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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35화 (35/100)

35화. 지금 저보고 자결하란 뜻?

“독이라고요?”

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럼 마개는 왜 열어서 냄새를 맡게 했느냔 말이다. 꺼내기 전에 미리 경고를 해 줬어야지. 자칫하면 우리 소천이 육신이 위험하다고.

한발 늦은 후회와 화가 치밀었다. 우희는 호리병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독 주제에 향기는 왜 이렇게 좋은 건데요. 잠깐, 나 방금 냄새도 맡았는데.”

우희가 눈을 치켜떴다.

“근데 황후께서 저한테 보낸 선물이라면서요. 지금 저보고 자결하란 뜻?”

우희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한 편의 치정극이 그려졌다.

황제, 황후, 이겸은 어릴 때부터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다. 한데 이 가깝다는 게 평범한 우애를 뜻하는 게 아니라면? 작대기를 온갖 방향으로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황후의 진짜 마음은 이겸을 향하지만 선황의 명에 따라 지금의 황제와 혼인했을 수 있다. 어쩌면 황제 부부는 서로 애정이 두텁고, 이겸이 어릴 적부터 혼자 황후를 향한 연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게 도박판이었다면 우희는 황후와 이겸의 종목에 전낭을 걸었을 것이다.

황후가 이겸을 짝사랑하든, 이겸이 과거에 황후를 짝사랑했든, 아니면 쌍방이 좋아했든 간에 분명히 그들에겐 숨겨진 사연이 있었다.

우희가 그렇게 믿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진이겸은 연상의 여인과 잘 엮일 유형 같거든. 그것도 배포가 좀 큰 데다, 대하기가 쉽지 않은 연상을 좋아할 듯하단 말이지.’

마치 하우희에 대한 설명 같지만 이는 동시에 황후를 가리키기도 했다.

우희는 황궁 연회 때 잠깐 본 황후를 떠올렸다. 그녀는 황제의 옆에 앉아 시종일관 자애로운 미소를 띠었으나 묘하게 만만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금 귀비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진이겸 자체도…… 유독 연상의 눈길을 끄는 면이 있다고나 할까. 아주 야릇한 매력이 있어.’

이겸은 기대고 싶게 만드는 한편 그 깊은 쓸쓸함을 위로해 주고 싶게도 했다. 아무도 발길하지 않는 건녕각에서 조용히 감정을 다스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단순히 냄새 맡는 거로는 죽지 않는 모양이네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이겸이 마개를 닫았다. 우희는 독을 건네준다고 그걸 또 냉큼 받아 온 상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희는 독초나 약초에 해박하지는 않으나 인간계의 치열한 후궁 생활에 대해 몇 가지 들은 바가 있었다.

“사향을 섞었구나? 장기간 몸에 가까이하면 회임이 안 된다잖아요.”

사향이네. 사향이야.

우희는 확신했다. 능력 좋은 사내와 혼인하는 것이 1차 관문이라면, 아이를 낳아 안주인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 인간계 여인들의 2차 관문이었다.

민가에서도 그럴진대 왕부는 어떨 것이며 내 아이가 다음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후궁은 어떻겠는가.

먹자마자 피 토하는 극독을 다른 후궁에게 썼다간 되레 황제 시살의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나치게 극적이었다. 무릇 궁중에서 서로를 해하는 일은 은밀하고 조용히 진행되어야 하는 법이므로.

그런 까닭에 사향은 궁중 여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고 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데다가, 나중에 발각되어도 거기 사향이 들어 있는 줄 몰랐다며 무지를 주장하기에 좋았다. 정적의 복중 태아는 이미 사라진 다음이다.

“사향은 사람을 죽일 수 없죠. 하지만 이 향유는 단 두 방울로 상대의 목숨을 끊을 수 있습니다.”

우희가 이겸의 설명에 다시금 호리병을 쳐다보았다.

“두 방울로 죽일 수 있다면, 한 방울은요?”

이겸이 차분히 답했다.

“차라리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겠죠.”

“일단 목숨이 붙어 있다면 의원을 부를 텐데요?”

“웬만큼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서야 보통의 의원은 원인을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진통제나 처방할 뿐.”

이겸이 잠깐 틈을 두었다가 말했다.

“이건 강호에서 쓰는 물건이거든요. 그것도 아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 비기(秘器)입니다.”

다음에 이어질 대화가 어떨지 두 사람 모두 예측이 가능했다. 아마 우희는 ‘황후께선 어쩌다가 그런 물건을 갖고 계시느냐.’고 물을 것이며 이겸은 이에 대한 설명을 들려줄 터다.

그런 순간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의 심중을 파악하는 순간. 그래서 우희는 질문을 건너뛰었다. 이겸은 바로 설명을 이어 갔다. 서로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순간이 요즘 들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떠올리면서.

“황후마마께선 이를 호신용으로 주신 겁니다. 갖고 계시다가 왕비께서 필요하실 때 쓰십시오.”

“와, 매번 느끼는 바지만 인간계 생활은 정말 쉽지가 않아요. 황후가 동서에게 강호의 독약을 선물로 주다니. 우리 부부가 혼인한 지 3년이나 된 지금이야 말이에요.”

“그건 아마…….”

이겸이 호리병을 건네주며 말끝을 흐렸다.

“본왕이 그대를 아낀다는 소문이 올봄부터 퍼져서일 겁니다. 그 마음이 진정이냐는 하문을, 오늘 듣기도 했고요.”

황후의 질문에 이겸이 어떻게 대답했을지는 안 들어도 빤했다. 우희가 궁금한 쪽은 질문자였다.

“황후께서 이걸 호신용으로 주셨다고 어찌 확신하세요? 전하께서 알려 주시지 않았으면 전 백이면 백, 이거 먹고 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거예요.”

최소한 심소천은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우희는 왕부에 있는 동안 이겸의 경각심을 자주 일깨워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섬세한 소천이 입장도 고려를 하라고. 우리 형이, 우리 형수가, 우리 아무개가 그럴 리 없는데, 라는 썩은 생각 자체를 못하도록 만들어야겠어.

하늘이 무너져도 진이겸은 아내의 편을 들어야 했다. 이것이 우희의 목표였다.

한편 이겸은 저번부터 왜 왕비가 형수를 신경 쓰는지 의아한 눈치였다. 그러다가 우희의 이번 질문을 듣고 깨달은 듯했다.

“폐하와 저의 나이 차가 몇 살인지 아십니까?”

우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될지 잠시 고민했다. 이거 웃어도 되나? 황제 부부는 동갑이라고 들었다. 이겸은 형의 나이를 언급하는 것으로 황후와 자신의 나이 차를 에둘러 강조하려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일곱 살 차이가 어때서? 인간님, 인간님, 인간계 최고의 양기 보유자님. 그대와 내 나이 차는 1만 년인 거 아세요?

“본왕이 열 살일 적에 그분들은 열일곱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다 같은 성인이지만, 당시의 차이는 대단했지요. 저는 폐하와 마마의…… 말귀 잘 알아듣는 어린 동생이었답니다.”

이겸이 오랜 기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분의 관계는 공고합니다. 폐하의 진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후마마뿐이며, 금 귀비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마마의 자리를 넘볼 순 없습니다.”

“그럼 황후마마의 진심은요?”

우희가 물었다.

“폐하의 진심이 황후궁을 향한다면, 마마의 진심도 대전을 향하나요?”

이겸이 주춤했다. 역시 감춰진 사연이 있다고밖에 의심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그게 문제입니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께서도 폐하를 사랑하시는 것이요.”

은근 기대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서로 얽히고설킨 치정극은 우희를 객석에 버려둔 채 막을 내렸다.

부부가 사랑하는 게 뭐가 문제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호리병을 옆에 내려놓은 우희는 지난번 금 귀비의 말을 떠올렸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원망 또한 깊어지니 결국에 무너지는 건 너다.」

궁중 여인이란 황제의 총애를 얻으려고 노력하되, 황제를 사랑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를 사내로서 마음에 품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지기 시작한다고.

금 귀비는 황제를 연모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우희의 눈에도 금 귀비는 그런 듯 보였다.

한데 황후는 황제를 사랑한단다.

우희는 넓디넓은 후궁을 가득 채운 미인들을 떠올렸다.

“황후마마의 과거는 이 독약만큼이나 비밀에 싸여 있습니다. 어느 고관대작도 그분의 진짜 출신을 모릅니다. 선황의 친우의 딸이라고만 알고 있죠.”

이겸이 말을 하다말고 우희를 쳐다봤다.

“왕비, 왜 갑자기 향유 냄새를 맡으십니까?”

우희는 다시 호리병에 코를 묻고 감각을 집중시켰다. 우희가 맡으려는 건 향유 냄새가 아니었다. 어차피 마개는 닫힌 상태였다.

우희가 궁금한 건,

“아주…… 아주 옅은…….”

따로 있었다.

“피 냄새가 나네요.”

이겸의 미간이 흐려졌다. 그는 아무리 코를 갖다 대도 화사한 꽃향기밖에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선은 다르다. 신선들은 피에 민감하다. 전쟁터처럼 인간의 피가 사방에 뿌려진 곳에 가면 눈앞이 아찔해지곤 한다.

이겸은 무장이지만 가장 가까운 전투는 4년여 전이라고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육의 냄새는 조금씩 옅어진다. 지금 이겸에게선 청량한 향기만이 배어났다. 약간의 먹 냄새도 맡아졌다.

그런데 황후의 몸도 아니고, 그녀의 손길이 잠깐 닿았을 뿐인 물건에서 피 냄새가 느껴지다니?

심소천의 육신을 쓰고 있어도 우희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손에 직접 피를 묻힌 자만이 낼 수 있는 혈 향이었다. 이렇게 되려면 상당히 많은 피를 묻혀야 할 것이다. 상당히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말이다.

“혹시 황후께선 살생을 일삼으시나요?”

우희가 이겸을 향해 물었다. 이건 뭐, 오래도록 자녀 없는 사정을 딱하게 여긴 이가 민망해질 수준이었다.

지금이라도 금 귀비에게 귀띔해 줄까. 차기 황후 자리를 노릴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당신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이 사실을 모르니까 매일 밤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거라고.

이 나라의 황후는 살수(殺手)다. 정식으로 명을 받은 무장이 아니라 야음을 틈타 상대의 명줄을 끊는 자객이었다.

황후의 나이는 금년으로 서른하나. 이겸처럼 대규모 전쟁에 참가한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이리 젊은 나이에 짙은 피비린내를 풍길 수 있는 걸까.

‘황제는 또 그런 사람을 좋아하나 봐. 하여튼 형제가…… 희한해.’

이겸이 우희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수의 비밀을 어찌 알았느냐고 물을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죽기 전에 죽여야 내일 해를 볼 수 있죠. 그런 점에서 강호와 황궁과 전장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 * *

시녀가 차를 내왔다. 이겸이 방에 들어온 지 꽤 되었는데 이제야 차가 나오다니. 아마 그가 들어오기 전에 따로 명을 내린 모양이다.

우희는 탐스런 꽃송이를 그대로 넣어 만든 얼음 조각을 후후 불었다. 여름에 얼음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굉장하건만, 단왕부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생화를 넣은 얼음을 쓰고 있었다.

이겸은 검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나 그것도 이겸의 높은 지위에 비해 검소한 것일 뿐이다. 단왕부에서는 가장 어린 하인도 매끼 고기를 먹고 계절별로 좋은 옷을 몇 벌씩 갖춘 채 지냈다. 주인을 직접 모시는 시녀들의 귓불엔 은으로 세공한 진주귀고리가 달랑거렸다.

‘탄광에서 노역 중인 죄수 몸에 들어간 것보다야 백배천배 낫긴 해.’

우희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자와 영혼이 바뀌었다면 당장 그날 저녁에 죽었을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히도 심소천은 왕비였다. 남편과 이야기도 길게 나누지 않는 사이지만, 그 남편이란 자가 기본적인 도의를 아는 까닭에 의원과 시녀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눈을 뜰 수 있었다. 몸을 혹사하지 않아도 되는 왕비인 덕분에 우희가 여유롭게 내공을 쌓는 게 가능했다.

‘운이 좋아.’

우희는 다시 한 번 인정했다.

‘소천아, 바뀐 몸의 주인이 서로여서 다행이구나. 나는 양기 꽃밭에서 너의 입지를 대신 다져 줄 수 있고, 지금 네 주변엔 느긋한 맹아와 내 제자들뿐이니 마음이 한결 편할 터.’

인간들이 괜히 선계를 꿈꾸는 게 아니었다. 극락정의 정자에 비스듬히 누워 절벽을 휘감는 운무(雲霧)를 보고 있으면 끔찍한 불안에 떨던 이들도 어느새 긴장을 스르르 풀게 되었다.

보나마나 빤했다. 정신을 차린 소천은 대역죄라도 진 것처럼 파들파들 떨 테고, 맹아는 별일 아니라며 천하태평하게 밥을 지으러 갈 것이다. 10제자들이 하나둘씩 찾아와서 극락정 구경을 시켜 주고 초조함을 가라앉히는 약차를 끓여 줄 것이다.

소천은 난생처음으로 숨을 쉰다는 게 무엇인지 경험할 것이다.

‘좋은 일이지. 이 또한 인연이겠지. 한데…… 소천이는 그렇다 쳐도 너희까지 마냥 태평해선 안 될 텐데?’

돌아가면 간만에 기강을 바로 세워야겠다고 다짐하는 우희였다. 그 사부에 그 제자라고, 극락정 소속들은 느긋한 선계에서도 제일 느긋한 축에 속했다.

“왕비, 아까 말씀하신 것 중에 잠시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는데 말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우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겸이 그녀를 보며 조용히 운을 떼었다.

“회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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