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게 바로 청천벽력
다음 날.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 우희는 한달음에 훈련장으로 달려갔다.
“위 장군!”
“왕비마마를 뵙습니다.”
“예는 집어치워요.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다들 상태가 왜 이래요?”
세준이 우희를 빤히 쳐다보았다. 늘 그렇듯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것이다. 세준 본인부터가 목 아래까지 꽁꽁 싸매고 있으면서 이게 얼마나 심각한 사태인지 모른다고? 우희는 마침 지나가던 병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모두들 옷을 입고 있잖아요!”
세준은 실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듯 보였다.
“……밖이니까요?”
“틀렸어요.”
첫 번째 시도가 무참히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그냥 정공법으로 가기로 했나 보다. 어차피 기교를 부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세준의 특기가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병사들이 옷을 입고 있다니까요?”
“원래도 입고 있었습니다만.”
“아뇨. 전혀. 그럴 리가. 아니에요. 원래 여러분은 상의를 벗고 있었다고요.”
왕비가 무엇에 관해 말하는 중인지 파악하자 세준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그는 더운 남쪽 변경으로 출정할 경우를 대비하여 평소에도 무장한 상태로 훈련할 것이라고 답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기강이 해이해지도록 놔둔 꼴이 되었다며 자책의 한마디도 덧붙였다.
세준이 말을 하는 내내 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러다 머리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맹렬한 고갯짓이었다.
“하지만 날이 이렇게나 더운걸요! 이 끔찍한 더위에 가죽갑옷이라니 이 무슨 소름 끼치는 조합이야. 장군, 지금이라도 명을 거둬요. 이러다 다들 쓰러지고 말 거예요.”
우희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자 세준이 작게 웃었다.
“아직 그렇게 덥지는 않습니다.”
“덥기는 뭐가 안 더워요. 이것 봐. 이것 좀 봐. 여기 땀이 이렇게나…… 속상해요, 진짜. 피부가 다 짓무르겠어.”
우희가 손수건을 빼 들어 세준의 턱 주변을 두드렸다. 턱과 뺨을 두드리던 손수건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목덜미로 넘어간 것은 1만 년의 내공 덕분이었다.
세준은 눈앞의 왕비가 땀을 닦아 주는 척 옷깃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어정쩡한 미소만 지었다. 그사이 우희는 어금니를 악물고 자신의 완력을 총동원했다.
‘갑옷이란 원래 이렇게 빡빡한가? 대체 어떻게 입은 거야? 아니, 무슨 놈의 옷이 빈틈이 없어? 자고로 옷이란 목과 깃 사이에 팔 하나가 들고 날 수 있어야지.’
침이 고이도록 맛있는 요리가 손이 닿지 않는 쇠창살 안에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우희의 손놀림이 더욱 애타게 변했다.
‘도통 옷의 구조를 알 수가 없구나. 하긴 사내 옷을 직접 내 손으로 벗겨 봤어야 알지. 도력으로 사라지게 하거나 다들 이 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옷고름을 풀어서 이런 애로사항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어.’
결국 우희가 슬픔을 못 이기고 나가 떨어졌다.
아아, 통재라. 내 작은 극락정이 사라졌구나. 7백 명분의 눈요기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도다.
어제만 해도 탐스러운 양기 꽃들이 땀에 젖은 몸으로 훈련장을 걸어 다녔건만, 오늘은 군기 잔뜩 들어간 병사들만 보일 따름이었다.
세준은 시름에 빠진 왕비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했다.
“마마, 염려는 감사하나 실제 전쟁에 비하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화살 맞을 걱정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고, 휴식시간이 되면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들 7백 명은 이미 크고 작은 전투를 거친 정예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인간 놈들 대체 전쟁은 왜 해 가지고…….”
“그리고 겨울엔 혹한기 훈련이라고 해서 알몸으로 얼음장 같은 강물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오히려 견딜 만할걸요.”
우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알몸으로요?”
“예, 북쪽 변경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황도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도 겨울 추위가 대단하니까요. 어디에 떨어지든 견디는 법을 익혀야죠.”
우희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볼 시점이었다.
“겨울까지는 여기 있을까…….”
“죄송합니다만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응? 아, 아뇨. 별말 안 했어요.”
우희가 생긋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이에 세준도 두 번 묻지 않았다.
본래 우희의 계획은 가을이 되기 전에 극락정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이겸이 왕비에게 몸과 마음을 여는 속도를 보아하니 거사의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입맞춤 두어 번에 동침 한 번이면 우희가 필요로 하는 양기는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좀 겁이 날 정도로 힘찬 양기여서 말이지. 기대되면서도 걱정스러워. 중간에 끊으려면 엄청난 결단력이 필요할 텐데.’
어쨌든 이다음은 소천의 몫이다. 이겸은 쉽게 변심하지 않는 인물 같으니, 왕비가 다시 얌전해지더라도 이전처럼 거리를 두진 않을 거다.
‘소천과 만나면 이 점을 귀띔해 줘야지. 색선으로서 여러 가르침도 줘야지. 앞으론 단왕부가 소천을 보호할 테니 난 알몸 겨울 수영 훈련지가 어딘지나 들은 다음 총총 사라질 테야.’
굳이 소천의 몸으로 겨울까지 버틸 필요는 없겠다. 우희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다음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으려 했다.
“전하와 마마께서 이리도 저희에게 신경 쓰시니 소장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준의 말 중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갑작스런 깨달음이 우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장군은 모든 결정을 전하께 보고하죠?”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전원 무장 상태로 훈련하는 것도 보고했나요?”
세준의 장점은 항상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가 지체 없이 답했다.
“애초에 전하께서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언제 정해진 건가요?”
“어제 마마께서 다녀가신 직후에요.”
우희가 뒷목을 잡았다. 애꿎은 위세준 장군을 닦달할 일이 아니었다. 사내는 질투의 동물이라는 속삭임이 우희의 귓가를 맴돌았다.
‘범인은…… 다른 곳에 있었어!’
우희가 고개를 홱 틀어 이겸의 처소 방향을 노려보았다. 이 부당한 상황에 대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 * *
성실한 사람은 이래서 좋다. 언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대충 정해져 있으니까.
이 시간이면 이겸은 잠시 공무를 뒤로하고 볕 잘 드는 전각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필사했다. 때로는 혼자 기보를 보며 바둑을 두기도 했는데 우희는 저 사내가 과연 머리를 식힐 때가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겸의 말에 따르면 그게 쉬는 거라고 했다.
전각으로 들어서니 이름 모를 꽃나무의 향기가 사방에 은은히 감돌았다. 이겸은 한 손엔 책을, 다른 손엔 붓을 들고 서서 글씨를 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실로 한 폭의 그림이라. 무슨 용건 때문에 왔는지조차 잠깐 잊을 만큼 선연한 아름다움이었다. 이겸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로 그리 급하게 본왕을 찾으십니까?”
우희는 장경루로 가던 길에 병사들을 보았고, 거기서 훈련장까지 뛰었으며, 이겸의 짓임을 알게 되자마자 또 전각까지 달렸다. 호흡은 가쁘지만 다리가 저리거나 어지럽지 않았다. 체력이 붙고 있다는 증거였다.
스스로의 성취에 뿌듯해하던 우희는 이겸이 쓰고 있던 글을 흘깃 쳐다봤다. 이겸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서문우란의 시를 필사 중이었습니다. 하늘이 내린 문장가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합니다. 옛사람의 글이 어찌 이리도 본왕이 느낀 바와 흡사할까요.”
이 대목에서 ‘오, 왠지 전 그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라고 나불대면 안 된다. 왜냐면 이겸이 하고많은 시인 중 굳이 서문우란을 택한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으니까.
믿지는 않지만 신경 쓰이는 거다.
신경 쓰이기 시작하니까 견딜 수 없는 거다.
이제 양기를 취하는 게 어떤 뜻인지 알게 된 이상 이겸은 예전과 같은 눈으로 본인의 서가를 보지 못할 것이다.
혹시…… 저놈도?
아니면…… 이 인간은?
이에 대한 답은 안 듣는 게 이겸의 정신건강에 좋을 터.
우희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겸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한숨을 흘리며 한 구절을 읊었다.
“명시네요.”
“그런가요?”
“으음, 잘 썼네. 역시 하늘이 내린 문장가.”
“왕비의 칭찬은 감사히 받지요.”
이겸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방금 문장은 제가 지은 겁니다.”
우희는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의 이파리 개수를 세는 척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정말 감쪽같군. 동일인물의 작품이라고 해도 못 알아채겠어. 같은 색선과 같은 경험을 한 문장가들 사이에만 통하는 무언가가 있나?’
우희는 자신과 다르게 이겸의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유념하기로 했다. 이것 또한 얼마나 오래갈진 모르지만.
‘참, 내가 뭐 때문에 왔더라? 그렇지. 복장 단속.’
단정하게 여며진 이겸의 옷깃을 보자 빈틈 하나 없이 싸매고 있던 근육질의 몸들이 떠올랐다. 우희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태세를 전환했다.
“날은 점점 더워지는데 병사들이 갑옷을 갖춰 입도록 명하셨더군요. 위 장군이야 군기 운운하는 전하의 핑계를 믿지만 저까지 속이실 순 없어요.”
우희가 이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저 때문이죠?”
“아닙니다.”
“거짓말.”
“본왕 때문입니다.”
이겸이 깔끔하게 인정했다. 우희는 추가 설명을 요구하였다.
“왕비께서도 잘못이 없고, 병사들도 잘못하지 않았죠. 다만 제게 권력이 있어 눈에 거슬리는 것을 치웠습니다.”
우희는 처음으로 권력을 갖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 신선에겐 길가에 채는 돌멩이보다도 의미 없는 권력이 인간계에선 이리도 유효하고 그릇되게 쓰인다.
“보통 이럴 때 사내들은 여인의 품행을 단속하지 않나요? 그런 화려한 옷을 입지 말라든가, 그런 문란한 장소에 가지 말라든가.”
“옹졸함의 증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전하께서 하신 짓은 옹졸하지 않고요?”
“예.”
이겸이 미간까지 접으며 시집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대목을 읽고 있기에 저렇게 집중하는 걸까. 게다가 왜 하필 서문우란 시집인지 뒤늦게 슬며시 부아가 치밀려는 찰나 옆에 놓인 ‘백일몽 평전’이 눈에 들어왔다.
“본왕의 결정은 옹졸하다기보다 지극히 마땅하고…….”
“하?”
“조금 뻔뻔한 거죠.”
우희가 눈을 깜빡였다. 이겸은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으로 시집을 읽는 중이었다.
“조금요? 지금 조금이라고 하셨어요?”
“본왕이 저번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뻔뻔해지기로 마음먹으면 왕비께선 아마 많이 놀라실 거라고요.”
듣긴 들었는데 이렇게 빨리 발휘할 줄은 몰랐지. 마치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뻔뻔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있잖아.
우희는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뭐 7백 명의 양기를 뽑아먹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7백 명을 언급한 부분에서 이겸의 붓끝이 흔들렸다.
“그냥, 응? 그냥 참 건강들 하구나. 그렇지. 왕비가 친히 병사들의 건강 상태를 살피고자 함인데 전하야말로 생각이 너무 많으신 게 아닐까요? 권력을 그리 사사로이 휘두르시는 건 옳지 못한 일이라 봅니다.”
“……그랬군요. 본왕이 미처 왕비의 어진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희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결정을 번복하라고 말하려는 참이었다.
어느새 이겸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빛이 영 예사롭지 않았다.
“건강 상태?”
왜 말꼬리가 올라가지.
“본왕의 상태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전하의 상태가 어떤데요?”
“모르시죠?”
이겸이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우희의 앞으로 걸어왔다. 천천히 우희의 손을 잡아다가 자신의 가슴에다 댔다.
본인 몸이 병사들보다 훌륭하다고 말하려는 걸까.
“여기가 쓰립니다.”
“제가 너무 세게 만졌나요?”
“왕비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대낮부터 노골적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는데.
우희는 이쯤 되자 걱정이 됐다. 인간은 유약한 존재라 너무 한순간에 바뀌면 망가진다고 들었다. 양기 섭취도 중요하지만, 소중한 진이겸이 망가지면 그 또한 곤란하다.
“손톱에 꽃물을 들이는 것도, 함께 성 밖으로 나가 말을 타는 것도 하고 싶은데…… 자꾸 다른 곳을 보시니 애가 타네요.”
다행히 이겸이 망가질 염려는 접어 둬도 될 것 같다.
한편 우희는 상대의 의외인 취향에 웃었다. 저번에는 머리를 빗겨 주더니 이젠 꽃물을 들이잖다.
“전하께선 정말 혼인 생활에 거는 기대가 크시군요. 전 이제껏 사내의 애정을 귀히 여긴 적 없지만 전하의 정인—.”
우희는 말실수를 하기 직전에 멈추었다.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때맞춤이었다. 왜냐면 우희가 못다 마친 문장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전하의 정인 될 사람은 진짜 복이 많은 것 같아요.
‘무딘 색선의 귀에도 너무 남 얘기를 하는 듯 들리는군.’
엄밀히 말해 남 이야기가 맞긴 하다. 심소천 이야기니까. 하나 사정을 알 리 없는 이겸은 손에 살며시 힘을 넣었다. 왠지 우희의 손바닥을 울리는 심장 박동이 아까와는 달라진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