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수상한 낌새
“선자, 오랜만이에요!”
맹아가 안개 밖으로 상체를 내밀더니 왕비궁의 화려한 침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구경했다.
“오오, 여기가 심 낭자의 집인가 봐요. 왕비라더니 진짜 왕비마마가 살 법한 곳에서 살고 있었구나. 와, 천상계가 이런 모습일까요?”
맹아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조잘댔다. 맹아의 흥분은 상아가 놓고 간 야식 그릇에서 최고조를 찍었다. 연밥을 빚어 만든 동글동글 오색경단 위에 시원한 계화꿀물을 부어 놓았다. 대추 고명까지 맛깔스레 올린 간식에 맹아가 군침을 삼켰다.
“선자가 안 드실 거면 저거 맹아가 먹어도 될까요? 참, 지금은 선자도 도력이 없고 맹아도 마찬가지이니 제가 불안해서 안개 너머로 나가지 못하겠거든요. 그러니 선자가 그릇을 좀—.”
맹아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비스듬히 앉아 한숨을 내쉬던 우희가 쏜살같이 튀어 나가 맹아의 만두 머리를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꺄악!”
“내가 늙어 죽어야 올 셈이었지, 응? 순순히 실토해라. 소천이 눈을 뜨자마자 우리 둘의 혼백이 바뀐 걸 알 수 있었을 텐데 대체 계절이 몇 번 바뀌어야 네 성에 찼겠느냐.”
“꺄악, 선자! 맹아 죽어요!”
“그런데 뭐 어쩌고 어째?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간식 먹게 그릇을 옮겨 달라고?”
“꺅, 인간이 선인을 죽이네! 꺄아악, 신선이 몸종 잡는다!”
몸종의 엄살은 익히 알고 있었다. 우희는 사정 봐주지 않고 맹아의 머리를 잘잘 흔들어 댔다. 탐스런 만두 머리가 머리통에서 똑 떨어지기 전까지 잡아뜯어 줄 셈이었다.
“선자, 선업을 쌓으셔야죠! 꺅! 악! 이러다 머리에 구멍이 나겠어요!”
맹아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주인을 말린답시고 이런 소리를 해 댔다.
“선자, 제 비명 소리에 여기 인간들이 달려올 거예요!”
우희가 눈을 희게 떴다.
“안개의 색과 기운을 보아하니 이 문은 첫째가 연 것일 터. 녀석이 내 밑에서 그리 오래 수련했거늘 소리 차단도 안 했겠느냐?”
주인과 몸종 사이에 시선이 오갔다. 요것 봐라, 하는 괘씸한 눈빛과 아차, 싶은 눈빛의 교환이 순식간에 이뤄졌다.
“새해가 될 때까지 이렇게 흔들어 줄 수도 있느니!”
“꺄아아악!”
우희의 팔심에 맹아가 이리저리 나부꼈다. 결국 몸종은 자신이 처음부터 했어야 할 일을 했다. 양손이 닳아 없어지도록 용서를 비는 것 말이다.
“심 낭자가 정신을 차린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인간계 날짜로는 한 달이 족히 넘었긴 하지만……. 으아아, 어쨌든 맹아가 죽을죄를 지었어요. 심 낭자가 너무 겁을 먹었기도 했고요. 솜털 같은 마음 안심시킨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요. 게다가 선자는 원체 느긋한 성정이시니까 별 문제 없이 계실 줄 알았어요. 아무튼 맹아의 잘못이 크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희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어째 그 밖의 변명이 더 길구나.”
맹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사실 그렇게 늦은 건 아니지 않나요. 10년도 안 지났는데.”
우희는 이번엔 맹아의 목을 한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맹하고 맹랑한 몸종은 나 죽네 비명을 지르며 용서를 빌었다.
“선자, 살려만 주세요!”
“내 이 일은 두고두고 갚아 줄 것이다. 억울해 마라. 제자 녀석들도 이번을 기점으로 정신 교육에 들어가야겠어.”
맹아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우희가 풀어 주자 몸종은 기침을 요란히 해 댔다.
“한데 심 낭자는 광주리 한 번 제 손으로 들어 본 적 없다던데요. 모진 소리를 들으면 며칠씩 몸살을 앓고요. 선자는 지금 심 낭자의 몸에 들어가 계시잖아요. 팔심만으로 맹아를 제압하신 건가요?”
살려 달라며 비비던 손바닥이 아부하는 모양새로 변했다.
“과연 우희 선자는 선계의 빛이요 희망이세요!”
옆에서 종을 울려 대는 맹아를 보고 있자니 단왕부에서의 시간이 모두 꿈과 같았다. 목욕하러 들어온 이겸을 다짜고짜 잡아먹으려 했던 일이며 건녕각에서의 순간, 손톱에 꽃물을 들이고 입을 맞춘 일들이 벌써부터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소천의 몸에 들어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극락정으로 돌아갈 날만을 생각했다. 단왕부 사람들이야 자신에게 잘해 주지 못해 안달이다만 그것과는 별개였다.
이겸의 말이 맞았다. 우희는 여기 속하지 않은 자다. 하우희는 도를 닦는 신선이며, 뜻밖의 사고로 잠깐 몸이 바뀐 것일 뿐이다.
바뀐 것은 때가 되면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법. 이 육신은 하우희의 것이 아니다. 진이겸과 단왕비의 지위 또한 원래 주인이 따로 있었다.
‘내일 아침엔 극락정의 침소에서 눈을 뜨겠구나.’
희한하게도 기분이 점점 더 이상해졌다.
사실 우희가 원한다면 이후에 얼마든지 봉무국으로 놀러 올 수 있었다. 지인인 척 소천의 곁에 머무는 것도 가능했다. 차고 넘치는 도력으로 용모를 바꾸면 된다.
무엇보다 이제 장륜언과 위세준,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호위무사 곽현의 양기를 먹어도 된다는 점에서 색선 하우희는 어깨춤을 추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기분이 왜 이럴까.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연연해하는 게 마치 시간에 속박된 인간과 같지 않은가.
“마주 웃을 때만 해도 몰랐지. 이 생의 작별인 것을. 기러기는 집으로 돌아오고 해는 저무는데 어제의 사람은 기약이 없구나.”
우희는 떠오르는 문장을 읊조리며 왕비궁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금으로 된 사슬에 수정 장식이 늘어진 비녀를 뽑아 그릇 옆에 내려놓았다. 맹아는 산발을 하고서도 여전히 야식 그릇에서 아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가자.”
인간의 몸에 오래 있었더니 어느새 감정도 인간을 닮아 가는 모양이었다. 우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을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단왕 진이겸, 그동안 즐거웠느니라. 이제 이 몸의 진짜 주인이 돌아올 테니 다시는 독수공방시키지 말고 잘 살길. 처음엔 당황스럽겠지만 차차 적응이 될 거야. 기억 잃고 딴사람처럼 구는 왕비를 대하는 게 낯선 경험은 아닐 테니.
그대는 잘 해낼 거야.
이윽고 우희는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어디선가 맑은 향기가 풍겨 오는 안개 속을 걸은 지도 반각이 되었다. 우희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맹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힉!”
“너희들 하는 짓이 매우 수상하구나. 언제쯤 이실직고할 것이냐.”
“무, 무, 무엇을요?”
맹아가 커다란 눈을 데굴거렸다.
“나를 이렇게 오래 빙빙 돌리는 이유 말이다. 첫째의 도력이 어느 정도인지 내 빤히 알고 있거늘 반각이나 걷게 하다니.”
맹아가 둘러대기를 시도해 보려다 대번에 그만두었다. 감정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였다. 이럴 줄 알았다는 둥, 왜 다들 자기 말을 안 믿느냐는 둥, 그 와중에 제일 어려운 일은 자기 몫이라는 둥 구시렁댔다.
“그게……. 선자도 그쪽 생활하면서 감을 잡으셨겠지만 심 낭자가 무척 안쓰러운 삶을 살아왔잖아요? 항상 주눅 들어선, 숨도 제대로 못 쉬더라고요.”
우희가 뒷덜미를 틀어쥔 손에 힘을 주자 맹아의 말이 빨라졌다.
“그러니까 심 낭자는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도 왕부로 돌아가고 싶지 않대요. 극락정에서 평생 물을 긷다 죽더라도 선자의 아래에 있고 싶대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을 마친 맹아가 뒤늦게 주인의 눈치를 보았다.
“물론 선자가 허락하시면요…….”
“그럼 그렇다고 말을 하면 되지. 왜 통로를 길게 늘인 것이냐? 내가 묻지 않았으면 넌 대체 언제 입을 열려고 했고?”
맹아가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우희는 몸종의 뒷덜미를 놓아주었다.
“극락정에서 지낼 땐 몰랐는데요. 저도 모르는 새 선자의 손맛이 그리웠나 봐요. 간만에 호되게 혼나니까 정신이 번쩍 드네요! 말도 꺼내기 어려워하는 심 낭자와는 정반대의 이 성질…… 큼, 큼큼, 성정이요. 아이, 우리 선자 호방하기도 하시지.”
우희가 손을 뻗기 전에 얼른 먼저 달아나는 맹아였다.
“다 말했어요! 저 죽기 전에 문 열어 주세요!”
맹아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안개 저편에 극락정이 또렷이 보였다.
역시 이 녀석들이 짜고 쳤어. 자리 좀 비웠다고 기강이 해이해진 거 보게. 이 사부를 어떻게 보고.
우희는 눈을 흘기며 출구로 이동했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사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희가 땅을 밟기 무섭게 열 명의 훤칠한 제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사부를 반겼다. 평소보다 곱게 단장한 티가 났다. 이런 걸 두고 알아서 긴다고 표현한다.
우희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뺨에 의심스러운 홍조가 도는 첫째를 시작으로, 왠지 눈 마주치길 꺼려 하는 둘째, 입을 굳게 다문 셋째, 과하게 미소 짓고 있는 넷째 등이 보였다. 걸음아 날 살려라 뛰었던 맹아는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이었다. 아마 소천을 데리러 갔으리라고 짐작했다.
“스스로 받을 벌을 정해라.”
“하하, 사부님. 방금 오셔 놓고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게다가 저희가 뭘 잘못한 줄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일곱째가 맹아 못지않은 해맑음으로 사부의 심기를 누그러뜨려 보려 했다. 옆에서 무릎 꿇고 있던 여섯째가 사제의 내장을 파괴할 기세로 옆구리를 찔렀다.
“잘못을 몰라?”
“아닙니다, 사부님. 실언했습니다.”
“내가 고작 강에 빠졌다고 혼절할 위인이더냐? 너희가 극락정에 들어온 뒤로 단 한 번이라도 이 사부가 앓아누운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열 개의 머리가 맹렬히 좌우로 움직였다.
“한데, 밖에 나갔던, 사부가, 쓰러져서, 돌아오면, 당연히, 이상함을, 눈치챘어야지.”
우희의 말이 마디마디 끊어졌다.
“계절이 바뀌도록 손을 놓고 있어?”
이제 곧 제자들의 관절이 사부의 말처럼 마디마디 끊어질 차례였다. 여덟째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표정을 지었다.
우희는 본능적으로 무기를 소환하는 자세를 취했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내공이 쌓였다고 하나 인간의 몸으로 선계의 무기를 불러낼 순 없었다.
“이 자세로 딱 기다려라.”
우희의 입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왔다.
“소천이는 어디 있느냐?”
그러자 10제자의 표정들이 아주 볼만해졌다. 우희는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혼백이 제자리로 돌아가고서도 여기 남게 해 달라고 청했다며? 어쨌든 당사자가 와야 뭔가를 할 게 아니냐.”
“선자!”
맹아가 저쪽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몸종의 뒤를 따라오는 소천이 보였다.
그것은 몹시 신기한 경험이었다. 저기 걸어오는 것은 분명 하우희의 육신인데 눈을 비비고 재차 봐도 하우희스럽지 않았다. 살짝 내리깐 시선, 조심스러운 걸음걸이,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정숙한 몸가짐. 살면서 한 번도 긴장한 적 없는 우희의 육신이 소천의 감정을 덧입은 까닭에 가늘게 떨렸다.
소천은 감히 우희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봉무국의 예법대로 무릎을 굽혔다.
“인간 심소천, 색선을 뵈옵니다.”
당장이라도 제자들을 갈아 마실 기세였던 우희가 소천의 등장에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볼수록 신기했다. 목소리는 우희의 그것이건만 어조나 떨림은 완전한 타인이나 다름없었다.
우희가 직접 소천을 일으켰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는 날이 오다니 감회가 남달랐다.
“그래, 극락정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고?”
우희가 여전히 무릎 꿇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저 녀석들의 손님 대접이 형편없지만은 않았던 모양이구나. 응당 그래야지. 사부의 체면이 있는데.”
10제자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우희는 소천이 계속 몸을 떠는 게 안타까웠다. 자신의 몸에 들어가 있으면 한겨울 추위도 타지 않을 텐데.
‘내가 많이 무섭나?’
몸종과 제자들이 들었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생각을 태연히 해 보는 우희였다.
“저, 색선님.”
“맹아처럼 편하게 선자라고 부르면 된다.”
“네, 서, 선자님.”
소천이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근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희는 기다려 줄까 하다가 혼백부터 돌리고 나서 대화하는 편을 택했다.
이제껏 쌓은 내공 덕분에 소천의 몸도 상당히 튼튼해졌다. 예전과 달라진 근력에 깜짝 놀라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일단 혼백부터 돌리자꾸나.”
우희의 말에 일동이 긴장했다. 맹아는 벌써부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자,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면 되느니라. 머리는 비우고 단전에 힘을 주고 이렇게—.”
우희가 소천의 아랫배에 손을 댔다. 소천이 아무것도 몰라도 그녀가 들어 있는 우희의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 방법만 알려 주면 될 터였다.
그래야 하는데.
“……이게 뭐야. 왜 도력이 깎여 있어.”
끝내 소천의 볼을 타고 눈물이 뚝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