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그녀와의 만남
후궁 입구엔 내관 두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딱 보기에도 한 명은 황후궁, 다른 하나는 귀비궁 소속이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동안 잡담이라도 할 법한데 둘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 정면만 응시했다. 그러던 둘이 동시에 우희를 발견했다.
단왕부의 표식을 보여 주자 두 내관이 예를 갖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황후마마께서 기다리시옵니다.”
“어서 오십시오. 귀비마마께서 기다리시옵니다.”
우희는 내관들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을 쳐다보자 저 멀리서 궁녀 한 무리가 후다닥 숨었다. 왼쪽을 쳐다보았더니 모퉁이 너머로 내관이 쓰는 모자 장식이 보였다.
‘이 몸의 인기란…….’
정말 가는 곳마다 주목을 받는다. 우희는 잠시 스스로의 빼어남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냈다.
한데 두 내관들은 이런 행동을 망설임으로 읽었나 보다. 그들은 더욱 단호한 말투로 서로의 궁에 가기를 권했다.
“마마께서 기다리시는데 늦어선 안 되겠지. 앞장서거라.”
우희의 시선을 받은 내관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곧이어 우희는 내관의 안내에 따라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 * *
“단왕비 심소천, 귀비를 뵙습니다.”
미인과 미인의 만남이었다. 여동생과 바둑을 두던 금 귀비가 우희를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했다. 대대로 삼공을 배출한 명문세가 출신답게 손짓 하나에도 고상함이 배어났다.
“어서 앉으세요, 단왕비. 오늘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금 귀비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약간 힘이 빠진 듯 나긋했다. 저 목소리로는 지금 당장 네놈 배때기를 쑤셔 오장육부를 꺼낸 뒤 성문 밖에 걸어 주겠다고 협박해도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을 터였다.
금 귀비는 꽃나무가지를 수놓은 고동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목련을 연상시키는 외모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우희가 자리에 앉자마자 차와 간식이 나왔다. 한입 크기로 만든 꿀타래와 꽃잎 모양의 생과자 등이 곱게 옻칠한 쟁반에 담겨 있었다.
다과를 내려놓는 궁녀의 태도는 공손함 그 자체였다. 이만하면 귀빈 대접이라 할 만했다. 사람 불러다 놓고 모욕 주는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던 우희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단왕비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합니다. 서로 초대를 하고, 응했지만 정작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거지요.”
금 귀비가 천천히 차를 마시더니 웃었다.
“솔직히 난 지금도 믿기지가 않네요. 일단 환영합니다, 단왕비. 한데 무슨 생각으로 황후궁이 아닌 이쪽에 온 겁니까?”
금 귀비의 시선이 문밖을 지키고 있는 내관을 향했다.
“설마 우리 내관이 황후궁에서 왔다고 거짓말하진 않았을 테고.”
“아닙니다. 내관은 똑바로 말했고, 저는 제대로 듣고 왔습니다.”
“그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몸짓마저 우아했다.
오른팔엔 황후, 왼팔엔 이런 귀비를 끼고 산단 말이지? 인간 황제여, 호사로구나. 천하가 진정 네 것 같겠다.
우희는 예의 바른 표정 너머로 잠시 딴생각을 했다. 그때 금 귀비의 여동생이 불쑥 끼어들었다. 황궁 연회 때 우희를 죽어라 노려보던 규수였다.
“빤하잖아요. 보나마나 왕부 책사에게 조언을 듣고 왔겠죠. 황후궁엔 따로 연락을 넣었을걸요.”
“버릇없구나.”
금 귀비의 꾸중에 규수가 입을 다물었다. 억울함에 입이 근질근질하긴 하나 그녀가 언니의 말을 거스를 일은 없어 보였다.
“단왕비께 이 무슨 무례냐? 당장 사과드려라.”
“……그, 그렇지만.”
“란약.”
나긋한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그래 봤자 우희의 귀엔 봄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듯 들리지만 규수에겐 아닌 모양이다.
금 귀비가 딱히 심하게 나무란 것도 아니다. 그저 동생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규수는 엄한 아버지에게 혼난 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소녀, 단왕비께 사과드립니다.”
규수가 끔찍하게 싫은 표정을 한 채 무릎을 굽혔다. 우희는 사과를 받아 주었다. 금 귀비는 여동생이 집안의 막내로 오냐오냐 자란 탓에 버릇이 없다며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했다.
“이야기가 끊겼군요. 미안해요. 오늘 나를 보러 온 이유에 대해 말하던 중이었죠.”
우희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 단왕비, 왜 황후궁이 아닌 이쪽으로 왔나요? 단왕부와 우리 사이는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해도 좋을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진실은 이렇습니다.”
우희는 잠깐의 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제가 사고를 기점으로 사람이 좀 달라졌다는 이야기는 이미 궁중에도 널리 퍼졌을 테지요. 명의에게 물으니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라더군요. 큰 충격으로 말을 잃는 사람도 있고, 기억을 잃는 사람도 있으며, 저처럼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인 양 행동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금 귀비는 섣불리 끼어들거나 늦은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까 본인 입으로도 말했지만 양측은 서로의 안부를 걱정할 만큼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이런 마당에 우희의 몸이 괜찮은지 물었다면 오히려 더 가식적이게만 보였을 것이다.
금 귀비는 그러는 대신 말없이 우희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일까요.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전과 퍽 달라졌답니다. 이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죠.”
우희는 등을 곧게 세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뭇 진지해진 태도에 금 귀비의 여동생마저 우희를 주시했다.
“기왕 이렇게 왔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희가 금 귀비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심소천은 3년간 저를 냉대한 단왕과 그의 수하들에게 철저히 복수하고자 합니다. 감히 청하건대 귀비마마,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응접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어느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부름에 대기하는 척하며 대화를 엿듣던 금 귀비의 심복들마저 조용히 눈을 굴릴 따름이었다.
우희는 잠자코 상대측의 반응을 기다렸다. 황궁에서 10년을 버틴 인물답게, 금 귀비는 표정관리에 노련했다.
자매지간이라도 궁 밖에서 부모님과 사는 여동생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이제 부풀기 시작하는 배를 느릿하게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였다.
반면 규수는 벌써부터 황당하다는 듯 입가 근육을 실룩이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황궁 연회 때 보니 부부금실이 대단하던걸요? 사고 이전엔 사이가 소원했을지 몰라도……. 아니, 요즘 거리에 떠도는 이야기만 들어도 단왕이 꿀단지에 빠졌다는 걸 알 수 있다고요.”
“꿀단지.”
우희가 작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제 복수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겠네요.”
금 귀비는 또다시 반박하려는 여동생을 저지했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우희를 돌아보았다.
“단왕비가 선택한 복수는, 남편을 사랑에 빠지게 한 뒤에 차갑게 내쳐서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이미 잘하고 있는 듯합니다. 내 도움까지는 필요 없어 보이는데요.”
“제가 갚아 주고자 하는 것은 감정뿐만이 아닙니다. 진이겸의 전부가 파괴되길 원해요.”
“단왕부의 파멸이라.”
금 귀비의 눈빛이 그윽해졌다. 입안에서 그 말을 음미해 보는 듯했다.
“단왕비의 원한이 그토록 깊은 줄 몰랐네요.”
“귀비께선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계시니까요. 짐작 못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내 말은, 남편에게 냉대를 받는 게 그리 가슴에 사무칠 일인가 해서.”
총애를 자랑하는 중이라기엔 어조가 묘하게 달랐다. 금 귀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지요. 단왕비의 말을 들어 보니 혼인에 건 기대가 컸나 봅니다. 하지만 이해 안 가는 바도 아니에요. 다른 누구도 아닌 단왕이잖습니까. 사내를 이리 불러도 되나 싶지만 ‘봉무제일미’에 가장 걸맞은 인물일 거예요. 재능은 또 어떻고요. 아직도 수많은 규수가 단왕 때문에 밤잠을 설칠 겁니다.”
한데, 하고 금 귀비가 말을 이었다.
“단왕비는 이미 그의 정비 자리를 손에 넣지 않았습니까. 거기다 애정까지 바랐다고요……? 냉대받는 걸 반길 이는 없다 하나, 길게 보면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나요.”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내의 애정은 그리 믿을 만한 기둥이 못 됩니다. 특히 우리처럼 귀한 신분의 여인에겐 더더욱요.”
갑자기 밖이 어수선해지더니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금 귀비의 두 황녀들이었다. 아랫것들이 열심히 달랬지만 어머니를 찾는 목소리가 애달파졌다. 금 귀비의 눈짓에 여동생이 대신 정원으로 나갔다.
“이모!”
“자, 어머니는 손님을 맞으셔야 되니까 우리 같이 저쪽에 가 보자.”
“좋아요!”
황녀들은 언제 어머니를 찾았느냐는 듯 밝게 대답했다. 곧이어 한 무리의 쾌활함이 멀어졌다.
“내가 입궁한 지도 어언 10여 년이군요. 그간 많은 이들이 후궁을 거쳐 갔답니다. 다들 친정에서 같은 조언을 듣고 왔을 텐데 폐하의 용안을 뵙고 나면 어느덧 조언 따위는 희미해졌습니다.”
무슨 조언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금 귀비가 곧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입궁은 여염집의 혼인과는 다르다. 네 오라비는 조정으로, 넌 후궁으로 출사한 것이다. 그러니 폐하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되 진심으로 그분을 연모하진 마라.”
10년 전의 그녀가 들었을 이야기.
“사랑이 깊어질수록 원망 또한 깊어지니 결국에 무너지는 건 너다.”
금 귀비는 차분한 말투로 10년 전 들은 바를 읊조렸다.
우희는 눈처럼 흰 꿀타래를 입에 넣으며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저를 떠올렸다.
셋째 사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네. 말해 봤자 귀담아듣지 않겠지만.
“폐하께선 젊고 국정에 밝으며 냉염하십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어도 마음이 술렁일 판에 그런 이가 당금 황제라뇨. 온 숙비, 황 미인, 계 첩여가 폐하를 사모하고 말았고 줄줄이 세상을 떠났답니다.”
“후궁 암투에 사약이라도 내리셨나요?”
“아, 단왕비가 아직 혼인 전일 때군요. 둘은 마음의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한 명은 누군가에게 독을 당했어요.”
살벌하구만.
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를 본 금 귀비가 웃었다.
“그 독은 사실 내게 쓰일 예정이었어요. 폐하의 주목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첫째를 회임했거든요. 불안에 떨던 황 미인이 내 음식에 독을 넣었죠. 난 그걸 알아채고 그릇을 바꿔치기 했고요.”
응?
우희의 시선을 알아챈 상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엇이 문제냐는 듯이 시선을 되돌렸다.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랍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후궁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사람 중에 폐하를 정인처럼 연모하는 이는 없어요. 그런 이는 이미 사라졌거나…… 곧 사라질 예정이죠.”
금 귀비가 우희를 향해 물었다. 여전히 목련꽃 같은 미소를 띤 채 단왕비 세 글자를 입에 담았다.
“현재 그대의 머리는 복수를 결심할 만큼 차디차고, 단왕은 정반대로 점점 달아오르지요. 내가 보기엔 바로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건만 정녕 단왕부의 파멸을 꾀할 셈인가요?”
“귀비마마의 뜻은…….”
“단왕이 망하면 그대도 망하지 않습니까.”
우희가 알아들었다는 듯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윽고 한 자 한 자 힘을 실어 답했다.
“상관없습니다.”
“…….”
“제 안에 쌓인 모멸감, 수치심, 분노는 일신의 영달을 버릴 수 있을 만큼 지독합니다. 하나 귀비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사내의 감정에만 기대기가 미덥지 않네요.”
우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무릎을 꿇은 다음 몸을 숙여 융단이 깔린 응접실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단왕비의 지위에 맞지 않은 극상의 예였다.
우희가 몸을 일으킨 뒤 말했다.
“그러니 귀비께서 저를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부디 마마의 힘과 지혜를 빌려주세요.”
금 귀비는 즉답하지 않고 우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관찰하는 시선에 우희는 간절한 표정을 유지했다.
잠시 후, 금 귀비는 거동이 불편해 직접 일으키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며 우희에게 일어나라고 하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확답을 주면 그것대로 믿음직스럽지 못할 거라 덧붙였다.
“하지만 내 조만간 연락을 하지요. 그때까지 단왕과 다디단 시간을 보내길 바랍니다.”
“귀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희가 예를 올린 뒤 응접실을 나갔다. 내관이 얼른 따라붙어 황궁 문 앞까지 배웅하였다.
* * *
“그 여우는 갔어요?”
금씨 가문의 막내 란약이 응접실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유리 어항 속 금붕어들을 살피던 금 귀비가 나무숟가락으로 먹이를 흩뿌려 주었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복수를 도와 달라니. 누굴 바보로 알고.”
“란약, 입을 함부로 놀리면 내가 어떻게 한댔지?”
규수가 얼른 입을 가렸다. 여긴 귀비궁인데, 하고 구시렁대는 것까지는 봐주기로 했나 보다. 금 귀비가 어항에서 눈을 뗐다. 동생을 돌아보는 얼굴이 차분했다.
“네 혼담이 깨진 게 다행이지. 만에 하나 네가 지금 단왕부에 있었다면 목숨이 위태로웠을 거다.”
“그 여…… 단왕비가 그 정도예요?”
“내게 무릎을 꿇었어.”
란약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응접실에 있었던 세 명은 황제 면전이 아니고선 무릎 꿇을 일이 없는 지위였다.
“그럼 언니는 단왕비 말을 믿어요?”
“내가 자기 말을 믿을 거라곤 단왕비 본인도 기대 않을걸.”
황녀들이 뛰노는 소리가 응접실까지 들려왔다. 금 귀비가 긴 숨을 내쉬었다. 아주 엷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하지만 일이 흥미롭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