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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17화 (17/100)

17화. 장작을 너무 많이 넣었나?

“위 장군 말이 맞았어요!”

우희가 환한 웃음을 띤 채 달려갔다. 달리는 중에 점점 속도가 붙어서 멈춰 설 때엔 세준의 몸과 부딪치다시피 하였다.

세준이 반사적으로 왕비를 잡아 주다가 얼른 손을 떼었다.

일부러 속도 조절을 안 했냐고?

두 말 하면 입 아프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 내려던 우희가 입을 다물었다. 세준과 함께 있던 부관들이 왕비에게 예를 올렸다. 조금 어색한 태도로 인사를 받자, 부관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자리를 떴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됐다.

주변에 이야기를 엿들을 만한 사람이 없는데도 우희는 괜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우희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면 키가 큰 세준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과연 위 장군이 말해 준 대로였어요. 어제 종일 전하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귀띔을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녁상을 물린 후에 건녕각으로 갔더니 바로 거기 계신 거예요!”

우희가 신이 나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왕비를 조용히 보던 세준의 입가가 작게 움직였다.

아마 웃으려고 한 거겠지. 우희는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곽 호위조차 물린 채 혼자 계신 것 같았는데—.”

“말씀 중에 외람되나, 곽 호위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요? 건녕각을 중심으로 50보 내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요.”

“그 50보는 어디서 얻으신 근거입니까?”

잠깐 시선 교환이 이뤄졌다. 우희가 말없이 빤히 올려다보자 세준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마주 쳐다보았다.

“왜 갑자기 장 책사처럼 구는 거예요? 말꼬리를 잡고, 근거를 요구하고.”

“아……. 송구합니다. 소신은 그저.”

“그저?”

우희가 말끝을 새치름하게 올리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너무 확실한 수치가 주어지니까 저도 모르게 그만, 부관을 대하듯이 되묻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하.”

우희가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난 또 뭐라고. 갑자기 본인답지 않게 추궁해서 이건 또 무슨 짓인가 하고 설렜잖아.

왕비 앞에선 규수와 대화 한 번 제대로 안 나눠 본 숙맥처럼 구는데, 부하들에게는 빈틈없는 상관인가 보다. 그 태도의 차이에 강한 흥미를 느끼고 마는 색선이었다.

“아무튼 곽 호위는 멀지 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마마의 존재도 당연히 알았을 테고요.”

“진짜 아무도 없어 보였는데……. 확실해요?”

“예.”

“그럼 곽 호위는 잠잘 때를 제외하면 항상 전하 곁에 붙어 있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 합궁할 때도 같이 있겠네?”

“예…… 에?”

세준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꺾였다. 본인이 들은 바를 의심하는 표정이기에 우희는 다시 한 번 말을 반복해 주었다.

“나중에라도 나와 전하가 동침하는 일이 있으면 그때도 곽 호위가 지켜보고 있겠다고요.”

“그건.”

“하긴 궁중법도 중에도 비슷한 게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나요. 시침 드는 이가 황제를 해쳐선 안 되니까 궁인들이 귀 틀어막고 구석에서 감시했다고.”

“소, 소신은 후궁 일은 잘 모릅니다만.”

세준이 당혹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때가 되면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난 그 상황이 걱정되기보다는…….”

도저히 못 참겠다. 이제 한계다. 우희는 넓은 소매로 얼굴 전체를 가렸다. 자꾸 정신 나간 사람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소매 너머의 표정을 알 턱이 없는 세준은 그야말로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됐다. 그는 아마 우희가 우는 줄 알 것이다.

왜 3년째 독수공방 시키느냐며 대낮부터 이겸의 집무실로 쳐들어간 기억 따위 하얗게 잊은 채. 남편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붓던 왕비가 눈앞의 미인과 동일인임을 까맣게 망각한 채.

세준은 왕비가 좋아할 만한 화제로 말을 돌리고자 애썼다.

“마마, 그래서요? 건녕각으로 가신 다음 전하를 만나셨습니까? 저, 전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직 한참 웃을 수 있지만 이쯤에서 소매를 내려야겠다.

“전하의 말씀은 기억나십니까?”

여기서 더 지체하다간 세준이 흘린 식은땀이 연못을 이룰지도 모르니까.

소매 너머로 눈부터 빼꼼 내밀었다. 상대는 왕비의 눈가가 젖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말씀은 기억 안 나요. 왜냐면 우린 안 만났거든.”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기둥 뒤에서 전하의 얼굴만 확인하고 돌아왔어요.”

이번엔 우희가 작게 한숨 쉴 차례였다. 아까보다 성량을 더 줄인 탓에, 두 사람은 거의 귓속말을 나누는 자세가 되었다.

“내 생각엔 말이에요. 전하께선 다른 사람과 근심을 나누길 원치 않는 분인 것 같아요. 하다못해 수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저어하세요. 그러니까 건녕각처럼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불도 안 켜고 앉아 있죠.”

우희가 말을 할 때마다 부드러운 숨결이 세준의 가죽갑옷 위로 흩어졌다.

“일부러 주변도 물리고 혼자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내가 등장하면 좀.”

우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나치게 공교롭지 않겠어요?”

“그런 우연을 가장한 마주침을 위해 소신에게서 정보를 가져가신 것 아닙니까?”

“흐음.”

우희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웃었다.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멀리서 이겸이 지나가다가 이쪽을 흘끗 보았다. 자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우희와 이겸,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짧은 순간 세준을 스치고 가는 눈빛.

세준은 우희를 향해 상체를 숙이고 있는 탓에 단왕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겸은 부하의 그런 빈틈까지 모두 눈에 담았다.

인사를 하려니까 갑자기 못 본 척 지나가는 게 아주 이겸답지가 않았다.

이윽고 우희의 안에서 뿌듯함이 흘러넘쳤다.

‘좋아. 아주 좋아. 저게 바로 질투라는 감정이지.’

정확히 우희가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사실 우희는 어제 이겸의 기분이 종일 저조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발단은 그저께 저녁이다. 부부는 최근에 우희가 훈련장을 방문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째 대화의 방향이 계속 세준에게로 빠졌다.

급기야 이겸은 위 장군을 향한 왕비의 관심이 각별하신 듯하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에 우희는 눈치 못 챈 척 미소로 화답했다.

‘없던 신경도 쓰일 만큼 위세준과 어울리고 있으니, 고결하신 단왕 전하께서 발끈하기까지도 얼마 안 남았겠구나.’

질투 때문에 평정심을 잃은 이겸의 얼굴은 또 얼마나 보기 좋을까.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나머지 ‘왕비께서 그리 원하시던 동침, 지금 하지요. 밤까지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낸다면 참으로 신날 텐데.

우희의 머릿속에 오색구름 같은 기대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완벽하게만 보이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이겸이었다.

* * *

간만에 하늘이 흐린 어느 오후였다. 우희는 붉은 줄이 눈에 띄는 그네에 걸터앉은 채 세준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의 주요 내용은 단왕비의 신변 보호였다.

이겸은 봉무국 제일의 무장이고, 그런 이겸의 옆에는 신출귀몰한 호위무사 현과 걸출한 장군 세준이 있다. 각자가 엄청난 실력자들인데 너희들은 셋이서 똘똘 뭉쳐 다닌다. 너희들은 그렇다 쳐도 나는 어쩌느냔 게 우희의 질문이었다.

세준은 왕비궁의 호위 수를 늘리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그게 아니죠.”

우희가 그네 줄에 매달리며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난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요. 전하와 여러분이 자기 몸을 지키는 것처럼 나도 내 몸을 알아서 지키고 싶단 말이에요. 맞아, 만약 내가 저번처럼 왕부 밖으로 나가면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고 있죠?”

“좀 더 우수한 호위들로 선별하겠습니다.”

“아뇨.”

우희는 연이은 오답을 칼같이 쳐 냈다. 상대방의 말뜻을 파악하는 데에 실패한 세준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마마께선 혹시…… 소신에게 호신술을 배우길 원하십니까?”

우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신술이라니, 너무 귀여운 단어를 듣고 말았다. 세준이 자신을 이토록 크게 웃길 줄은 예상치 못했는데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물론 세준은 본인이 한 말 중에 어느 부분이 웃긴지 몰라서 미동조차 않고 있지만.

색선 하우희는 열 자루의 검을 동시에 다루기로 유명했다. 싸움에 휘말린 적은 드물었으나, 맞붙게 된다면 반드시 이겼다.

우희가 적을 제압하는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천선은 그녀의 사부에 대해 물었다.

틀림없이 검선(劍仙)이나 투선(鬪仙) 중의 한 명일 거라던 예상과 달리 우희가 사부 옥진의 이름을 대자 상대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제를 모시는 천선조차 감탄한 실력자에게 호신술을 가르쳐 드릴까 제안하는 인간이라니. 인간계 생활은 정말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재미가 있다.

우희가 고개를 내저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급소를 건드려 보자는 제안이 몹시 매력적으로 들리긴 한데요.”

호신술의 원래 뜻과는 전혀 다른 해석에 세준이 미간을 찡그렸다.

“사양할게요. 내가 장군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건 검이에요. 운철로 만든 검 한 자루만 구해 주면 좋겠어요.”

“평생 규중에 계신 마마께서 운철을 어찌 아십니까?”

“지금 내가 말하는 검이 장식용이 아니라 사람을 베는 검인 거, 위 장군이야말로 알고 있죠?”

세준이 뭐라 더 반박하려기에 우희는 그에게 통하는 만능 문장으로 입을 막았다.

“예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하세요. 가여운 내 신세……. 그래도 힘내서 날 도와줄 사람을 열심히 찾아봐야지.”

“…….”

“못 찾으면 할 수 없고.”

“검을 가르쳐 줄 이는 필요치 않으십니까?”

“그건 괜찮아요.”

대화가 뜻대로 진행되어 만족스러운 우희는 그네 뒤로 상체를 젖혔다. 하늘이 흐려서인지 오늘따라 그네의 붉은 줄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정교한 매듭으로 장식된 그네는 이겸의 선물이었다. 황궁 연회 때 보니까 궁 안에는 그네도 있더라. 정작 우희는 별생각 없이 재잘댄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왕부 정원에 그네가 설치되었다.

이겸은 그네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 않았다. 절대 제 입으로 선물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하나 단왕부 내에서 이겸의 최종 허가를 거치지 않고 진행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이 어여쁜 그네는 이겸의 세심한 호의이며, 굳이 여기서 세준과 대화하는 까닭은 색선 하우희가 사내의 심기를 뒤트는 데 일가견이 있기 때문이다.

정원은 이겸의 집무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우희는 높은 담장 너머로 빨간 그네 줄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기를 바라며, 세준에게 그네를 좀 밀어 달라고 하였다.

이런 부탁에 도통 익숙지 않은 세준은 멈칫거리며 뒤로 돌아갔다.

그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덥지 않은 날씨에 건장한 미남이 밀어 주는 그네를 타고 있노라니 극락정이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

우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아무 곡조를 흥얼거렸다.

“저, 전하.”

갑자기 등 뒤에서 세준이 예를 갖췄다. 남녀의 정에 무지한 자라 이런 상황에서도 덤덤하면 어쩌나, 조금 걱정했는데 다행히 세준의 목소리는 당황 그 자체였다. 왕비와 장군의 사이가 이토록 친밀해선 안 된다는 자각쯤은 있었나 보다.

난색 가득한 세준과 달리 우희는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반짝 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이겸이 홀로 서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두 사람을 응시하는 이겸의 얼굴은 우희의 기대를 뛰어넘을 만큼 서늘히 굳은 채였다.

“부관이 자네를 찾더군. 훈련장으로 가 보게.”

“예, 전하.”

좋아. 그렇지. 잘한다. 일단 아내와 부하 사이를 떼어 놔야지. 부관이 찾는다는 말의 진위 여부 따윈 상관없어. 중요한 건, 둘이 붙어 있는 꼴을 더는 못 봐 주겠다는 태도니까.

우희는 훈련장으로 떠나는 세준의 뒤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 다음 이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심으로 그의 반응이 기대되었다.

“왕비.”

짧은 부름에 억누른 분노가 짙게 배어 나왔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언제든 본왕에게 직접 말씀하세요. 그대는 단왕비입니다. 본왕의 유일무이한 아내죠. 내겐 그대의 평안과 만족을 살필 책임이 있습니다.”

직접, 유일무이.

이겸은 특히 두 군데를 강조해서 발음했다. 말하는 내내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눈인사를 한 다음 자리를 떴다.

이겸이 사라진 후로도 한참 동안 우희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이게……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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