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황후의 비밀
“시작은 선황이셨습니다. 그분이 태자일 적에 도움받은 세력이 있어요. 그들 덕분에 선황께선 태자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선황께서 황위에 오르던 날, 그 세력의 수장이 말했다죠.”
이겸은 황실에서 오직 세 명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소천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폐하만 원하신다면 우리의 동맹은 계속될 수 있다고. 손을 쓰기 영 내키지 않고, 껄끄럽고, 위험한 일들을 우리 비절영에서 해결해 드리겠다고.”
“비절영.”
소천이 조그맣게 따라했다.
“예, 그게 그들의 이름입니다.”
비절영.
꺾이지 않는 그림자.
각종 문파와 세력이 활개 치는 강호에서도 비밀에 파묻혀 있는 조직이라고 했다. 조직원은 외부에 내보일 표식을 들고 다니지 않으며, 그렇다고 몸에 문신을 새기지도 않는다.
본거지라고 알려진 곳은 없다. 조직 규모를 아는 사람도 없다. 비절영 소속이거나 한때 몸담았던 인물 중에 이름이 알려진 자 또한 없다.
철저히 물밑에 은신하고 있는 존재. 그러나 강호 깊숙이 스며들어 온갖 정보를 주무르는 집단.
그들은 단순히 손에 피 묻히기를 주저 않는 자들이 아니다. 비절영은 손에 쥔 정보를 토대로 일을 꾸민다.
“선황께선 솔깃했겠죠. 황위에 오른다고 끝이 아니니까요. 비절영의 일처리를 보고 난 다음이라 더욱 그랬을 겁니다. 이에 수장이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습니다.”
소인의 어린 딸을 장차 태자의 측실로 맞아 달라.
“태자비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더군요. 높지도 낮지도 않은 후궁 지위면 족하다고. 젖먹이 때부터 고생한 딸이 궁중에서 편히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혹시 그 어린 딸이…….”
소천이 말끝을 흐렸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황후마마십니다.”
“여기까지만 들었는데도 중간에 상당히 꼬여 버린 게 느껴지네요.”
소천이 혀를 찼다. 언젠가부터 편안한 대화 상대가 된 그녀였다. 수하들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것을 소천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이겸은 그게 신기했다. 이토록 막연한 믿음의 근거는 무엇일까.
소천의 말대로 자신은 한 번 마음을 열면 전부를 갖다 바치는 인간인가? 선황과 어머니, 그리고 형과 형수를 보며 저 또한 무의식중에 그런 관계를 꿈꿨던가?
“선황께서 황위에 오른 직후에 한 제안이니까 아직 태자가 정해지기 전이죠. 근데 벌써 자기 딸을 태자 짝으로 들여 달란 거잖아요. 이 말인즉, 내 딸과 혼인하는 자가 태자가 될 것이다.”
소천이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우리 비절영은 후대에도 황실에 간섭할 거다, 이거 아닌가?”
이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아버지도 소천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
적어도 진이락과 오은, 이겸의 인생에서 소중한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어긋나지는 않았을 터다.
“선황께선 받아들이셨습니다. 태자비 자리를 요구하지 않은 게 비절영 수장의 한 수였는지 모릅니다.”
“확실히 듣는 쪽에서도 부담이 덜하죠. 선황께선 오히려 잘됐다 싶었을 수도 있겠어요. 상대의 혈육을 며느리 겸 인질로 곁에 두는 거니까.”
“게다가 외동딸이었으니 그럴싸하게 들렸을 겁니다.”
그때부터였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소녀가 가끔씩 황궁으로 찾아온 게.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소년과 소녀는 첫 만남부터 부딪쳤다. 소녀는 소년의 검 실력이 짚단 하나 못 벨 수준이라며 냉소했고, 소년은 내 검이 짚단은 못 베어도 내 명은 네 목을 벨 수 있다고 응수했다.
어린 이겸은 둘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냉기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소녀는 선황의 허락하에 모든 황자를 만나 봤습니다. 몇 년이 흘렀고,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에 두게 됐죠. 선황께서도 좋아하셨습니다. 당시 형님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이었으니까요.”
한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이겸이 무거운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자 소천이 다시금 끼어들었다.
“비절영 수장에게 꿍꿍이가 있었던 거죠?”
“왕비…….”
“이상하잖아요. 아니, 그 사람 언행은 처음부터 다 수상하다고요. 그렇게 대단한 비밀 조직이 대가 없이 황위 다툼을 도와줘요? 어린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궁중에 들여보낸다고요?”
소천은 어디서 사기를 치냐며 구시렁거렸다.
이겸은 황릉에 누워 있을 선황의 귀가 오늘따라 유난히 간지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천의 직설적인 화법은 장륜언의 독설과는 또 다른 의미로 거침이 없었다. 뒤끝이 없고 명쾌하다고 할까.
사기 친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구나.
이겸은 조용히 수긍했다. 맞는 말이었다. 표현이 좀 거칠다 뿐이지 비절영 수장이 선황에게 한 행동은 오롯이 거짓으로 점철돼 있었다.
“수장은 자신의 딸, 그러니까 지금의 황후께 진작부터 말했다고 합니다.”
이겸이 나직이 말을 이었다.
“누가 태자가 되든 상관없다. 너는 서서히 약을 먹여서 놈이 네게 의지하게 해라. 자식을 낳으면 놈을 폐인으로 만든 다음 네가 섭정태후를 하는 것이다. 황후나 다른 후궁 따윈 염려할 필요 없다. 명문가에서 곱게 자란 화초들이 널 이기겠느냐?”
소천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그거 보란 듯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짧은 한숨이 잇따랐다.
“태자만이 그녀를 가질 수 있는데, 결국 그녀는 미래의 남편을 죽여야 하는 입장이군요.”
소천이 인간계는 이래서 문제라며 고개를 저었다.
“복잡하네요.”
“그렇죠.”
“다 같이 잘살면 얼마나 좋아. 역시 일부일처의 제약은 사람을 참 옴짝달싹 못하게 해요. 아, 인간계는 여인에게만 일부일처였지.”
소천이 잊을 뻔했다는 양 입술을 작게 삐죽였다.
“복잡한 데다 불공평하기까지.”
이겸이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언제나 그랬듯 미묘하게 핵심을 빗겨 나가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칭찬인가요?”
소천이 턱을 괴며 생긋 웃었다. 실로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참으로 헷갈리는 태도였다.
이겸이 지금 고백하는 내용들은 황실의 떳떳치 못한 비밀이었다. 선대의 잘못된 결정이며, 후대의 어긋난 인연이었다.
차디차게 닫히고 비틀린 마음들을 떠올리면, 자신이 단왕부에서 보내는 무탈한 나날마저 편치 않게 느껴지곤 했다. 나 혼자만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은 자책감이 수시로 이겸의 미소를 지웠다.
한데 소천의 말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중심에서 한발 물러나 관망하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너무 중요하고 무거운 사안이라서 거리 두기가 불가능했던 것도, 소천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능했다.
나비를 쫓다 보니 어느덧 낯선 곳이었더라.
뜬금없이 떠오른 문장이 이겸의 현실과 잘 들어맞았다. 문득 소천의 주홍빛 손톱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왕비께서도 아실까요. 첫눈이 내릴 때까지 손톱의 꽃물이 남아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겸은 소천의 고운 손을 끌어다 잡았다.
“다행히 왕비의 손톱은 길군요.”
그는 자신이 물들인 손톱을 하염없이 내려다보았다.
예전엔 민간의 흔한 속설이라고 여겼다.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를 몇 개나 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겸은 네 살배기나 믿을까 말까 한 속설에라도 의지해 보고 싶었다.
형 이락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기별 없이 찾아와 형제와 시간을 보낸 오은은 언제 다시 오겠노라는 말조차 남기지 않고 홀연히 떠나곤 했다. 이겸이 잠기운 가득한 눈을 비비며 누님을 찾으면, 항상 그보다 먼저 일어나 있던 이락은 굳은 얼굴로 오은이 떠났음을 알렸다.
「겨울바람 같구나.」
아직도 기억이 난다. 늘 빈틈없던 이락이 허한 눈으로 정원을 내다보던 순간이.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아직도 이겸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확실히 오은은 겨울바람을 닮았다.
그리고 오은이 겨울바람을 닮았다면, 소천은 생기가 넘치는 봄의 산이었다. 연둣빛 잎사귀와 형형색색의 꽃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공기 중엔 신선한 흙냄새가 떠다닌다.
굽이굽이 이어진 복숭아꽃의 산길. 지저귀는 새소리. 꿈처럼 아름다운 나머지 시간의 흐름을 잊고, 결국엔 본인의 이름마저 잊게 되는 선경.
“왜 이리도…… 불안할까요.”
이겸이 소천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대와 함께 있으면 기쁘고 신기하다가도 한없이 불안해집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손을 잡고 있는데도 곁에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잠깐 눈을 뗀 사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요.”
소천이 또 특유의 얼버무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빼내려고 했다. 평소라면 놓아주겠지만 오늘만큼은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이겸은 그만큼 절박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합니다. 이 불안감의 원인이 무엇인지.”
“음, 그러게요. 보통 인간들은 애정이 깊어질수록 반대편의 감정도 자라난다고 들었는데—.”
“이질감.”
이겸이 소천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이러이러한 점이 특별해서 마음이 흔들린다는 유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제 말은, 왕비께선 여기 속하지 않은 분 같습니다.”
소천이 꼼지락대던 손을 멈추었다.
“게다가 언제든 여길 떠나실 준비가 된 듯하여…… 제 마음이 이리 불안한가 봅니다.”
소천이 눈을 옆으로 굴리는 게 보였다. 촉이 어쩌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는데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런 진중한 고백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엔 아예 능청스레 흘려버리기라도 했지만, 요즘 들어선 그조차 줄어들었다.
애매한 미소. 또 이러시네, 하는 약간의 체념. 난감한 기색.
차라리 거짓말로 상대의 장단에 맞추면 상황을 더 빨리 모면할 수 있을 텐데 소천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진이겸은 대강 둘러대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이겸은 소천의 그런 점이 좋았다.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지어내느니 어색한 순간을 견디고 마는 점이 좋았다. 웃는 얼굴 너머의 간계를 파악하느라 치열하게 수를 쓰고, 거짓에 거짓을 더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그녀는 꾸밈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천은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왜 동침을 안 하느냐고 따졌다. 수련에 필요한 양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한동안 위세준과 붙어 다니며 이겸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겸이 질투했으면 해서였다. 소천은 이 모든 것을 스스로의 입으로 털어놓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신은 소천의 허물없음을 좋아하면서도, 그녀가 한 번쯤은 달콤한 거짓말을 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저는 여길 나가면 딱히 갈 데도 없는걸요. 제 친정이 어떤 꼴인지 아시잖아요.”
“알고 있습니다.”
“한데 뭘 걱정하세요. 설마…… 단왕부 재산의 사 할 때문에? 하긴 그 정도 재물을 갖고 있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긴 하죠. 어? 표정 굳는 것 좀 봐. 에이, 그냥 해 본 말이에요. 무서운 얼굴 하지 마시고요. 전하께서만 잘하시면 되는 일이에요.”
소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불안감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소천의 손이 물고기처럼 이겸의 손안을 빠져나갔다.
“전하의 질투심도 그렇고, 수련에 대한 관심도 그렇고. 죄다 제가 유발한 거니까?”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얄밉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간질간질한 얄미움을 압도하는 애정이 무엇인지도 알 것 같았다.
이겸은 방금 전까지 소천의 손이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며 조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본왕이 잘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이겸이 물었다.
“본왕은 이제껏 노력 면에서 누군가에게 져 본 적이 없는데.”
“왠지 웃음이 오싹하시네요, 전하.”
소천이 상체를 뒤로 물리며 말했다.
“재능으로 져 본 적 없으신 게 아니고요?”
“정정하죠. 노력이든 재능이든 져 본 기억이 없는 듯합니다.”
“저 초연한 자신감.”
소천이 눈을 흘겼다.
“정적들이 왜 전하를 미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아요. 공감한다는 건 아니에요. 근데 어떤 맥락인지 이해는 가요.”
소천은 그 말을 끝으로 황후의 선물을 다시금 요리조리 살폈다. 설명을 듣고 나면 웬만한 사람은 손조차 닿기 싫어하는 끔찍한 극독인데도 소천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다만 어쨌든 황후마마의 성의니 감사히 받아야겠죠.”
이겸은 전하의 열 손가락에도 꽃물을 들이고 말겠다며 벼르던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이제 왕비의 손이 자유로워지셨으니 보복하실 차례가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아……. 생각해 봤는데 전하께선 지금 이대로가 더 보기 좋으세요.”
내심 기대했던 이겸은 예상대로의 반응에 조용히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