아 죽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이야말로 확실하게.
제대로.
단왕에겐 정적이 많다. 소천이 강으로 떨어졌던 날, 우희는 똑똑히 들었다. 제발 누가 좀 도와 달라고 애타게 도움을 갈구하던 소천의 목소리를 말이다.
‘결국 이겸은 혼자 남겠네.’
열흘 뒤에 이겸은 어젯밤과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유일하게 어젯밤과 다른 게 있다면, 그땐 단왕비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란 점이다. 왕부 안팎은 물론이고 천하를 뒤져도 단왕비의 머리카락 한 올을 건질 수 없을 터다.
인간계와 선계는 아예 다른 영역이라 극락정이 있는 관산을 헤집고 다닌들 극락정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하나의 위치에 두 개의 세계가 겹쳐 있다고 보면 된다.
문득 이겸이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듯 심하게 동요할 줄은 몰랐다. 초봄에 사고를 당했을 때와는 너무도 다르지 않나.
듣자하니 이겸은 말리는 병사들을 뿌리친 채 직접 장경루 앞 연못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한 손엔 횃불을 들고 다른 손으로 물속을 헤집으며 왕비를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해도 못 찾겠으니까 한밤중에 연못의 물을 다 뺄 기세였다고. 전쟁터 한복판에서도 그처럼 무서운 표정이지 않았다고 들었다.
힘껏 유혹했더니 너무 깊이 빠지셨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대충 할 걸 그랬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우희가 이겸의 품을 벗어나며 대답했다. 저절로 시무룩한 얼굴이 됐다.
“전하를 홀리는 거요.”
우희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남겨지는’ 쪽이 된 적이 없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은 어린 우희를 맞아 줄 적에 이미 불사의 몸이었다. 이후 친교를 맺은 이들 또한 전부 선인이었다.
오늘 만나지 못해도 내일이 있었다. 내일도 안 된다면 5백 년 후를 기약해도 좋았다. 신선에겐 남는 게 시간이다. 매번 인간 사내에게 마음을 주는 셋째 사저가 특이한 경우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녀를 빼서 내려놓고 극락정으로 건너갈 때만 해도 이겸과의 갑작스런 작별이 허한 정도였다.
한데 오늘 돌아와서 그의 상태를 보니, 우희는 난생처음 자신의 행동이 진심으로 후회가 됐다.
대강 할걸. 그의 입장도 생각해 볼걸. 신선에게 백 년은 잠깐이지만 인간에게는 한평생인데. 내 의도가 어쨌든지 진이겸은 이미 단왕비 심소천에게 마음을 줘 버렸어. 그는 한 명에게 전부를 바치는 인간이고, 그에겐 이제 평생 자책하고 기다릴 일만 남았지.
우희의 입맛이 썼다.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나면 단왕부에 넘쳐흐르는 양기를 빼먹을 생각만 했었다. 꿈속으로 찾아온 소천인 척 암시를 걸어서 이겸과 동침하는 것도 흐뭇하리라고 여겼다.
근데 한 가지를 간과했다.
색선으로 돌아간 우희는 이겸을 속여 동침할 순 있지만, 지금처럼 이겸의 곁에서 살아갈 순 없다. 사제지간이 아닌 인간과 30일 이상을 보내선 안 되는 선계의 규율 때문이다.
극락정엔 이미 소천이 들어와 있다. 소천은 남편의 이름만 꺼내도 안색이 새파랗게 변한다. 이제 와서 소천을 내보낼 마음은 조금도 없지만.
우희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심소천을 구한 대신 진이겸을 다리 밑으로 밀어 버린 기분이었다.
“괜히 나대지 말걸.”
“제가 이런 인간이라 후회되십니까?”
이겸이 우희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속삭이는 음성이 눈물겹도록 애틋했다.
“그저 단맛을 취하려 하셨을 뿐이건만 자꾸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군요. 왕비께는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다 하우희가 하나만 생각하고 둘은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열흘 뒤에 왕비가 또 없어지고 나면 이 사람까지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부턴 왕비와 한 침상을 쓸까 합니다.”
우희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동안, 이겸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를 보아하니 번복할 생각이 없는 듯하였다.
“제 처소로 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왕비께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