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26화 (26/100)

26화. 기강을 바로잡아야 하느니

때마침 문 너머로 들려온 상아의 목소리는 우희를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구해 냈다.

“왕비마마, 저녁이 준비됐사옵니다. 지금 바로 드시겠어요?”

그렇지!

두 사람은 아직 저녁을 먹기 전이었다. 우희가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바로 가겠노라 외쳤다.

“예, 마마.”

상아가 공손하게 대답하며 주인이 나오길 기다렸다. 우희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밖에 서 있는 시녀는 상아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겸이 지금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어도 밖에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희에게 더 매달리긴 힘들 터였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밥을 안 먹었는데.

“전하, 식사 시간이라네요.”

우희가 산뜻하게 웃으며 이겸의 품 안을 벗어났다. 요물 같은 몸에서 얼른 떨어져야 했다.

“같이 드실 건가요, 아니면 처소로 돌아가서 따로 드실 건가요?”

“……앉을 때와 달리 일어나는 속도가 빠르십니다.”

“시녀들이 문밖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 당연하죠.”

일부러 ‘애타게’라는 표현을 넣었다. 실제로 상아 일동은 별생각이 없을 텐데도 말이다.

이겸은 방해 때문에 오갈 데 없어진 정염을 단 두 번의 심호흡으로 억누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데까진 성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심란한 사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상태 전환이 어떻게 저리 빠르게 되지?’

우희는 새삼스레 놀랐다. 그와 동시에 역시 황궁 생활은 보통 사람이 감내하기엔 너무 힘들고 괴이한 것임을 깨달았다.

‘사람은 물론이고 신선도 못 견디겠네.’

이겸은 우희와 함께 저녁을 들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식사할 땐 시녀들이 계속 시중을 들기 때문에 야릇한 질문은 하지 못할 터였다.

우희는 활짝 웃으며 이겸보다 먼저 문으로 향했다.

* * *

이겸은 요즘 들어 부쩍 황궁에서 받았던 교육에 대한 회의를 느꼈다. 당시에는 모든 황자가 받는 교육이라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수업을 들었다.

사실 수업이라고 해도 궁술이나 서예처럼 전문 선생이 붙어 오래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날을 잡아 상궁과 내관이 와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다.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황궁의 아이들은 민가에 비해 이쪽 방면에 빨리 눈을 떴다. 쉽게 말하자면 접근성의 차이였다. 친구끼리 키득대다가 성년례를 앞두고서야 학당 선생에게 몇 구절 가르침을 받는 민간과 달리 아무개라는 궁녀가 몇 월 며칠에 승은을 입었다는 소식이 사방에 퍼지는 곳이 황궁이었다.

황제가 어머니를 자주 찾을수록 아이가 받는 대우 또한 달라졌다. 그리고 황제가 방문한 밤에는 유모들이 웃으면서 아이를 평소보다 일찍 재우거나 놀이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께 경사스러운 밤이므로 방해해선 안 된다는 타이름을 듣기 일쑤였다.

이렇듯 황궁 전체가 합방에 대해 쉬쉬하지 않으니 일고여덟 살 정도가 되면 어련한 눈치가 생겼다.

이겸 나이 열셋이 되어 상궁과 내관의 교육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 처음으로 지루함을 느꼈다.

서예 수업만 해도 삐침이 어떻고 강약이 어떻고 각 필체의 차이점을 세세하게 분석한 교본이 있다. 한데 상궁과 내관은 몸만 덜렁 와서는 한 명의 부인에게만 총애가 몰리면 안 된다느니 너무 더운 날, 너무 추운 날, 너무 이른 시각, 너무 늦은 시각을 피해서 동침해야 한다느니 같은 소리나 하였다.

이유를 묻자 회임에 이롭지 못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목적은 회임이었다. 황손을 많이 보아 봉무국에 충성할 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러려면 지나치게 흥분하지 말고 잠자리에서도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러고 보니 횟수도 정해져 있었어……. 이를 어기면 여색에 빠져 백성을 도탄에 들게 한 폭군들과 다름없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다.’

웃긴 건 동침을 피해야 할 날과 횟수 따위는 외우게 했으면서 아내를 아끼는 법은 가르쳐 주지 않은 점이었다.

지지난 저녁, 소천과 첫 입맞춤을 한 후로 이겸의 이런 회의는 더욱 극심해졌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그녀를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너무 기막힌 일이 아닌가. 서쪽 지방의 수해를 복구하는 법도 알고, 변경 너머 적들이 황도까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데 아내를 안는 법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냔 거다.

‘아, 회임시키는 법은 알지. 배운 게 그게 전부니까.’

문제는 이겸이 원하는 건 소천의 회임이 아니란 점이었다. 그는 상궁과 내관이 말한 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정해진 날에 규칙을 따라 자손 번성에 힘쓰는 것. 뭇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이겸 형제는 이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있었다.

문득 단왕의 청혼을 받아 신분상승한 심소천이 뜻밖에도 독수공방 중이란 소문이 돌았을 때가 떠올랐다.

다른 이들은 소천이 그의 눈 밖에 날 짓을 저질렀을 거라 추측했으나 황제만은 달랐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황제는 네 아내의 어디가 그리 좋더냐고 물었다. 그냥 허수아비로 세워 놓을 상대가 필요했으면 저자에 독수공방 소문이 돌 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당시 이겸은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들 형제는 아내가 회임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소리 내어 말한 적은 없어도 둘의 뜻은 일치했다.

이겸이 궁중에서 교육을 받을 때 지루함을 느낀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회임에 관한 내용뿐이었다. 앞으로 이겸의 인생에서 쓸 일이라곤 없을 이야기들이었다.

어머니 생전에 귀부인 시중드는 법을 익혀 두어서 다행이었다. 긴 머리를 빗기고 피로한 몸을 주무르는 법 등. 유모들은 황자의 위엄이 떨어진다며 기겁했지만 어머니는 아랑곳 않고 나중에 네 아내에게도 이리 해 주라며 환히 웃었다.

그래, 지금 생각하면 회임 방법 따윌 배울 게 아니라 어머니께 눈썹 그려 주는 법이나 마저 배울 걸 그랬다. 갈래는 다르더라도 소천을 기쁘게 해 줄 순 있었을 텐데.

‘그저 막무가내로 들이대고 싶진 않아.’

소천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이겸은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그가 환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지가 어언 보름째였다. 색선에 관한 책을 읽고부터 매일 한 알씩 먹기 시작했다. 약효가 누적되면 동침을 해도 회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부부 중 한 명은 그…… 수련법을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마는.’

불현듯 의문 하나가 이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데 소천은 어떻게 아는 거지?’

의아함 가득한 눈길이 침소 쪽으로 향했다.

‘내가 읽은 책과 소천이 읽은 책 내용이 다른가?’

다시 말하지만 이겸은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그때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천이었다. 이겸의 처소로 오는 줄 알았던 왕비는 보란 듯이 문 앞을 가로질러 훈련장 방향으로 걸어갔다.

소천의 바로 뒤로 각자 왕비의 오른팔, 왼팔로 자리 잡은 상아와 매화가 따랐다. 그리고 그녀들의 뒤로 한 무리의 하인들이 수레를 끌며 지나갔다.

단왕비의 격려 방문이었다. 열흘에서 보름 간격으로 한 번씩 간식 수레를 대동하여 훈련장에 들른다고 들었다. 처음엔 낯선 왕비를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했던 7백 명의 정예병들도 이제는 왕부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소천에 익숙해져 밝은 얼굴로 반긴다고 하였다.

그냥 윗사람 듣기 좋으라고 난 소문은 아닌가 보다. 뭔가 명을 받고 훈련장에서 나오던 병사들이 소천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진심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멀리서 봐도 왕비를 향한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예를 갖추는 어깨가 넓고도 탄탄했다. 더워지는 날씨에 등목이라도 했는지 머리카락 끝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졌다. 걸치는 시늉만 한 상의 사이로 두꺼운 가슴 근육이 보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오르내리는 복근도 또렷이 보였다.

웃전이 예를 거두라고 말하기 직전까지, 아랫사람은 고개를 들거나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 이는 웃전의 시선을 오롯이 받는 시간이었다.

기분 탓일까? 소천은 사고 이후로 예의규범에 얽매이지 않게 됐는데, 그런 사람치고 병사들을 오래 세워 두는 것 같았다.

흡족하게 굴러다닐 눈동자가 떠올랐다. 머릿속에 휘몰아칠 욕망의 파도가 생각났다. 며칠 전만 해도 소천은 반들반들 까만 눈으로 이겸의 몸을 저렇게 훑어 내렸다.

양기 있어요. 양기 있어요. 아주 싱싱한 양기가 왔어요.

뙤약볕 내리쬐는 무더위에 먹는 여름 수박처럼 달고 시원한 양기가 하나, 둘, 셋.

“그럼 얼른 해치우고 돌아오도록. 너희 몫은 따로 빼 두겠다.”

“감사합니다, 마마!”

소천이 나풀거리는 소매로 입가를 가렸다. 남에게 보여선 곤란한 웃음을 지을 때 소천은 긴소매를 활용하곤 했다.

“가자꾸나.”

병사들을 보낸 뒤 소천은 마저 가던 길을 재촉했다. 왕비가 훈련장으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렁찬 인사 소리가 들렸다.

이겸의 안에서 기묘한 불쾌감이 고개를 들었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 지금은 이상하리만큼 거슬리기 시작했다.

* * *

“전하, 어인 일이십니까?”

위세준이 놀란 얼굴로 이겸을 맞았다. 이겸은 세준의 부관들까지 달려오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막았다. 훈련을 그만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들 이겸의 뜻을 알아듣고 하던 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속으로는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갸우뚱할 것이다. 단왕비가 간식을 하사하고 돌아가자마자 단왕이 방문하다니.

“요즘 날이 제법 더워졌더군. 병사들 사이에서 힘들다는 말은 안 나오나?”

“아룁니다. 봄에 비해 더워진 것은 사실이나 아직 8월도 아니고 물과 휴식은 제때 공급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긴 아직 8월도 아니지…….”

이겸이 말끝을 흐리며 훈련하는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이들은 훈련 중에 상의를 입지 않았다. 훈련을 하다 보면 덥기도 하고 움직일 때 거추장스럽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이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왕부에 있는 동안 밥은 삼시세끼 제공되나 빨래는 병사가 직접 해야 했다. 몸이야 훌훌 씻으면 그만이지만 옷은 다르다. 땀과 흙먼지 얼룩이 빠질 때까지 문지르는 일은 무척이나 수고롭다.

누군가가 상의를 벗기 시작한 게 스멀스멀 유행처럼 퍼졌음이 분명했다. 죄다 사내들뿐이니 딱히 문제될 것은 없었다. 이겸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상한 데서 기강을 잡는다며 병사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남쪽 지방의 무더위는 유명하지. 황도와 달리 습기가 심해서 조금만 걸어도 진이 빠져. 자네 부친이 어린 시절을 남쪽에서 보내신 걸로 아네만, 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꽤 뜬금없는 질문이었을 텐데도 세준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뒤에 이어진 말을 들어 보면 단순한 사담이라 여긴 듯했다.

“예, 거긴 4월부터 더위가 시작된다더군요.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아서 남쪽 지방의 부자들은 새해가 되자마자 위로부터 얼음을 사 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산 얼음을 저택의 빙고(氷庫)에 넣어 두고 여름을 나는 거죠. 더위라면 지긋지긋하지만 그때 꿀과 우유를 뿌려 먹은 빙과만큼 맛있었던 게 없다고, 부친께선 지금도 웃으며 추억하십니다.”

“빙과 좋지. 그런 건 더울 때 먹어야 진미라고 느끼겠지.”

이겸의 시선이 가무잡잡한 등짝들에 가 닿았다.

“전쟁이 계절을 가려 일어나진 않아…….”

세준은 우직하기로 유명하지만 군대와 관련된 일에는 남다른 촉을 지니고 있었다. 병사들의 상태를 염려하는 데서 시작한 ‘사담’이 묘하게 이상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사담이 진짜 사담이 아니었던 것 같은 이 기분.

“전하,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세준은 조심스레 주군의 뜻을 추측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이겸이 자꾸 병사들을 유심히 쳐다볼 리 없었다.

“혹여 남쪽 변경이 위태롭습니까?”

“다행히 그건 아니지만 위 장군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평소 방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내가 무슨 말을 했지?

또다시 말문이 막혀 버린 세준은 얼른 방금 전의 대화를 되짚었다.

“내일부터 훈련 시 군복을 확실히 입도록 하게. 전장에서도 갑주를 벗고 싸울 텐가? 본왕이 기억하기로 2, 3년 전엔 이러지 않았거든.”

“예, 알겠습니다.”

“날이 더워지니 위생에 신경 쓰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제때 옷을 빨아서 숙소부터 훈련장까지 맨몸으로 오는 일이 없도록.”

세준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병사들의 빨래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주군을 심려케 해선 안 되겠다고 다짐하며 이겸을 훈련장 밖까지 배웅하였다.

‘……그건 그렇고 마지막에 내 몸은 왜 뚫어지게 보신 거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상체를 내려다본 세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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