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저는 요녀가 아닌데 전하는
“본왕의 처소에 오신 것은 실로 오랜만이십니다. 장경루에서 책도 읽으시고, 훈련장에도 얼굴을 비치시고, 호위병과 왕부 담장도 넘으셨다지요. 그토록 바쁘셨으니 한 번도 여기 오시지 못한 게 이해됩니다.”
“말에 뼈가 있으시네요, 전하.”
“뼈만 있다 뿐이겠습니까. 미련과 원망이 넘쳐흘러 연못까지 다다른걸요.”
우희가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이겸은 여전히 군침이 돌게 잘생겼다. 은실로 수를 놓은 연녹색 옷이 싱그러운 계절감을 드러냈다.
우희는 ‘보고 싶은 쪽이 먼저 찾아 와야 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이겸이 몇 번이나 왕비궁에 들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희는 목욕 중이라느니 피곤하다느니 같은 핑계를 대며 이겸을 돌려보냈다.
새로 생긴 악취미이려나. 이겸을 낙담시키는 게 재미있었다. 다른 사내를 놀리는 재미와는 또 달랐다. 장륜언을 자극하면 독전갈처럼 파르르 떨고, 위세준을 놀리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요즘 강하게 키우는 중인 뱁새는 자꾸 자신의 잘못을 알려 달라고 빈다. 이처럼 저마다 예상되는 반응이 있었다.
한데 이겸은 신기했다. 왕비마마께선 오늘 쉬고 싶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살짝 미간을 찡그리는 반응은 진짜였다. 고요한 호수의 수면에 파문이 이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미세하지만 확실한 균열이 흥미로워서 조금만 더 들여다볼라치면 이겸은 어느새 감정을 다스린 뒤 몸을 돌렸다. 그는 어떠한 격정도 심호흡 한두 번 하는 동안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다.
‘능숙하게 버티니까 오히려 더 자극하고 싶잖아. 감질 맛이 난다고나 할까.’
하지만 알다가도 모를 게 사람의 속내라고 하던가. 마냥 대단한 절제력이라고 감탄하기엔 지금 우희가 보고 있는 작품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저렇게 인간사를 초월한 듯 청량한 얼굴로 미련과 원망이 넘쳐흐른다고 말하다니.’
하긴 정예병들 복장 단속한 일이며, 보란 듯이 서문우란 시집을 필사한 일 등 은은한 집착의 전조가 보이긴 했다. 평온한 얼굴과 너무 들어맞지 않아서 그렇지.
“저도 제가 불세출의 미인임을 잘 알고요. 찬탄 받는 걸 즐기기도 하지만요. 전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인상적입니까?”
“광적이네요.”
우희가 전각 안을 천천히 돌아 나무 궤짝 앞까지 왔다. 발끝으로 궤짝을 가볍게 치며 물었다.
“혹시 이 안에도 비슷한 물건이 들어 있나요?”
“그럼요.”
직접 궤짝을 열어 보여 줄 기세이기에 우희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벽에 걸려 있는 것들로도 충분했다.
“전하, 저는 이해가 잘 안 가서요. 제 초상화를 갖고 싶으면 그냥 화공을 부르시지 황도 전역에 소문을 낼 필요가 있나요?”
“미끼 하나로 물고기 두 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왕비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우희가 명쾌하게 답했다.
“상황을 봐야죠. 제가 많이 배고픈 상황이면 두 마리를 잡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 마리로도 족해요.”
“명명백백히 두 마리를 잡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까?”
“네.”
왜냐면 난 신선이거든. 자고로 선인은 불필요한 살생을 삼가는 법. 1만 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명의 목숨도 빼앗지 않은 전력은 색선 하우희의 자부심이라 할 만했다.
물론 이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우희가 부채를 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하긴 단왕비 심소천이 유명세를 얻을수록 전하의 정적들이 절 건드리기 힘들어지겠죠. 그렇다면 유명세를 어떻게 얻느냐. 예로부터 검증받은 방법 중에 절세미인이라고 소문내는 게 있는데 마침 제가 또 절세미인이네요.”
우희는 부채 끝으로 턱을 도도하게 들어 올렸다.
“하나 제 신분이 왕비인데 여기 좀 보라며 대로를 활보할 순 없는 노릇이죠. 어머, 그런데 화공 한 명만 수배하면 일이 술술 풀리겠네?”
우희의 시선이 가장 좋은 자리에 걸려 있는 선녀도에 가 닿았다. 북당이 전심전력을 다해 완성했고, 공개 이후로 행방을 밝힐 수 없다며 입을 다문 그림은 단왕의 휴게실 전각 중앙에 걸려 있었다.
화공이 온갖 회유에도 그림을 팔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이미 주문제작 받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보기엔 좋은데 이렇듯 볕 잘 드는 곳에 놔두면 그림이 빨리 상해요.”
우희가 선녀도를 쳐다보며 말하자 이겸이 옆으로 다가섰다. 그 역시 선녀도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본왕도 압니다. 하지만 정말 보기가 좋아서요. 이대로 이틀만 더 뒀다가 보관실로 옮길 겁니다.”
“전하.”
“예?”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희가 흘겨보는데도 이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으로 마주 볼 뿐.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지금 살짝 웃고 있네. 무표정일 땐 돌망치로도 흠집 낼 수 없을 만큼 고결하고 단단한 느낌인데 약간이라도 웃으면 인상이 완전히 바뀌는군.
황궁 연회 때 연기하던 게 떠올랐다. 연기 중임을 알고 있던 우희조차 잠깐 미혹될 정도로 이겸의 두 눈 가득 꿀이 넘쳐흘렀었다.
낙담시키는 것도 재밌지만 다시 그날처럼 웃게 만들어도 볼만하겠어.
“어찌 불러 놓고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겸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그윽해졌다. 상체가 우희 쪽으로 기운 것도 같았다.
“왕비.”
우희는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을 가리듯이 열 손가락을 펴 보였다. 부채는 그새 허리띠에 꽂은 뒤였다. 색선의 자질 중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손이 빨라야 된다는 것이다.
“혼인생활에 거는 기대가 크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부인 초상화 주문제작까지 포함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어요. 심지어 그것들로 넓은 전각을 가득 채우다니. 소천, 압도감에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손가락에 그의 입술이 닿겠다 싶어 우희는 손가락을 부채처럼 나풀대었다.
“우리 조금 더 정상적인 활동을 해 보죠. 일전에 전하께서 해 보고 싶다던 걸 지금 하는 건 어떨까요?”
“양기—.”
“손톱에 꽃물 들이기.”
우희가 냉큼 대답을 가로챘다. 이겸은 둘 사이에서 열심히 나부끼는 손가락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도 미간이 좁혀 들긴 했지만 왕비궁에서 내소박 맞았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어쨌든 지금은 우희와 함께인 것이다.
“뭐, 바쁘시면 할 수 없고요.”
“좋습니다.”
이겸이 대답과 동시에 손깍지를 꼈다. 그는 꽃잎을 따러 가는 내내 맞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 *
“손톱이 좀 간지러운데요. 제대로 하신 거 맞아요?”
우희가 잎사귀로 감싼 손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니지만 은근히 간지러운 기분이 이상했다. 열 손가락에 무언가를 둘둘 감아 놓으니 움직임이 부자유스러운 점도 불만이었다.
색선은 손이 빨라야 되는데.
마지막 손가락의 작업을 마무리한 이겸이 오히려 몰랐냐는 듯 되물었다.
“제대로 했으니까 간지러우신 겁니다. 이대로 하룻밤은 보내셔야 됩니다만.”
“하룻밤이나요?”
“많이 불편하십니까?”
이겸이 우희의 부채를 가져다가 손가락에 대고 바람을 쐬어 주었다. 부드러운 미풍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이러면 좀 어떤가요?”
“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손을 못 쓰는 채로 하루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우희는 마뜩잖은 기분이 되었다. 이겸이 길고 깨끗한 손가락으로 빨간 꽃잎을 따고, 빻고, 섬세하게 매듭 묶는 과정을 보는 건 재밌었지만 이제 그런 즐거움도 끝났다.
인간계는 손톱에 물들이는 것도 참 번거롭네. 도력만 있으면 하루에 손톱 색을 열두 번도 바꿀 수 있는데.
“이러면요?”
이겸이 부채를 좀 더 세게 부쳤다. 우희의 손 위로 시원한 바람이 쏟아졌다. 나는 좋지만 곧 전하의 팔이 아파지지 않겠냐고 했더니 이겸이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며 엷게 웃었다.
“과정은 눈여겨봐 놨어요. 내일은 제가 복수할 차례예요. 이렇게 간지럽고 불편한 일이라고 미리 알려 주지 않으셨으니 전 부채는 부쳐 드리지 않을래요.”
“그러십시오.”
이겸이 선선히 대답했다. 우희가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해도 그러라고 할 분위기라 이 사내의 앞날이 퍽 걱정스러워졌다.
“……정말 하실 거예요? 새끼손톱만 아니라 열 손가락에 다 할 건데? 전하께서 손톱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 장 책사가 뒷목 잡고 넘어갈 거예요.”
“그야말로 왕비께서 바라시던 상황이 아닙니까. 그이 괴롭히는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물론!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시인했을 뿐인데 이겸의 입매가 단단해졌다.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 놓고 말이다.
“전하, 원래 이런 분이셨어요?”
이겸이 무슨 뜻이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원래 이렇게 한 번 마음을 열면 막, 애정공세를 퍼붓는 분이세요?”
잠깐 멈췄던 부채질이 다시 본래 속도로 돌아갔다. 황제에 버금가는 왕이 처소를 아내 그림으로 채우고, 수하의 분노를 빤히 예상하면서도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겸 본인 입으로도 말했지만 그는 오랜 황궁생활로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게 되었다. 감정 제어에도 능했다. 아무리 하우희가 하늘이 내린 색선이라도, 이런 사내에게서 열화와 같은 반응을 끌어내게 될 줄은 몰랐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거잖아. 둘은 얼마 전에야 처음으로 입을 맞췄어. 양기니 신선이니 하는 내 말을 흘려듣지 않은 것도 얼마 안 됐다고?
우희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이게 시작에 불과하면 과연 끝은 어느 정도일까. 내가 혹시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개방했나. 마치 첫 모금이 환상적이어서 신나게 마시던 진이겸의 양기 너머에 어마어마한 힘이 넘실대던 것과 같은 맥락인가.
사부님이 절대 열지 말라고 한 상자는 다 열어 보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은 다 먹으며 자란 우희였다. 매번 벌은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섯 명의 사형, 사저들이 독을 해독해 주고 망을 봐 주고 눈을 찡긋하며 옷소매 안으로 만두를 전달해 줬다. 덕분에 우희는 좋은 말로 하면 천하태평에 대범한 성격, 나쁘게 말하면 겁대가리를 상실한 신선이 되었다.
「막내야, 촉을 믿으렴. 넌 촉 자체는 좋은데 늘 ‘괜찮겠지!’ 하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인간 사내를 사랑했다가 엉엉 우는 게 취미인 셋째 사저의 말이 지금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 아마 지금이 그 ‘촉’이 발동한 때이고, 하우희가 평소처럼 ‘괜찮겠지!’ 넘기려고 해서가 아닐까.
“부담스러우십니까?”
이겸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왕비의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본왕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적이 처음이어서요. 어디까지 해도 괜찮은지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는 낯설지만 싫지 않은 기분이라고 덧붙였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겸이 시선을 들어 우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그대와 있는 게 가장 좋습니다. 저 넓은 전각을 족자로 가득 채운들 실제로 숨 쉬고 말하고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왕비만 하겠습니까.”
“이쯤 되니 장 책사의 걱정이 영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네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희가 좌식 책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이겸의 이마를 콕 찌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잎사귀로 감싸 놔서 얼굴에 꽃물이 묻진 않을 터였다.
“전하, 저는 요녀가 아닌데 전하께선…….”
이겸의 이마 한가운데 검지를 대자마자 부채가 따라왔다. 부채가 손가락을 은근히 내리누르는 힘에 우희는 그대로 이겸의 얼굴을 긋게 되었다. 곧게 뻗은 콧날을 따라 내려온 손끝이 어느덧 붉은 입술에 이르렀다.
그러자 우희를 움직였던 부채가 사라지더니 이겸이 잎사귀를 동여맨 손가락 끝에 입술을 맞췄다. 우희는 가라앉았던 간지러움이 다시 되살아난 이유가 이겸 때문인지 멈춘 바람 때문인지 조금 헷갈렸다.
“마저 말씀하시죠.”
이겸이 우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틀었다. 이번엔 잎사귀로 감싸지 않은 맨살에 입술이 닿았다. 서늘하면서도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왕비께선 요녀가 아니지만…… 본왕은 혼군이 될 자질이 충분합니까?”
“그게 원래 하려던 말이긴 한데요.”
이겸이 계속해 보라는 듯 눈썹을 움직였다. 다시 움직이는 입술. 이번엔 우희의 손등에다 낙인을 짙게 내리눌렀다.
“역시 바꿔야겠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이겸이 우희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돌렸다. 여린 피부 아래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쳤다. 이겸의 입술이 닿자 맥이 팔딱 뛰었다. 그는 살결을 느끼듯 자꾸만 손목 위로 입술을 문질렀다.
“전하야말로 요물이세요.”
우희의 손목 위로 자잘한 웃음이 흩어졌다. 숨결이 닿아 간지러웠다. 이겸이 속삭이듯 물었다.
“기왕 요물이라고 부르셨으니 묻지요. 왕비, 양기를 좀 드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