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미인도
우희는 큰 기대를 품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화공은 금 귀비가 보낸 연락책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면식도 없는 화공이 단왕비에게 그림을 바칠 리 없었다.
‘결국 왕부 안에서는 밀정으로 삼을 이를 찾지 못했다는 뜻이렷다.’
단왕부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그러하듯 화공 또한 장 책사의 허락을 받았을 터. 아주 잠깐, 화공은 밀정이 아니라 신분을 감춘 자객인데 장륜언이 일부러 모른 척 통과시켜 줬을까 의심을 했다.
어차피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엔 늦다. 단왕비는 죽었고, 장륜언은 실수를 자책하는 시늉만 하면 된다. 듣기에 단왕의 정적들은 단왕보다 만만한 왕비 쪽을 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소천의 추락 또한 그들이 손쓴 것일 수도 있다고 들었다.
적의 손을 빌려 눈엣가시를 제거하는 것. 장륜언이라면 가능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장륜언은 그렇다 쳐도 금 귀비가 남에게 이용당할 만큼 단순한 인물일까? 백주 대낮에 호위병 수십 명이 지키는 왕비궁으로 자객을 보내는 얄팍한 수를 쓸까?
직접 대면한 금 귀비는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데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단왕비가 협조의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단왕비를 죽여 봤자 그녀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단왕비의 진의가 무엇이든 간에 일단 이용하는 데까지 해 보고 나서 생살(生殺)을 결정해도 늦지 않다.
그러니까 뜬금없이 등장한 화공은 역시 금 귀비가 보낸 연락책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휴, 왕부 안팎으로 적이 득시글거리니 손님 하나 보러 가는 데도 이렇듯 머리를 굴려야 돼. 우리 소천이 가뜩이나 힘든 삶에 혼인까지 하게 돼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
소천의 친정도 썩긴 썩었지만 최소한 혼인 전엔 목숨 걱정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원래 신선은 인간사에 너무 깊이 개입해선 안 된다. 그것은 선계의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이 심소천의 처지가 몹시도 가련하고 불안하니, 우희는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훌쩍 떠나지 말고 여러 가지를 좀 가르쳐 줘야겠다 싶었다.
가령 정쟁이 난무하는 인간계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든지. 상대의 체면을 이용해 위기를 모면하는 법이라거나.
하여튼 우희가 이런 생각을 하며 의자로 이동하는 동안 화공은 응접실 바닥에 이마를 댄 채 대기하였다. 꿇어앉은 그의 옆에는 두루마리 족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북당이라 하였느냐. 내 시녀들에게 물어도 너의 호를 처음 들어 본다 하니 네가 직접 자기소개를 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우희의 목소리가 들리자 화공은 어깨를 움찔했다. 무릎 꿇고 머리 숙인 상태로 말을 하려기에 우희가 예를 거두어도 좋다고 허락했다. 화공은 감사해하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소인은 황도 토박이로 평소에는 노상에서 그림을 팔며 지냅니다. 소인의 특기는 미인도인데 왕비마마 면전에서 감히 자화자찬을 하자면 인기가 썩 좋아 그림만 팔아도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음.”
그건 되게 어려운 일 아닌가? 그림이 안 팔리거나 제값 못 받아서 굶어 죽는 화공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데.
우희는 연락책의 위장이 다소 허술하다고 느꼈다.
“한데 풍문에 왕비마마께서 선녀가 강림한 듯 아름다우시다고 하니, 소인의 미천한 상상력으로 미인도를 한번 그려 봤습니다. 어제 자로 완성되매 마마께 소인의 그림을 바치고자 합니다.”
“으음.”
우희가 부채 끝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 말인즉,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내 모습을 그렸다?”
“그러합니다. 마마의 시녀들이 말했듯이 소인은 이름값도 없는 평범한 화공입니다. 감히 마마를 직접 뵙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자로서…….”
“화공.”
우희가 사내의 말을 잘랐다. 웃음기 어린 투로 말했다.
“그림부터 보지.”
“예? 아, 예. 예.”
화공이 공손한 손길로 두루마리 족자를 받쳐 들었다. 상아가 그것을 받아 우희가 볼 수 있도록 길게 펼쳤다.
어디서 구해 온 그림인지는 몰라도 제법 괜찮았다. 얼굴은 우희와 별로 닮은 점이 없지만, 둥근 부채를 든 채 오색구름 사이를 거니는 모습이 신비로워 보였다. 선녀 강림에서 영감받은 그림이라고 둘러대기에 충분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었는데…… 실물을 보니 이해가 되는군. 마음에 들어.”
“황송합니다.”
“따로 내게 할 말은 없느냐? 아니면 저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면 되겠나?”
두루마리 족자 안에 쪽지를 숨기는 것은 전통적인 수법이었다. 연락책은 독대를 원할까, 아니면 족자 속에 금 귀비의 쪽지를 넣어 놨을까. 우희는 그것만 알고자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화공이 말귀를 너무 어두운 게 아닌가. 그는 마마를 직접 뵙고 흡족하다는 소감까지 들었으니 여한이 없다며 다시 절을 했다. 우희가 잡지 않으면 진짜 응접실을 나갈 판이었다.
‘귀비가 일부러 이런 사람을 골라 보냈나?’
우희가 화공을 불렀다. 말귀 어두운 자가 어째 몸놀림은 빨라서 벌써 무릎을 펴고 일어선 뒤였다.
“화공, 고개를 들라.”
“……예?”
“고개를 들고 내 얼굴을 확인해라. 단왕비가 친히 허락했으니 네게 무례의 죄를 물을 자는 없을 터.”
화공은 뜻밖의 호의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눈앞의 사내는 직업배우일 것이다. 그 정도로 진정성이 느껴지는 당황이었다.
“싫으면 말고. 십, 구, 팔…….”
“보, 보, 보겠습니다! 고개를 들겠습니다!”
화공이 다급하게 외쳤다. 조금이라도 주저했다간 우희가 금세 마음을 바꿔 먹을 것 같았는지 손을 내젓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우희와 화공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한동안 서로를 살펴보느라 말을 하지 않았다. 우희는 화공의 천천히 벌어지는 턱, 깜빡임을 잊은 눈, 후들대는 다리가 진짜인지 가려내고자 했다.
한참이나 우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화공이 여전히 멍한 얼굴로 상아를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상아가 들고 있는 두루마리 족자였다.
“그 ‘소문의’ 단왕비가 이 몸이니라. 두 눈으로 확인한 감상이 어떠한지?”
화공이 갑자기 상아에게 달려갔다. 호위병들은 화공의 돌발행동을 저지했다. 순간 우희의 머릿속에 ‘자객이었나!’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애초에 그가 자객이었다면 상아 대신 우희에게 뛰어들었을 터다.
화공은 호위병들에 의해 무릎 꿇려진 채 사죄했다. 아까 전만 해도 은근한 자부심이 깃든 눈으로 족자를 보던 그는 이제 족자를 불태우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소인이 그만 잠시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저 그림은 이미 소인의 손을 떠났으니 마마께서 처리하심이 옳습니다. 사죄드립니다.”
“그러니까 그림을 도로 가져가려고 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없애 버리고 싶습니다만! 마마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면 소인이 돌아가 새로이 그리겠습니다!”
우희가 화공의 조아린 머리를 내려다봤다. 호위병들은 단왕비의 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희의 눈짓에 호위병들이 화공을 놓아주었다.
“돌아가거라.”
“……감사합니다!”
화공은 네 발로 기다시피 응접실을 나갔다. 우희가 상아에게서 족자를 넘겨받으며 시녀의 상태를 물었다.
“많이 놀랐더냐?”
“조, 좀 놀라긴 했지만 괜찮사옵니다. 호위병들이 얼마나 빠른지 결국 저 사내는 제 근처에도 못 다다랐지 않사옵니까.”
“괜찮다니 다행이다.”
상아는 크게 놀란 게 틀림없으나 주인을 향해 애써 웃는 모습에 우희는 두 번 묻지 않았다.
“하온데 마마, 왜 자꾸 족자를 더듬으시는지요? 이 족자에 문제라도 있사옵니까?”
“아니, 없는데.”
우희가 볼을 부풀렸다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문제가 없으면…… 좋은 게 아닌지요.”
우희는 족자를 다시 상아에게 넘겨줬다. 화공이 나간 방향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호위병 하나를 콕 집었다.
“넌 소리 내지 말고 날 따라오너라. 나머지는 여기서 해산.”
“어, 어, 마마? 마마!”
우희가 이내 응접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주인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상아는 활짝 열린 응접실 문만 쳐다볼 따름이었다.
“대체…… 눈 깜짝할 새 사라지셨네.”
* * *
우희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화공의 뒤를 쫓았다. 입구로 가는 도중에 다른 내부인과 접촉할까 싶었지만 화공은 직진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이게 어디서 나는 소리지?
고개를 홱 돌렸다. 우희가 멈춰 서자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던 호위병 또한 제자리에 섰다.
“내가 좀 전에 뭐라고 했더냐?”
“헉, 헉…… 뭔가 말씀을 하셨습니까? 헉, 헉, 헉…… 송구합니다.”
“방금 말고 응접실에서.”
호위병은 숨을 몰아쉬기에 바빴다.
“소리 내지 말고 따라오랬지 않느냐.”
“아, 그게.”
“생긴 건 멀쩡한데 어디 몸이 불편하기라도 한 것이냐? 먹은 음식이 잘못됐느냐? 복통? 폐병?”
“헉, 그게, 헉, 헉…… 아니오라.”
호위병이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문장을 쏟아 냈다.
“소인의 상태는 평소와 다르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빠르신 겁니다.”
“우습구나. 내 걸음이 빠르면 얼마나 빠르다고.”
“빠르십니다.”
호위병은 주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멈춰 서 있는 동안 차츰 호흡도 돌아와서 내뱉는 문장 또한 길어졌다.
“마마, 왕비궁 응접실에서 여기까지 일반인의 보폭으로 얼마나 걸리는 줄 아십니까? 아무리 빨리 달려도 일각 반은 걸립니다. 소인들은 훈련을 받았으니 일각 안쪽으로 줄일 수 있지요. 한데 지금 마마께선—.”
호위병이 시간을 확인했다. 시각을 알리는 장치가 왕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서 더 줄이셨습니다. 반각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요. 더군다나 호흡조차 평온하시지 않습니까.”
“오호라.”
우희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반짝였다. 화공의 뒤를 쫓기에 바빠 중요한 것을 놓칠 뻔했다.
강해졌다.
이제 소천의 몸은 정식 훈련을 받은 병사가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훌륭해. 무술을 못해도 빨리 도망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건질 확률은 높아지지. 과연 진이겸, 극상의 양기!’
우희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위병을 데려오길 잘했다. 그가 비교 대상이 돼 준 덕에 작은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오늘 이 일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힘들어 죽겠는데 깨달음까지 얻어야 하는 걸까. 호위병의 혼란스러운 얼굴에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보다 빠른 자와 함께 달리면 너 역시 어느새 빨라지는 것이다. 호흡은 가쁘더라도 어쨌든 날 따라왔지 않느냐.”
우희가 밝게 외치며 호위병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자, 가자!”
“……방금 깨달음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전진, 전진, 전진!”
이미 우희는 열 걸음이나 앞선 뒤였다. 호위병은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찢어질 것처럼 아린 옆구리를 잡고 뛰었다.
잠시 후.
왕부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우희는 화공과의 거리를 좁혔다. 화공이 문턱을 넘을 쯤엔 거의 그의 몇 걸음 뒤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비를 알아본 호위병들이 예를 갖추려 했으나 단호히 저지당했다.
우희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옆문 틈새로 밖을 내다봤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었다.
“북당이 나왔네!”
“어땠나? 마마께 그림을 바쳤나?”
“직접 뵙기도 했는가? 아, 이 사람. 왜 이리 얼이 빠졌어. 우리 중에 유일하게 출입 허가가 나지 않았나. 말을 좀 해 보게!”
다들 차림새가 부유하지는 않으나 영 못 봐 줄 만큼 허름하지도 않았다. 단색의 옷에 검은 두건을 쓴 모습을 보니 문인이거나 북당의 동료인 듯했다.
“이제껏 내가 그린 모든 미인도를 불태우고 싶네. 그게 내 소감이네.”
“응?”
“다시 그려 바칠 걸세.”
“좀 더 자세히 말해야 우리도 영감을 받을 게 아닌가. 어이, 거기 서게!”
화공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나자 남은 무리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개중엔 벌써 시상(詩想)이 떠오른 듯 눈을 감고 읊조리는 이도 있었다.
“이거 참, 역사서에 몇 줄이 추가되겠구나. 당시 봉무국 황도를 중심으로 미인을 숭상하는 작품이 유행하였다. 대부분이 단왕비 심소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우희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차라리 유명인이 되는 게 소천의 신상에 이로울 수도 있겠군.”
“마마…… 헉, 헉. 화공이 의심스러우면 그냥…… 명을, 명을 내리시지요. 이렇게, 굳이, 헉…….”
그제야 도착한 호위병이 띄엄띄엄 말을 잇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데리고 온 자인데 뜻밖에 달리기 기록계로 사용되었다. 우희는 사람을 불러 호위병을 데려가도록 했다.
결국 금 귀비는 연락책을 보내지 않으려나.
“우린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아쉽네!”
그나저나 저 많은 사람 중에 왜 북당만 출입 허가를 받았을까. 문득 떠오른 의문에 우희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