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아기를 낳고 싶으세요?
우리가 나눈 이야기 중에서 그게 제일 내 관심사 밖인데, 하필 그걸 콕 짚네.
우희는 차를 홀짝였다.
회임은 선계에서 도통 접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선의 몸은 인간과 달라서 무작정 남녀가 합방한다고 아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계와 달리 여선(女仙)들은 달거리를 하지 않았고 회임의 걱정에서 자유로웠다.
그럼 아이를 가지고 싶은 자들은 어찌 하느냐?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선인이 될 기질이 있는 인간아이를 제자로 삼곤 했다.
자신의 몸을 통해 직접 낳고 싶은 경우에는 순서가 좀 더 까다로웠다. 백 일간 심신을 깨끗이 한 다음에 출생을 담당하는 선관(仙官)에게 청을 넣어야 했다.
답이 올 때까지 또다시 백 일이 걸리며,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청을 넣는 덴 남녀가 무관했다. 한마디로 합방과 출산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회임해도 좋다는 답신은 빨간 열매와 함께 오는데, 즙이 많고 새콤한 열매를 삼키면 그날로 배 속에 아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남의 열매를 빼앗아 삼킨다고 본인이 회임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인간계처럼 남의 음식에 몰래 섞어 먹이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선계의 회임은 간절히 원하는 자만이 하는 것이었다. 모처에 사는 모 신선이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세상 끝자락의 신선도 축하 선물을 보내는 까닭이 여기 있었다.
우희는 1만 년 전에 인간의 육신을 버리면서 새로 태어났다. 막내가 인간일 적부터 진귀한 약초는 죄다 끓여 먹인 대사형 덕분에 신선으로서 우희의 몸 상태는 최상이었다. 월경통이 어떤 감각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시녀 중에 달거리만 시작하면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침상을 못 떠나는 아이들이 있는데, 우희는 처음에 그들이 극독에 당한 줄 알았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지금 인간계 여인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1만 년이 지날 동안 인간들은 대체 뭘 한 거지? 황도 번화가가 그렇게나 화려하고, 자고 일어나면 외국 문물이 유행하는 시점에 아직도 이 짓을 버티게 한단 말이야?’
그 와중에 두 번째로 다행인 점은 섬약한 심소천이 희한하게도 월경통을 거의 겪지 않는 몸이란 것이었다.
몇 달간 소천의 몸으로 살아 보니 알 수 있었다. 왕부의 다른 여인들과 비교해 봐도, 그리고 우희 본인이 느끼기에도 축축한 천 뭉치를 깔고 앉은 기분만 빼면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선(善)을 행하는 데에 따르는 아주 작은…… 작지만 끔찍한 무언가라고 해 두자. 음, 음, 그래. 이 몸은 극락정의 우희 선자니까.’
참을 수 있다.
참아야 하고.
문득 단왕비의 주기를 기록하는 시녀 매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매화가 열심히 뭔가를 적고 있어서 물었더니 단왕비의 달거리를 기록 중이었다.
야무진 매화는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전하와 마마의 사이가 점점 가까워지시니 이런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속삭였다.
「마마께선 주기도 일정하시고 통증도 거의 없으시지요. 제가 듣기로 이런 몸이 회임하기에 가장 좋다고 하옵니다.」
당시만 해도 우희는 가볍게 웃고 넘겼다. 남의 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주기니 회임이니 모두 낯설기만 했다.
‘그래도 소천이 동의 없이 회임까지는 안 된다 싶어서 몰래 약을 구해 놨건만.’
우희는 옆에 앉아 있는 이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혹시 자네, 자녀 욕심이 있으신지?’
포도넝쿨처럼 주렁주렁 낳을 계획이라면 미리 언질을 주면 좋겠다. 그래야 소천이에게 이 혼인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귀띔할 수 있으니까. 내공이 쌓임에 따라 심소천의 육신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지만 출산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전하, 뜬금없지만 한 가지 알려 드릴게요. 선계에선 사내도 회임이 가능하답니다. 굉장하지 않나요?”
우희가 열의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아기를 낳고 싶으면 그냥 본인이 낳으면 돼요. 굳이 상대를 찾아서 혼인을 할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소위 왕부의 대를 잇는다는 명목으로 소천이 고생시키면 재미없을 줄 알라는 게 우희의 뜻이었다. 네가 낳지도 않을 거면서 입만 나불대면 곤란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말 뜬금없긴 하군요.”
그는 이제 우희가 어떤 희한한 말을 해도 출처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만으로도 선계를 왜 선계라고 부르는지 알겠습니다. 왕비께서 도교에 관심을 보이시는 까닭도요.”
이겸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본왕까지 마음이 흔들리는 이야기네요.”
“아기를 낳고 싶으세요?”
우희가 저도 모르게 이겸의 배를 쳐다봤다. 10대부터 전장을 누빈 탓에 그의 몸엔 상흔이 가득하다고 들었다. 물론 우희가 틈틈이 옷 위로 만져 본 바에 따르면 근육도 가득했다.
이겸이 고개를 짧게 저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본왕은 후사를 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 전하의 마음까지 흔들린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었죠?”
“도교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만.”
우희는 정갈하면서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왕비궁을 슥 둘러본 다음 물었다.
봉무국 전체에 퍼져 있을 단왕부의 토지, 저택, 상가와 창고들. 넘쳐나는 보물과 보물만큼 귀한 인맥.
인간계의 부귀영화는 아이를 통해 대물림된다. 첩실까지 들여 가며 아이를 낳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지킬 재산이 많은 자일수록 후사를 보는 일에 연연한다.
외부에 빼앗겨선 안 돼. 자식이 없으면 나 죽은 후에 사돈의 팔촌의 노비까지 달려와서 이 빠진 그릇 하나 안 남기고 쓸어갈 거라고!
시골 논밭을 조금 갖고 있는 자들도 그러거늘 하물며 단왕부는 어떨까.
“이후에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단왕부는 사라지는 건가요?”
단왕의 앞에서 그의 죽음을 입에 담는 이는 흔치 않았다. 이겸은 황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는 권력자이자 피로 맺어진 형제다. 게다가 직접 군대를 끌고 출정하는 무장이기도 하다. 백전무패로 유명하긴 해도 어쨌든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런 이겸에게 감히 사후를 운운했다가 어찌 뒷감당을 하려고?
이겸의 죽음은 곧 봉무국의 대들보가 뽑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입에 칼을 문 책사 장륜언이나 가능하지, 이외의 사람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우희는 이 모든 사정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알기 때문에 묻는다는 말이 정확할 터다.
당신이 후사 없이 죽으면 단왕부의 재산이 뿔뿔이 흩어질 텐데? 몽땅 황실에 바친다는 유서를 쓰기라도 할 건지? 무엇보다 장륜언이 그 꼴을 두 눈 뜨고 지켜볼까?
이에 이겸이 슬며시 웃었다.
“반드시 본왕의 핏줄임을 고집하지 않는다면 후계 문제는 해결됩니다. 장 책사는 위 장군의 가문에서 아이를 데려오라고 권하더군요. 본인도 제자를 키워서 후대의 구도를 잡겠다나요.”
이겸은 갑자기 지필묵을 찾는 우희를 쳐다봤다.
“한데 왕비께선 왜…….”
“각서 남기려고요. 지금 하신 말씀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쓰시기예요.”
소천아, 보고 있느냐. 이렇듯 중요한 말은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법. 나중에 이겸이 말 바꿀 때를 대비하여 몇 가지 조항도 추가할 것이다. 약조를 어길 시 단왕부 재산을 떼어 달라고 말이다. 여기는 인간계 한복판이니 선계와는 철저히 다른 식으로 행동해야 마땅했다.
지장 찍을 인주까지 챙기는 우희를 아연히 보던 이겸이 상대의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혼인 초야에도 말씀드렸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응, 뭐가요?”
“앞으로 왕비께서 회임으로 힘드실 일은 없을 거라고요.”
우희가 모든 행동을 일시에 멈췄다. 그가 혼인 초야부터 말했다면 소천은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단왕비는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된다.
우희가 생각하기에 이는 썩 괜찮은 듯 들렸다. 회임을 안 해도 되는 것은 몸이 힘들지 않다는 말과 같은 뜻이니까.
위 장군 집에서 아이를 데려오는 방법도 마음에 들었다. 이겸의 주변에서 그 집안이 제일 멀쩡하고 안전하다. 여기서 멀쩡하다는 건 여러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압박 심한 가문에서 키워진 소천이 이겸의 말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였을지에 대해선 우희와 이겸 둘 다 확신이 없었다. 소천은 이를 다행이라고 여겼을까, 아니면 고개 들지 못할 수치라고 생각했을까.
“혼인 초야……는 너무 오래전이지 않나요. 사고 이후로는 예전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우희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들고 있던 인주며 붓을 이겸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장 듣기엔 그럴싸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 생각이 없다는 거. 그렇지만 1만 년 전에도 구두계약은 효력이 없었다. 소천의 뜻이 다르다면 나중에 교섭을 시도해 보겠다만, 지금으로썬 무조건 증서를 남겨 놔야 했다.
이겸은 달필로 써 내려가는 우희를 지켜보았다. 아내가 자기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단 사실을 이제 알았겠지.
“내용 확인하시고요. 아래쪽에 이름 쓰고 지장 찍으세요.”
이겸이 각서를 쭉 읽어 내렸다. 마지막 조항에 다다르자 잘생긴 눈썹이 위로 살짝 움직였다.
“왕비께선 단왕부 총 재산의 사 할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흥미로운 질문이구나. 넌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니?
우희가 생긋 웃었다.
“글쎄요. 그건 받아 보면 알게 되겠죠?”
우희는 빨간 인주를 이겸 쪽으로 밀며 말을 이었다.
“그 조항을 쓸 일이 없길 바랄게요.”
이겸이 다시 한 번 각서 내용을 보다가 웃음을 삼켰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버티나 싶었는데 우희가 시킨 것들을 마친 후 돌려주었다.
‘좋아. 장륜언이 알면 펄펄 뛰겠군. 요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며 날 죽일 방법을 찾으려나.’
우희가 귀중한 각서를 잘 챙기며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재밌겠어.’
그때 이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조그만 함이었다. 이겸이 여인이었다면 거기에 입술 연지를 덜어 놓았을 것이다. 하나 이겸이 뚜껑을 연 그곳엔 새끼손톱만 한 환약들이 있었다.
“본왕이 복용 중인 피임환입니다.”
우희의 시선이 환약에서 이겸에게로 옮겨 갔다. 그는 어느새 웃음기 거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왕비께서 이리 본왕을 못 미더워하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말로만 하는 약조는 누군들 못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자신은 모월 모일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먹고 있다고 말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왕비께선 정말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왕비께 진심이 된 지금은 더더욱…….”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입을 뗐다.
“그대를 절대 잃지 않을 겁니다.”
이쯤 되니 우희는 궁금해졌다. 세상에 어느 사내가 피임환을 먼저 챙겨 먹는단 말인가. 이렇게나 회임을 피하려는 이유는 또 뭐고.
우희는 이겸을 지그시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혹시 봉무국 황실에 치명적인 유전병이 있나?
“그런 이유는 아닙니다.”
이겸이 마치 우희의 머릿속을 읽은 양 대답했다.
“폐하와 저는, 사내의 총애가 여인을 회임시키고 또 회임시키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겸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실 제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이겸의 친모.
우희는 그녀가 입궁한 이후로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은 여인이라 알고 있었다. 이겸이 자신에게 하는 다정한 행동은 그냥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머리를 빗겨 주거나, 장신구를 고르고,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행동들은 모두 부모를 보고 배운 것이라 들었다.
한데 저번에도 느낀 바지만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마다 이겸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리움을 뛰어넘는 어둠이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그러시더군요. 아내 면전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너무 자주 하는 사내는 꼴불견이라고요. 특히 너희 형제는 중증이니, 설명 한 번으로 끝내라고 하셨습니다.”
봉무국 황실 여인들은 어쩜 이리 색선의 취향과 맞아떨어질까. 우희는 황후와 만날 날이 내심 기대가 되었다.
“본왕의 기억 속 어머니의 배는 늘 부풀어 있었습니다. 꺼질 만하면 다시 부풀었죠. 배가 부르기 전에 유산한 적도 많다는 건 나중에 알았습니다. 보통 그걸 두고 황은(皇恩)이 넘친다고 하지만 폐하와 저는 동의할 수 없었어요.”
이겸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무리 황궁이어도 출산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거나 잃을 때마다 어머니는 핼쑥해지셨어요. 그런데도 선황께선 계속 어머니를 찾으셨죠.”
“그는 황제니까요.”
“그렇죠. 황제는 무릇 자손을 많이 남겨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이겸 형제가 황위 다툼에 뛰어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라고 했다.
“그런데 폐하께선 지금의 폐하가 되셨잖아요?”
우희의 말에 이겸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