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무릎 꿇리는 맛
륜언의 입술 사이로 짓씹듯 단 한 마디가 나갔다.
“요녀.”
“와, 그 말 진짜 오랜만에 듣네.”
“이전에도 들은 경험이 있으신가 봅니다?”
소천은 세상에서 이보다 웃긴 농담을 들은 적이 없다는 양 어깨를 떨었다.
“살면서 그 소리 한 번 안 듣는 여자가 있을까요? 처음엔 무슨 뜻을 담은 욕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도 아니더군요. 그냥 여자가 있고, 그 여자를 흠집 내고 싶을 때 요녀라고 하던데?”
륜언이 냉소 어린 말투로 반박했다.
“이유가 아주 없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이유를 근거로 탄박하면 되잖아요. 그 편이 훨씬 객관적이고 논리적인데 왜 밑도 끝도 없이 요녀라고 몰아세우냔 말이죠.”
소천이 가벼운 웃음을 날렸다.
“실은 모두들 알고 있겠죠. 그런 식으로밖에 비난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면 증거가 하나뿐이니까. 그 여자를 싫어하는 마음. 고작 그뿐이니까.”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뒤따랐다.
“한데 이 방법은 쭉 효과가 있는 것 같더군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륜언은 소천이 도로 상체를 세워 반듯하게 앉는 모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녀는 하늘거리는 손수건을 무릎 위에 펴 놓고 각을 맞춰 접기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태평스러운 손놀림에 륜언의 안에서는 다시금 열불이 차올랐다.
“냉차라도 들겠어요?”
“됐습니다.”
“열을 식힐 필요가 있어 보여서 그래요. 오해 말아요. 륜언을 탓하는 게 아니니까. 본인도 화가 많은 성질로 태어나고 싶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내가 대체 누구 때문에 머리꼭지가 돌기 직전인데.
륜언은 기도 안 찬 나머지 허공에 대고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소천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알아요. 내게 고약한 취미가 생겨 버린 거. 장륜언을 골려 먹는 재미에 눈을 떴지 뭐야.”
새치름하게 이쪽을 쳐다보며 눈을 흘기는 꼴이 요물 그 자체였다.
너무 작게 말해서 잘 안 들렸는데, 방금 깨소금 맛이라고 중얼거린 건가?
륜언이 감정 제어에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찰나였다. 손수건 접은 모양새를 이리저리 살피던 소천이 고개를 돌렸다. 륜언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표정이 묘하게 단호했다.
“부부의 화합은 두 손 들고 반길 일이거늘 장 책사는 어찌하여 나를 견제하느냐?”
잠깐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이 말투는 뭐란 말인가. 겉가죽은 그대로인데 안에 든 사람이 완전히 바뀐 느낌이었다.
륜언은 저도 모르게 왕비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사고 전의 소천을 알던 이들이 한 번씩 거쳤을 절차였다.
진홍색 흉터.
찻잔 뚜껑을 기울이느라 젖혀진 손목 안쪽엔 진홍색 상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째서 놀란 표정이지? 난데없이 왕비가 귀신에라도 씐 것 같같으냐?”
“……말투를 달리하시니 잠시 상태를 살필 수밖에요.”
“전하께서 그대들에게 쓰지 않는 경어를 내가 쓴 이유는 하나뿐이다. 잘해 보자는 거야. 우린 단왕부 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는 식구니까. 그리고 공대를 받아 기분 나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아니 그런가?”
소천은 질문 아닌 질문을 던진 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고 기분 나쁠 사람은 없다. 이 말은 곧 지금 륜언의 기분을 설명해 주기도 했다.
3년 내내 경어를 써 온 소천이 대놓고 말을 낮추자 륜언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녀는 왕비인데도. 오늘부터 남편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 하대하겠노라 결정한들 전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귀에 거슬렸다. 하나 자신에게는 전처럼 공대를 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봉무국의 예규가 그러했다.
“내가 신하라면 말이지.”
소천이 다시 입을 뗐다.
“아내에게 애정과 존중을 보이는 이를 모시는 게 더 기꺼울 듯하거든. 가족을 외면하고 일에만 몰두하여 성공한 자들이 제법 있는 현실이네만…… 기왕 혼인을 하였으면 평생의 반려에게 잘해 주는 편이 좋지 않나?”
그녀는 최소한의 대우도 안 할 심산이면 애초에 왜 혼인을 한 거냐며 덧붙였다.
“그래서 말인데 장 책사의 머릿속이 굉장히 궁금해. 대체 부부지정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왕비는 륜언이 말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은 아니었다.
“아! 정사를 돌보는 것과 정인을 아끼는 것은 양립불가하다?”
“앞서 많은 사례가 제 말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여자 때문에 성군의 눈이 흐려지고 나라가 망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 날 비방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개로 장 책사, 그리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잖아.”
륜언이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당연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한 나라가 무너진 이유에는 오랜 시간 누적된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소천이 옳다고 인정할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륜언은 대답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쯤 되면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은 주군을 향한 그대의 믿음이 아닐까? 이겸 또한 역사 속 사내들처럼 한순간 주색잡기에 빠져 버릴지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거지.”
“제가 아는 전하는, 허황된 책을 읽으며 일을 등한시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소천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시렁거림은 덤이었다.
“그 사람이 딴짓을 하면 얼마나 했다고 어쩜 고만큼도 못 쉬게 하지…….”
“제가 아는 전하는, 생사고비를 함께 넘긴 가신의 조언을 귀담아듣는 분이었습니다. 조정에 몸담은 적 없는 부인의 의견을 취하는 게 아니라요.”
“바로 그거였군.”
소천이 손가락을 튕겨 경쾌한 소리를 냈다. 드디어 문제의 근원을 파악했다는 투였다.
“그대는 본인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운 거야.”
“그게 무슨—.”
“불철주야로 노력했건만 간밤의 베갯머리송사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까 봐 걱정되는 게 아닌가. 내 말이 틀려?”
소천이 입매를 늘려 빙긋이 웃었다. 스무 해를 규중에 틀어박혀 살아온 사람치고 너무 세상사에 통달한 표정이었다.
“그대는 단왕을 위해 일하고 그의 추락을 염려하지만, 이는 위 장군의 충심이나 곽 호위의 맹종과는 달라. 냉정히 말하자면 단왕은 그대 스스로를 빛내기 위한 수단이지. 단왕보다 뛰어난 자를 발견했다면 장 책사는 지금 그자를 섬기고 있을 테고.”
“그게 본시 책사의 자세입니다.”
“이건 부정 안 하네?”
소천이 눈을 굴렸다.
“장륜언이 솔직할 때도 있구나.”
“전 누구와 달리—.”
“모르니 더 겁내는 거겠지.”
상대는 이제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끼어들었다. 여전히 사람 속 뒤집는 미소를 띤 채로.
“그대는 아직 한 번도 경험이 없지?”
24년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말로 져 본 적 없는 륜언이었다. 걷기도 전에 말부터 시작했고, 정식으로 글을 깨치기도 전에 한 번 들은 시를 암송했다.
변변한 선생 하나 없는 시골. 다 쓰러져 가는 집안 출신. 오직 지략과 언변만으로 단왕의 곁에 서게 되었는데 이런 난관에 봉착할 줄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왕비 심소천은 세 치 혀로 륜언의 쓰린 속을 헤집었다. 쇠꼬챙이처럼 들쑤시고는 낱낱이 찢어발겼다.
하나 소천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최후의 수가 남아 있었다. 왕비가 입을 열더니 지나가던 동네 개가 짖어도 그보다는 말이 될 소리를 했다. 모든 문제를 종식시킬 해결책이 하나 있다며 운을 뗐다.
“단왕과 더불어 나도 그대의 주인으로 모시라. 장 책사와 나의 이득이 결코 반(反)하지 않음을 보여 줄 테니.”
근거라곤 없는 자신만만함에 기가 막혔다. 이따위 제안으로 장륜언을 회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목덜미까지 시뻘게진 륜언이 분을 억누르며 대꾸하려는 순간이었다. 전각의 문이 활짝 열렸다. 어디서부터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겸은 소천을 가는 눈으로 흘겼다.
“왕비께선 정말이지 본왕의 수하들을 괴롭힐 기회를 놓치지 않는군요. 이래서야 제가 안심하고 자릴 비우겠습니까?”
경고라기엔 지나치게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투였다. 소천도 이를 알았는지 얼른 태세를 전환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단왕의 조복을 빼앗아 입고 천하를 호령할 것 같던 기세는 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딱 귀여울 만큼 억울한 표정으로 변했다.
“저는 그냥 장 책사에게 안심해도 된다고, 우린 다 같은 편이라고 알려 주고 싶었어요.”
어떻게 아까 ‘그 말’이 지금 ‘이 말’이 돼? 말하는 자세부터가 다르잖아?
륜언이 어이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겸은 그런 륜언을 일별한 뒤 소천에게 답했다.
“륜언에게 경계와 의심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모름지기 책사가 사람을 덜컥 신뢰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겸의 차분한 말투에 륜언의 등이 더욱 곧게 펴졌다.
“경계하고, 이용하며, 다음의 다음까지 안배하는 륜언의 수완 덕분에 본왕이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게 됐습니다. 위 장군과 곽 호위가 뛰어나긴 하나 정적이 판 함정에 대해 함께 논의하긴 어려우니까요.”
요란하지 않되 상대의 체면을 확실히 세워 주는 말이 이어졌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륜언의 목덜미는 이겸의 상찬을 듣는 동안 원래의 살빛으로 돌아갔다.
반면 소천은 입술을 시무룩하게 끌어 내렸다. 그 모습을 본 륜언의 상태는 더욱 빠르게 회복되었다.
“하지만 역시 무례를 범해선 안 되겠죠.”
이겸의 어조가 살짝 바뀌었다.
“수하의 잘못은 곧 본왕의 무능. 이제까지 장 책사의 언행에서 과하거나 부족함을 느끼셨다면 지금, 본왕이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다음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겸이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모으더니 소천을 향해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것은 단왕과 같은 지위를 지닌 인물에게만 올리는 예였다. 이겸이 하는 모든 행동이 그러하듯, 예규에 적힌 문장과 비교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장륜언처럼 총명한 자가 이겸의 사과에 담긴 의미를 못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했다.
이겸은 본인의 실책에 대해 사과 중인 듯 보인다. 그러나 륜언의 행동에 제약을 걸고 이후로 소천에게 응당한 대우를 할 것을 전하는 중이기도 했다.
직언 대신 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이겸의 방식이었다. 차라리 그가 장륜언의 뺨을 치며 왕비에게 사죄하라고 일갈했다면 지금 이 정도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륜언은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할 말을 잃었다.
“한데 말입니다, 왕비. 본왕을 향한 장 책사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셔 놓고 어째서—.”
이겸이 자세를 바로 하더니 한쪽 눈썹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그런 가냘프고 무력하기만 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설마 왕비의 많은 모습 중 그 모습이 본왕을 공략하기에 가장 유효하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작게 혀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겸이 짐짓 근엄한 척 고개를 저었다.
“부부간에 대화를 더 많이 나눠야겠군요. 진이겸이란 인물 해석에 조금 문제가 있어 보이십니다.”
“대화 좋죠! 언제든 환영이에요. 그게 몸의 대화든 마음의 대화든…… 역시 서로 간에 소통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분명 이상한 말이 섞여 있긴 한데 그게 소천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두 남자 모두 개의치 않았다. 이전보다 동침이니 양기니 하는 단어를 자주 접한 결과였다.
소천이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겸은 본인을 향해 내밀어진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내 굳은살 박인 크고 단정한 손으로 왕비의 하얀 손을 마주 잡았다.
“집무실로 돌아가실 거죠?”
“왕비를 처소에 데려다 드린 후에요.”
“에이, 어차피 저녁도 처소에서 먹고 잠도 거기서 잘 건데요. 그럴 거면 차라리 장경루로 데려다주세요.”
소천은 날씨가 좋으니 연못 위 누대에서 책을 읽을 거라고 재잘거렸다. 이겸이 알겠노라 대답하며 륜언을 돌아봤다.
둘은 짧은 눈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정확히 이겸의 시선이 앞을 응시할 무렵, 소천이 고개를 돌렸다. 왕비와 책사의 눈이 마주쳤다.
‘저……!’
소천이 도톰한 꽃잎 같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겸의 앞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일 것처럼 흐려지던 눈이다. 그랬던 눈이 지금은 통쾌함만을 담은 채 빛나고 있었다.
깨소금 맛.
깨소금 맛.
소천의 신나는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주군이 자신 때문에 머리를 숙였다는 충격을 떨쳐 내기에 아주 그만인 장면이었다. 저 꼴을 보고 있자니 없던 체증도 생길 판이다.
“심소천…….”
예의 따위 변경의 시궁창에 처박혀 버리라지.
기존에 남아 있던 티끌만 한 호의조차 사라졌다. 황궁 연회 밤, 가슴이 조금 술렁였던 게 떠올라 그의 기분은 더욱 뭐 같아졌다.
륜언은 3년 전에도 하지 않은 짓을 했다. 그는 왕비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씹으며 그르렁대었다.
“내 오늘의 치욕을 잊지 않겠다.”
잠시 후, 신경이 죄다 왕비에게 쏠린 탓에 앞을 제대로 못 보고 걷던 륜언은 전각 문턱에 발을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한동안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