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사라진 단왕비
꿈속이었다. 그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땅엔 그늘 아래 쉴 만한 나무 한 그루조차 없었다. 공기 중에 그을음 냄새가 떠다녔다.
『전하.』
익숙한 음성에 옆을 돌아보자 소천이 보였다. 머리를 틀어 올린 모양이며 장신구와 의복이 모두 낯설었다.
낯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슬픔에 물든 소천의 표정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겸이 알기로 소천은 단 한 번도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사고 전이건 후건 간에 말이다.
『어젯밤 밀서를 받았습니다. 제가 그자에게 가면 5년간의 휴전을 약속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 했는데 어째서인지 목이 멨다. 소천이 슬프게 웃었다.
『전하께선 허락지 않으시겠죠.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아까 올린 술에 약을 한 방울 섞었어요.』
그와 동시에 이겸의 눈앞이 일그러졌다. 머리가 심하게 어지럽고 졸음이 쏟아졌다. 소천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아슬아슬하게 옷깃만 스쳤을 뿐이었다.
『5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에요. 이 귀한 시간을 이용해서 힘을 더 키우시면 됩니다. 저는…… 전하의 눈과 귀가 되어 그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이겸의 무릎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 이겸은 퍼석한 흙을 움켜잡았다. 소천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를 이대로 보내선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천의 미소는 피치 못할 헤어짐 뒤의 만남을 기약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겸의 숨이 턱 멎었다.
소천은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이다.
『아, 안……. 잠깐…….』
『다시 뵙는 날까지 강녕하세요.』
『가지…….』
소천이 예를 올린 다음, 몸을 돌렸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 사이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우아하게 늘어진 의복의 뒷자락이 끌릴 때마다 가장자리가 핏빛으로 물들여졌다. 그 핏빛에 소천이 곧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안…… 돼…….』
이겸은 필사적으로 땅을 기었다. 꿈인 걸 아는데도 그녀를 보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이 생생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이 아닌 게 아닐까?
꿈에서 이렇듯 생생한 고통을 느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 없었다. 이겸은 더욱 필사적이 되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소천을 저대로 보내선 안 된다. 혼절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다 보니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점점 감기는 눈꺼풀 사이로 소천의 뒷모습이 흐려졌다.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더니 사방에서 비통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힘은 산을 뽑을 듯하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力拔山兮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마저 나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騅不逝).』
소천이 사라진 방향에서 큰 불길이 일었다.
『오추마가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리(騅不逝兮可奈何). 우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할까(虞兮虞兮奈若何).』
뒤늦게 나타난 병사들이 쓰러진 이겸을 부축했다. 당장 말을 달려 소천을 데려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젠 목소리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이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산 채로 몸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 * *
“……안 돼!”
이겸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손을 내뻗은 허공이 어두컴컴했다. 그는 한동안 미동조차 못한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자면서 흘린 식은땀에 대자리가 축축하게 젖었다.
꿈이었구나.
어둠에 익숙해지자 가구들의 형체가 보였다. 늘어진 휘장과 창가의 화분 모두 그대로였다. 이겸은 안도의 긴 숨을 토해 냈다.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악몽은 현실을 잊게 할 만큼 강력한 여운을 남겼다.
“꿈이었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굳이 쥐어짠 까닭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강력해도 꿈은 꿈일 뿐이었다. 어떤 악몽도 현실의 소천을 해칠 순 없었다.
사고 이후로 왕비궁의 경비를 더욱 강화했다. 현실의 소천은 그곳에 머문다. 시간이 늦었으니만큼 침소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이다.
부디 그녀는 자신과 달리 좋은 꿈을 꾸고 있길 빌었다. 냉수를 입으로 가져가는 이겸의 손은 여전히 눈에 띄게 떨렸다.
“대체 무슨 꿈이 이렇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냉수는 벌렁대는 가슴을 가라앉히기에 역부족이었다. 이겸은 순식간에 물 잔을 비운 뒤 연거푸 한 잔을 더 마셨다. 보통 아침이 되기 전까지 쓰지 않는 대야에 남은 물을 붓고 세수를 했다.
잠기운은 확실히 사라졌건만 악몽이 불러일으킨 불안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겸은 현을 부르려다 말았다. 호위무사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섬뜩하고 끈끈한 불안은 소천의 잠든 얼굴을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질 터였다.
이겸은 침의 위에 장포를 걸치고 침소를 나섰다. 야간 경비를 서던 병사들이 단왕의 등장에 약간 허둥댔다. 따라올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병사들은 고개를 숙이면서도 이겸의 흐트러진 복장을 힐끔거렸다.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단왕이었다. 그런 이겸이 침의 바람으로, 장포를 제대로 여미지도 않고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에 다들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왕비궁이 원래 이렇게나 멀었던가.
거리는 분명 줄어들고 있건만 어째선지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이겸이 걸음을 바삐 옮길 때마다 장포 자락이 휘날렸다.
“단왕 전하를 뵈옵니다.”
“쉿.”
왕비궁 밖에 서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예를 갖췄다. 이겸은 혹시라도 소천이 깰 것이 염려됐다. 잠을 설치는 이는 자신 하나로 족했다.
“전하, 야심한 시각에 어쩐 일이신지요.”
“왕비의 안부가 궁금하여 들렀다.”
“하오시면 마마를 깨우라고 시녀에게 전달할까요?”
“그러지 마라. 본왕은 그저 얼굴만 보고 가면 되는 것이니.”
그대로 병사를 지나치려던 이겸이 문득 멈춰 섰다.
“왕비께서 침소에 드신 지 얼마나 되었느냐?”
“아마 두 시진은 족히 되었을 겁니다. 시녀의 말에 따르면 오늘따라 침소의 불이 일찍 꺼졌다더군요.”
“……알겠다.”
소천의 침소로 향하는 동안 새로운 걱정이 떠올랐다. 내색하진 않았어도 많이 피곤했던 걸까.
언젠가부터 왕비궁 하인들의 입단속이 철저해졌다. 특히 시녀 상아는 이겸이 슬쩍 흘린 실마리를 냉큼 주워 가곤 했는데, 요즘 들어 반응을 고르는 기색을 보였다. 매화는 왕비궁이야말로 단왕부의 실세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왕비 주변에 충심 깊은 이가 많아진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예전처럼 시녀들로부터 소천에 대해 자주 듣지 못하는 것만은 조금 아쉬웠다.
이겸은 침소 문 앞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달빛이 고요히 내려앉은 침소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겸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현만큼은 아니겠으나 발소리를 죽이고 걷는 데엔 자신 있었다. 작게 솟아오른 침상 위의 형체를 보자마자 입가가 누그러졌다. 공기 중에 소천이 즐겨 쓰는 향이 은은히 느껴지는 것도 이겸의 불안을 가라앉히는 데 한 몫 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도 잠시. 이겸은 침상 가까이 다가갈수록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호흡에 따라 몸이 오르내리는 자연스런 기척도 없었다.
이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얇은 여름 이불을 홱 걷었다. 자고 있어야 할 사람 대신 긴 죽부인(竹夫人)이 누워 있었다.
‘소천은 어디 있지?’
당장 침소 밖의 병사들을 불러들였다. 소천이 없다는 말에 병사들은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앞선 2조와 교대한 후로 자신들은 자리를 뜬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규칙대로 교대 시 왕비께 보고를 드렸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왕비께선 침소에 계셨다고 하였다.
“상아 낭자를 불러서 물어보십시오. 마마를 제일 마지막으로 본 사람입니다. 침소의 불이 꺼지고 나서도 야식 그릇을 내가려고 들어갔었습니다.”
병사의 말에 곤히 자고 있던 상아가 불려 왔다. 앳된 얼굴엔 아직 잠기운이 가득했다. 그러나 시선이 이겸에게 닿은 순간 상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 전하!”
“왕비께서 자리에 없으시다. 네가 왕비를 제일 마지막으로 보았다는구나. 어디 가셨는지 알고 있느냐?”
“예?”
상아가 고개를 빼고 침소를 들여다봤다.
“마마께서…… 안 계시다고요?”
“너도 모르는 거군.”
상아의 황망한 얼굴을 보니 거듭 물어봤자 똑같은 답을 얻을 듯했다. 속이 타들어 갔다. 소천은 영리하고 몸이 날래니 병사들이 한눈파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침소를 빠져나갔다고 믿고 싶었다.
하나 그런 실낱같은 가정은 이내 벽에 부딪쳤다. 산책을 하고 싶으면 병사들에게 말하고 나가면 된다. 사람이 따라붙는 게 번거롭다면 혼자 걷겠다고 하면 그만이다.
대체 소천이 아랫사람들의 눈을 속이며 침소를 몰래 빠져나가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하오나 마마께선 제가 야식 그릇을 도로 가져갈 때만 해도 침상에 누워 계셨는데요…….”
“그때 왕비의 얼굴을 확인했느냐?”
상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이불 덮고 계신 것만 보았사옵니다. 좋아하는 경단에도 손을 안 대셔서 곤하신가 보다 하였지요.”
상아가 차츰 울먹였다. 주인을 향한 배려가 후회로 바뀌는 순간일 터다.
그사이 병사들이 침소 안에 불을 밝혔다. 낮처럼 환해진 침소에 덩그마니 나뒹구는 죽부인이 불길한 기분을 부채질했다. 이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즉시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왕부 내를 수색하라. 창고의 상자도 모조리 열어 봐라. 사람의 몸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면 하나도 빼놓지 말고 샅샅이, 뒤져라.”
“왕부 밖에도 사람을 푸시겠습니까?”
“일단은 안부터 확인하도록.”
물건이나 사람을 빼 가기 힘든 경우, 소란을 피워서 내부의 시선을 분산시킨 뒤에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정적들은 항시 단왕부를 주목하고 있다. 소천이 사라진 게 외부의 짓이라면 더더욱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됐다.
이겸의 명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꽹과리를 치고 다니며 잠을 깨우는 대신, 직접 사람을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수색은 신속한 동시에 조용히 이루어져야 함을 모두가 파악했다.
이겸 또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몸을 움직여야 했다. 제발 꿈은 꿈에 불과하기를 빌었다. 한편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날이 밝도록 소천의 변고를 알아채지 못했을 걸 생각하니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당장 왕비궁부터 찾아보려는 이겸의 눈에 낯익은 비녀가 들어왔다. 탁자 위에 너무도 가지런히 놓여 있는 비녀는 아무리 봐도 사람이 거기 둔 게 분명해 보였다.
여인이 비녀를 뽑아 놓고 사라짐은 무엇을 의미하나. 열에 아홉이 작별을 떠올릴 것이다. 방금 전 이겸 역시도 작별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을 스친 기억에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신은 저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른 비녀였으나, 사람은 같았다.
“물……. 장경루의 연못부터 수색하라!”
겨우 울음을 삼키며 시녀들을 불러온 상아가 이겸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어린 시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올해 초봄, 소천은 비녀를 가지런히 뽑아 둔 채 외출을 나갔다가 강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단지 비녀를 두고 간 게 같을 뿐이라 해도 자꾸 나쁜 쪽으로밖에 생각이 되지 않았다.
이겸은 결국, 달리기 시작했다.
* * *
우희의 고개가 기괴하게 돌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의 끝에는 무릎을 꿇고 있는 제자들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극락정의 뜰은 순간 개미새끼 움직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왜 내 몸의 도력이 이따위로 줄어들었냐고, 사부가 묻지 않느냐?”
우희를 제외한 모두가 침도 삼키지 못한 채 달달 떨었다.
“이것들이…… 위난에 처한 인간과 지엄한 사부를 동시에 능멸해?”
“사부님, 그것이—.”
“네놈들의 오장육부를 당장 갈가리 찢어 놓겠다!”
대노한 우희가 극락정이 떠나가라 호통 치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검, 도끼, 식칼, 금속이라면 무엇이든 좋았다.
이것들이 이럴 줄 알고 먼저 치워 놨나? 어쩜 바늘 하나 보이지가 않아.
결국 머리통을 내리찍겠다며 목침(木枕)만 한 돌덩이를 들어 올렸을 때, 소천이 눈물 바람으로 우희 앞에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