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새벽이었다. 야간 경비를 맡은 자들을 제외하면 다들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터다.
검은 무복 차림의 우희는 왕비궁 뒤뜰로 나갔다. 위세준이 구해다 준 운철검을 옆에 내려놓은 채 익숙하게 몸을 풀었다. 몸 안의 내공을 확인한 다음, 검을 잡고 정신을 집중시키려는 순간이었다.
“진짜 되게 신경 쓰이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 리 밖의 대나무를 벨 기세이던 우희가 대번에 풀어졌다. 다리 한 쪽에 힘을 싣고 삐딱하게 선 색선은 동 트기 전의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사부님, 저를 너무 선량하게 키우신 거 아닌가요? 아무리 제가 신선이라도 정도껏 착해야지요.”
우희가 눈을 감으며 탄식했다.
“곁붙이 하나 없는 왕비 신세가 가여워서 좀 도와주려고 했더니 일이 묘하게 흘러가네요. 네, 알고는 있어요. 이게 다 제자가 지나치게 특출 난 탓이죠.”
시야를 열자 새벽하늘의 별이 반짝였다. 우희는 사부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기억조차 안 나는 저의 부모님이 왜 딸을 속세 밖으로 보냈는지 이해가 돼요. 인간계는 정말이지 복잡하고 기이해서…….”
황위 쟁탈전에 뛰어들고 싶지 않지만 정인을 곁에 묶어 두기 위해 지존이 된 사내.
남편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 혼인하고 싶지 않았던 여인.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 익숙하며 한없이 금욕적인 듯 보였으나, 한번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부담스러울 만큼의 애정을 퍼붓는 진이겸.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소천의 남편.
남의 남편.
“끄응.”
우희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것은 본래 아주 간단한 계획이었다. 혼백이 제자리로 돌아가기 전까지 단왕부 안팎으로 소천의 입지를 다진다. 끝.
양기 섭취는 부가적으로 따라붙은 사항이었다.
우희는 양기가 고팠다. 마침 소천의 남편 이겸이 천하제일의 양기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저기서 빼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는 상황이 아닌가.
게다가 이겸 입장에서도 손해 볼 일이 없을 듯했다. 절세미녀인 부인과 좋은 시간 보내면 좋지, 뭐. 어차피 따로 마음에 둔 정인도 없고, 앞으로도 측실을 들이지 않을 거라며.
하우희의 양기 섭취.
심소천의 지위 향상.
진이겸의 좋은 시간.
“이보다 완벽할 수가 없었는데?”
우희가 표정을 확 구겼다. 아무래도 문제는 세 번째 같았다. 우희는 양기를 성공적으로 섭취하고 있고, 단왕비는 황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소천의 친정은 이제 단왕부에 얼씬도 못 한다. 황궁과 강호의 숨은 실세가 소천을 진짜 같은 편으로 받아들였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정확히 처음의 계획대로 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이겸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긴 했다. 꽃물 들이고 입 맞출 때 좋아 죽던 그 얼굴을 보라. 아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면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구해 줄 남자처럼 보였다. 건녕각에서 혼자 그렇게 감정을 죽이던 사람이 웃는 횟수가 늘어났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지.
“결국 문제는 나네.”
우희가 하늘을 향해 울상을 지었다. 아주 오래전 사부님께 어리광을 부리던 막내로 돌아갔다.
“어떡하죠, 사부님. 진이겸의 애절한 고백을 대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려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저는 색선이고 그는 인간 사내인데? 다시 극락정으로 돌아가면 눈 깜빡하는 사이에 그는 죽을 건데?”
우희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왜 점점 진이겸에게 거짓말을 하기 어려워질까요? 적당히 회피하는 말까진 할 수 있는데, 정작 그가 듣기 원하는 말은 입 밖에 낼 수가 없어요. 전 그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거든요.”
수완 좋기로 유명한 하우희가 아니었던가. 물 흐르는 듯한 입담으로 온갖 인간과 신선, 마계 소속을 홀려왔다. 개중에 이겸처럼 진중한 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의 우희라면 이거 참 잘되었다고 기뻐할 일이건만.
“왜 없던 양심이 생긴 거죠? 왜 늘 하던 대로 먹고 튈 수가 없을까요? 도대체 어째서 진이겸의 진심을 밟기가 싫—.”
우희는 순간 놀란 나머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어서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 방금 말을 들은 인간은 없겠지? 지나가던 신선 같은 것도 없지? 인간은 그나마 괜찮아. 금방 죽으니까. 하지만 다른 색선 귀에라도 들어가면 족히 10만 년짜리 놀림거리가 된다.
우희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한동안 주변을 살폈다.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 말고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련이나 하자.”
우희가 한숨과 함께 검을 빼 들었다.
“사저가 인정한 내 촉에 따르면 왠지 조만간 극락정에서든 대사형네에서든 연락이 올 것 같거든.”
소천이 얼굴을 보고 본인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괴이한 마음도 정리가 될 듯하였다.
아, 소천이 얼굴이 아니구나. 혼백 돌려놓기 전엔 하우희의 얼굴이지.
우희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온갖 상념을 떨쳐 낼 수 있다고 믿기라도 하듯이.
“발검(拔劍).”
예나 지금이나 머리를 비우는 데엔 검 수련이 최고였다.
* * *
이제껏 어느 누구도 단왕부 호위무사 곽현의 존재감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자 오랜 수련의 결과였다. 현은 사람들의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지대로 움직이는 법과 촛불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호흡하는 법을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전 단왕비가 갑자기 주변을 둘러봤을 때도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단왕비는 모퉁이 너머의 현을 알아채지 못한 채,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아무리 봐도 기이한 검법이다.’
현은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단왕비를 지켜보았다.
‘왜 왼손을 저런 식으로 쓰는 거지? 불완전해. 초식 사이사이에 공백이 있어.’
현의 머릿속은 주인의 명이 떨어지긴 전까지는 무한히 검고 적막한 상태를 유지했다. 외부 공격에 반응하는 것은 본능이었다. 특히 적을 벨 때엔 잡념과 멀어져야 했다.
양부이자 사부였던 사람은 현의 말수 적음을 칭찬했다. 넌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은 단왕 전하께서 하시는 거라고, 넌 그분을 지키는 검으로써만 움직이면 된다고 말했다.
안 그래도 좁았던 현의 세계는 사내의 그런 양육 방식 아래 더더욱 좁아졌다. 좁아지다 못해 붙어 버린 틈은 결국 견고한 벽이 되었다. 현은 어지간해선 열리지 않는 벽 너머에서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이겸은 그런 현이 안타까웠는지 다양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려 했다. 하지만 주인이 어떤 반응을 원하는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현을 보고는, 자신의 섣부른 마음에 대해 사과했다.
그때에도 현은 고개만 숙였다. 여전히 이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불편한 상황이 끝난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원체 잠이 적은 데다 친구나 취미도 없다. 이겸은 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지 않으면 다시 부를 때까지 본인 방에서 우두커니 대기할 것을 알았다. 이에 ‘시녀들이 걷는 속도로 왕부를 한 바퀴 돈 다음 세 시진 자라.’고 명했다.
현이 걷고 있으면 간단한 부탁을 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자들이 있었다. 이겸은 그렇게 잠깐씩이라도 현이 벽 너머와 마주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불쌍해서.
안타까워서.
아껴서.
모두 하인들의 잡담에서 유추한 이겸의 마음이었다.
감정에 대해 무지하다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기에, 현은 이겸에게 ‘제가 불쌍해서 그러시는 겁니까?’ 하고 물으면 그가 힘들어할 것을 알았다. 걸음마를 할 때부터 지켜봐 온 자신의 주인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정하다. 이 역시 현의 머릿속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장륜언을 가리켜 다정하다고 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안다.
뭇사람들은 감정을 모르는 자를 딱하게 여겼다. 하나 현은 진짜 딱한 쪽이 어느 쪽인지 늘 헷갈렸다.
「네 검엔 피가 마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감정을 깨달으면 힘들어진다. 인간이 무엇에 집어삼켜지는지 아느냐? 증오와 죄책감이다. 적어도 네 앞길엔 없을 고통들이지.」
이름자도 검을 현(玄)이었다. 어둠 속에서 고요하고 평온히 지내라는 뜻을 담았다고, 사부는 말했다.
그런 현이 자의로 반응을 보이는 영역이 딱 한 가지 있었으니 바로 무예였다. 사부가 유일하게 관심을 허락한 분야다.
단왕비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현이 그녀의 새벽 수련을 지켜본 지도 벌써 한 달쯤이 되었다. 매일 비슷한 시각, 단왕비를 보고 있자니 현의 안에서 작은 의문이 움텄다.
‘누구에게서 배웠을까.’
단왕비는 이미 교재나 사부가 필요한 수준이 아니었다. 검을 뽑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수련한 무인이 그러하듯 검을 휘둘렀다.
걸음을 내딛는 방식부터 모든 것이 새롭고도 낯설었다.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 내공이 갑자기 증가했어. 안 되던 동작이 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지.’
댓잎을 닮은 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게 하루아침에 가능할 리 없는데…….’
색선이 어쩌고 하는 혼잣말은 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워낙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현이 보기에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단왕비는 그중에서도 손꼽히게 이상한 소리를 많이 했다. 심지어 혼자 있든 남과 있든 장소를 가리지도 않았다.
하긴 단왕비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현에게 중요한 것은 눈앞의 상대가 이겸을 공격할지의 여부였다. 그런 점에서 단왕비는 안심이었다.
남은 것은 역시 단왕비의 근본을 알 수 없는 검법이다.
‘자꾸, 보이지 않는 검을 세 자루 더 쓰는 것처럼—.’
다음 순간 현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엿새 전의 단왕비는 손에 쥔 검 말고도 두 자루의 검을 더 쓰는 것처럼 움직였다.
‘점점 늘어나고 있다.’
깨닫고 나니 초식 사이에 비어 있는 부분이 다르게 보였다.
‘만약 네 자루를 더 쓴다고 하면 저게 맞지. 한데…… 애초에 검을 그렇게 많이 다루는 게 가능한가?’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한 손에는 하나의 무기만 쥘 수 있다. 게다가 웬만해선 무기 하나를 제대로 쓰는 것부터 어려운 현실이었다.
‘만일 가능하다면 과연 어디까지 늘려 갈 셈인지.’
궁금했다.
한 달 전 우연히 왕비궁 뒤뜰에 발을 들인 이후로, 단왕비의 새벽 수련은 현이 기다리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그는 생전 처음 보는 검법에 주의를 완전히 빼앗겼다. 자는 시간과 산책 시간의 순서를 바꾼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현에게 왕부 산책을 지시했던 이겸은 밤이 되면 꼬박꼬박 자러 가는 호위무사를 보며 안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이겸이 가끔씩 묻는 단왕비의 행적은 낮 시간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현은 단왕비의 새벽 수련에 대해 함구했다. 이겸이 묻는다면 모두 말할 것이나 현의 주인은 아직 묻지 않았다. 굳이 단왕비에 한해서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어떤 상황에서도 현이 주인에게 먼저 입을 여는 법은 없었다.
「너는 말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왕 전하께서 하시는 것이니.」
사부의 가르침은 현의 일생을 지배했다. 현은 이내 시간의 흐름도 잊고 단왕비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데에 빠져들었다.
* * *
“마마. 왕비마마.”
시녀 상아가 우희의 얼굴 앞에서 손을 휘저었다. 몇 번의 부름에도 반응이 없자 상아는 울상이 됐다.
“마마, 눈을 뜨고 주무시는 것이옵니까?”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혼잣말하시는 걸 보면 평소와 같긴 한데.”
늘 명민한 눈을 반짝이며 시녀의 간을 졸아붙게 했던 주인이었다. 오늘은 마마께서 어떤 기상천외한 명령을 내리실까. 상아의 조그만 머리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던 주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종일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정신이 어딘가에 팔린 채였다.
“마마, 결국 존체가 축나신 건 아닌지요. 흑…… 전하께서도 참. 그렇게 물고 빨고 하시더니.”
“상아야.”
“많이 건강해지셨지만 그래도 가냘픈 여인의 몸이신걸요.”
“우리 상아가 표현력이 늘었구나.”
요즘 매화랑 붙어 다닌 영향인가. 자신의 언행은 쌀알만큼도 염두에 두지 않는 색선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생각할 게 생겨서 그러느니.”
상아가 말을 보태려 했다. 우희는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걱정 많은 시녀를 내보냈다. 목을 축일까 하여 찻주전자로 손을 뻗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상아야, 가서 자래도.”
“저는 맹아인데요?”
우희가 고개를 홱 돌렸다. 만두 머리의 맹아가 둥근 안개 속에서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