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42화 (42/100)

42화. 우희의 귀가

그 순간 심소천의 표정을 모두가 봤어야 하는데.

아, 사실 많이들 보긴 봤다. 일단 10제자가 봤고, 제자들 뒤에서 눈만 빼꼼 내놓고 있는 맹아가 봤고, 충격 발언 당사자인 우희가 봤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보여 주고도 더 널리 알리지 못해 아쉬울 만큼 소천의 표정은 굉장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내가 아기라도 잡아먹은 줄 알겠구나. 네가 진이겸을 어려워하는 줄은 알고 있었다만, 이게 그렇게 충격이 클 일이냐?”

소천은 조그만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

“사실 한 번만 하진 않았어.”

10제자 쪽에서 누군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그렇지.’라고 한 것 같았다. 우희는 생긋 웃으며 제자들 쪽으로 부채를 날렸다. 도력은 없어도 그간 이겸의 양기를 자양분 삼아 키운 내공이 제 몫을 발휘했다. 부채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제대로 날아갔다.

“그는 내가 1만 년 동안 봐 온 자들 중에 제일가는 양기를 갖고 있더구나. 절 잡아 드십시오, 하고 맺혀 있는 열매를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소천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답삭거렸다. 우희는 상대의 반응이 궁금하여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소천의 머릿속에 엉켜 있는 생각이 멀쩡한 언어가 되어 나올 동안은 소천의 표정을 구경하고 있으면 되었다.

“단왕 전하가…… 맺혀계시나요?”

소천의 얼굴 근육이 계속 이상하게 움직였다.

“열매, 같은 거라고요?”

우희는 진이겸을 떠올렸다. 귀한 신분답게 희고 깨끗한 피부를 지녔으나 오랜 무술 수련과 출정 때문에 그 피부 위로 우둘투둘 상흔이 생겼다. 언제나 곧은 자세, 식사할 때의 정갈한 모습, 그러다가 정욕에 취하면 숨을 헐떡이며 깊이 혀를 얽었다. 단정한 육체 밖으로 스며나는 열기와 혈기.

우희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무렴, 세상 제일 탐스런 열매지.”

“저는, 저, 저는 단 한 번도 그분을 열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전하께선 첫 만남 때부터 무척이나 굳은 얼굴이셨습니다. 저를 향한 그분의 실망이 느껴졌어요. 그리고 한 번도 면전에서 웃으신 적이 없고.”

소천이 멍하게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일단 전하께선 무서우십니다.”

“무섭다고?”

“네, 무섭습니다. 선자님께선 괜찮으셨는지요?”

괜찮을 리 없지.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절세미남이 옆에 있는데 어찌 괜찮겠냔 말이다. 소천과 대화를 하는 지금도 이겸의 자태가 눈앞에 삼삼했다.

“많은 이들이 단왕비가 된 저를 부러워하고 시샘했습니다. 천하제일의 사내와 혼인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게 아니냐고 말했지요. 하지만 선자님, 아십니까? 천하제일의 사내와 혼인한다고 해서 저까지 천하제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냥, 혼인을 했을 뿐이죠.”

소천은 느리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알고 있답니다. 제가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전하께서 절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쫓아내지 않으실 거란 사실을요. 비록 절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해도요. 그런데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한 마디면 제 전부가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소천이 흐린 눈으로 우희를 쳐다보았다. 시선과 표정과 호흡이 모두 불안정했다.

“선자님, 역시 제가 이상한 걸까요? 겁이 너무 많은 것일까요?”

우희는 소천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 주었다. 그제야 이해가 된 까닭이다. 심소천은 원래 섬약한 성정인 데다 정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실수와는 거리가 먼 ‘완벽한’ 남편 이겸이 어려운 것인 줄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구나. 너의 두려움은 더 깊은 것과 닿아 있었구나.

우희는 대답 대신 천천히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다. 아까 부채를 던진 방향이었다. 우희가 손을 까닥이자 부채를 맞은 제자가 냉큼 달려왔다. 제자는 사부에게 두 손으로 고이 부채를 건넸다.

부채를 받아 들고도 우희는 오른손을 거두지 않았다. 다음 순간, 손의 형태가 바뀌었다. 누가 봐도 상대의 목을 움켜쥐는 자세였다.

제자가 사부의 얼굴을 살폈다. 우희는 여전히 시선을 소천에게 둔 채였다. 심지어 입가엔 엷은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제자의 시선이 우희의 얼굴과 손을 분주하게 오갔다. 그는 결국 조용히 무릎을 꿇고 사부의 손아귀에 제 목을 맞춰 넣었다.

“소천이 네가 두려워한 게 이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진이겸을 공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우희가 손을 거뒀음에도 제자는 섣불리 일어서지 못했다.

“권력.”

우희가 손을 휙 저었다. 제자는 그제야 일어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말 한 마디 할 필요 없이 나보다 아래에 있는 자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 권력이다. 그의 애정과 신뢰를 얻고 자식을 주렁주렁 낳아 준대도, 애초에 단왕비가 가진 권력은 단왕의 그것을 넘지 못하니 두려워함이 당연하지.”

우희가 다소곳이 시립해 있는 제자들을 눈짓했다.

“저들을 보렴. 지금은 맹아도 나를 두드려 패 죽일 수 있을 텐데 안 그러잖니. 웬걸, 내가 손을 뻗자 본인이 알아서 목을 내놨다.”

우희는 소천의 앞으로 다가갔다. 하우희 본체라서 더욱 예뻐 보이는 손을 꼭 잡고는 토닥여 주었다.

“네 두려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야.”

“하지만 제가 조금만 더 단순했다면 세상을 살기에 한결 편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테지.”

우희가 선선히 긍정했다.

“생각이 깊으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데까지 볼 수 있단다. 내 눈에는 빤히 보이는 것을 남들은 알아채지 못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거고.”

“선자님…….”

우희가 잡고 있는 소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는 진이겸이나 인간계의 황제가 두렵지 않아. 강호에 세력을 갖고 있는 황후도, 후궁을 장악한 귀비도 마찬가지다. 내겐 그들이 없는 힘이 있지. 난 불사(不死)의 몸이란다. 내 본체는 천선도 감탄할 만큼 검을 다룰 수 있고, 선계와 인계와 마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거든.”

우희의 얼굴에 확신 어린 미소가 번져 나갔다.

“비록 내가 그들의 곁에 잠시 머물렀다만, 실질적으로 나는 그들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속한 자였지.”

소천이 두려워하는 이겸의 권력은 그가 사는 인간계에서만 통한다. 다른 세계에서 이겸은 유한한 인간에 불과하다. 소천이 극락정 세력을 등에 업는다면 이제 둘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날 걱정하지도 말고 너 대신 거기 있었던 시간에 대해 미안해하지도 말고 날 두려워하지도 말렴. 맹아와 저 녀석들이 얘기해 주지 않더냐? 하우희 이 몸은—.”

“강강약약이라고요.”

이제까지 10제자 뒤에 숨어 있던 맹아가 목소릴 높였다.

“전 심 낭자에게 말했어요, 선자!”

말이 중간에 잘린 우희가 몸종을 향해 눈을 흘겼다. 맹아는 헤실헤실 웃으며 칭찬을 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희는 칭찬 대신 몸을 일으켰다.

“첫째야, 문 열어라.”

무의식중에 처소의 문을 열려고 몸을 틀었던 첫째가 멈칫했다. 역시 큰애는 큰애였다. 오래 붙어 산 까닭에 열 놈 중에 눈치가 제일 빨랐다.

첫째는 허공에 두 세계를 잇는 통로를 열었다. 사부의 도력을 빼먹은 덕분에 통로 열리는 속도가 기분 나쁠 정도로 쾌적했다.

고얀 것.

“선자님, 어딜 가시려는지요?”

소천이 당황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희가 상대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상아가 염려된다지 않았느냐. 그 아이 살길을 터 주고 와야지.”

“……다시 단왕부로 가시는 건가요?”

“걱정 마라. 인간계 시간이 여기보다 빨리 흐르긴 해도 아직 해가 뜨진 않았을 거다. 왕비가 간밤에 어딜 다녀왔는지 아무도 모를걸.”

우희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하지만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금세 엄한 사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원상 복구 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우리 모두 빤히 알고 있지. 열흘을 주겠다. 열흘 뒤 새벽에 문을 열어라. 알겠느냐?”

10제자가 한 목소리로 사부를 배웅했다. 우희는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다가 잠깐 생각난 것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소천아, 네 몸이니 네가 정하여라. 열흘 동안 진이겸의 양기를 취할 때 진도를 어디까지 나가도 좋은지 말이다.”

* * *

‘우리 소천이가 은근히 대범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우희가 통로를 걸으며 작게 웃었다. 사실 소천이 이겸과의 모든 접촉을 거절했어도 우희는 들어줬을 터였다. 색선과 인간의 사고방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희는 탐스러운 진이겸을 못 건드려도 자기만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잠시만 참으면 될 일이다.

소천의 몸을 잘 간수했다가 원래 주인에게 반납하고, 우희의 본체로 돌아가면 그다음부터는 거리낄 게 없어진다. 무르익은 양기들을 밤낮없이 빼먹겠다는 야심이 우희의 안에서 넘실댔다.

‘한데 선자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따르겠다니. 아휴, 저 순둥이를 어찌하면 좋아. 아니면 내가 어디까지 갈 줄 모르기에 대범할 수 있는 걸까.’

소천 본인은 10제자와 정을 나누면서 엄청 큰 산맥을 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을 저질렀다고. 소천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맞는 말이었다.

‘소천이를 곁에 두고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하겠어.’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기쁨이지 않을까.

우희는 소리 죽여 웃으며 안개 밖으로 나왔다. 우희의 발이 왕비궁 뒤뜰 땅바닥에 닿자마자 통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좋아. 첫째 녀석, 인적 없는 장소에 잘 내려 줬고.

“그런데 왜 내 침소가 아니라 뒤뜰이지?”

우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왜 이렇게 전체적으로…… 밝아?”

하늘을 보니 동터 오기 직전이었다. 보통 이 시각엔 최소한의 인력만 움직이곤 했다. 오늘처럼 곳곳에 등을 켜 놓는 일은 없었다.

어째 조용한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단 말이지.

우희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예정에 없던 손님맞이 일정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뒤뜰을 빠져나오는 내내 우희는 이 모든 것이 왕비의 실종 때문이라는 의심을 정말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마, 마, 마마, 마마를 찾았다! 왕비마마가 여기 계시다!”

그래서 아직 앳된 얼굴의 병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달아났을 때도 ‘뭐지?’ 싶었을 뿐이었다. 그건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달아나는 모양새였다.

야차라도 본 얼굴이네.

하지만 아무리 태연한 우희라도 병사가 사라진 방향에서 수십 명이 우르르 달려왔을 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같이 횃불과 등을 든 채, 우희를 생포하고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이겸이 등장했다.

침의 위에 달랑 장포만 걸친 차림이었다. 앞섶은 허술하게 벌어져 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장포 자락이 물에 젖어 있었다. 언제나 깨끗하던 손톱 밑엔 흙모래가 낀 상태였다.

우희는 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되지 않는 건 이겸의 모습이었다.

“전하, 물에 빠지시기라도 한 거예요?”

이겸이 우희를 향해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금방이라도 무릎이 꺾일 듯한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이겸의 단단한 몸을 떠올리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하나 왠지 그랬다. 그는 짧은 밤사이 이성을 모조리 빼앗긴 사람처럼 보였다.

“전하?”

우희의 뺨을 만지려던 이겸은 자신의 손이 더러움을 깨닫고 그대로 굳었다. 그렇지만 만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

환영이 아니라 실제로 온기를 띤 사람인지.

혹시나 잘못 손댔다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진 않을지.

이겸은 두려움과 절박함에 질린 채 우희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왕비의 부드러운 형체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겸의 호흡이 거칠게 끊기기 시작했다. 그는 우희의 팔을 몇 번이고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소천.”

이겸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다시 말해 보세요. 그대의 목소리를 내서. 다시 한 번 본왕을, 불러 보십시오.”

“……이겸?”

다음 순간 이겸이 우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딜 갔다가 오느냐고 묻지도 못한 채, 그저 돌아왔으니 되었다고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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