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장륜언, 흔들리다
두 남자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특히 맞은편 장륜언의 표정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싸늘히 구겨졌다.
내가 이 허튼소리를 얼마나 더 오래 듣고 있어야 하나. 왕비를 죽이지 않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인가.
짧게나마 자신을 되돌아보는 중인 것 같았다.
우희는 책상 위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뒤, 륜언의 넋이 집무실로 돌아오길 기다렸다.
이겸은 어떻게든 들을 준비가 된 듯한데, 우리의 냉소적인 독설가께선 왕비 제거 방법을 검토하는 데 푹 빠진 것 같았다.
기다리지 말고 시작하자.
“낯선 궁녀가 황명을 운운했을 때 바로 이상함을 눈치챘어요. 처음엔 나도 장 책사의 조언을 따르려고 했어요. 근데 너무 괘씸하면서도 궁금했단 말이죠. 날 얼마나 얕보았으면…… 수가 빤히 보이는 계책을 쓰잖아요. 진짜 폐하의 명이었다면 전하도 그 말을 들었을 것이고, 분명 누군가를 보내 한발 빨리 귀띔해 줬을 거예요.”
거기까지 생각이 가능했어?
륜언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직은 경탄이 아니라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어이구, 거기까지 생각이 가능한 분이 그런 짓을 하셨어요?
입을 다물고 있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생하게 들리는 느낌이었다.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사실 내가 폐하 앞에 가서 들은 대로 일러바치면 그쪽도 망하는 거잖아요. 감히 황제의 명을 거짓으로 꾸며 내다니, 목이 뎅강 떨어질 일이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새삼 분하다는 듯 우희가 눈을 가늘게 흘겨 떴다.
“낯짝을 봐 두고 싶었어요.”
“굳이 황궁 연회장이 아니더라도 그 낯짝을 볼 기회는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랬겠죠.”
우희가 두 남자를 번갈아 응시했다.
“단왕비는 겁쟁이에 백치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말인가요?”
“아무도 마마를 그런 식으로―.”
“말을 입 밖으로 낼 땐 세 번 생각하세요, 장 책사.”
우희의 선명한 눈빛이 륜언을 꿰뚫었다.
“지금 황궁에서의 내 위치가 정말 단왕비의 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요? 혼자서는 생각조차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 취급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일부러 도중에 문장을 맺었다.
“그런 하수를 쓸 리 없죠. 상대는 심소천이 속절없이 끌려 나가리라 믿은 거예요. 날 폐하 앞에 서게 만들면 전하가 황제께 거짓말을 했음이 들통 나게 되니까.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이죠. 나쁘게 엮으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전하께서 그리 흘러가게 두지 않으셨을 겁니다.”
“언제까지 난 전하의 등 뒤에 숨어 있어야만 하나요?”
우희의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누군가 나를 존중하지 않아요.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고 전하의 위신에 의탁한다면, 당시엔 좋은 대접을 받고 넘어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얻은 대접은 과연 온전한 내 것일까요? 전하께서 자리를 비운 순간, 상대는 내게 보이던 예를 거둘 거예요.”
그건 단왕 진이겸의 얼굴을 봐서 차리던 예의였으니까.
남편이 없는 곳의 심소천에게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게다가 전 심신이 허약해서 바깥출입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데다, 이 때문에 전하와의 돈독함까지 의심받는 상황.”
우희가 이겸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심소천은 어떻게 들쑤셔도 반항 못하는 존재라고 여긴 거예요. 솔직히 전하께서 어지럼증 핑계를 댔을 때 ‘어라?’ 싶었을 거예요. 그건 제가 도움을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단왕부가 왕비를 보호한다. 거짓말을 들킬 위험을 무릅쓰면서 섬약한 왕비를 연회장에 내놓지 않으려고 한다.
예전엔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았잖아? 덜덜 떠는 추태를 보이지 않도록 감싸 주는 거야?
‘도움을 받는다.’는 문장엔 사고 이전의 소천이 겪은 일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장륜언의 비상한 머리는 심소천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이런 위기 상황에선 이렇게 행동하시라. 얼마 전 그가 우희에게 일러 준 조언은 소천이 듣지 못한 것들이었다.
책사의 눈빛, 표정, 태도에서 주군의 발목을 잡는 왕비에 대한 불만이 절절이 묻어났다. 못 알아챈 줄 알았겠지만, 그러기에 륜언은 너무 노골적이었고 우희는 너무 오래 살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우희는 지금 그 말을 넌지시 하고 있는 거였다.
누구보다 왕비를 싫어하고 배제해 온 단왕부의 두뇌.
왕비가 자신의 독설에도 기죽지 않고, 할 말을 끝까지 하고, 방자한 친정 식구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그제야 너 거기 있었냐는 듯 신경 쓰기 시작한 책사.
장륜언.
이제까지 정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을 테지만, 정적의 위치에 륜언을 넣어도 말이 되었다.
자꾸 정적에 주의하라고 떠드는데 내부의 적부터 잡아야 하지 않느냐. 단왕부 안에서부터 왕비를 존중하지 않는데 잘도 바깥의 정적을 무찌르겠다.
우희는 3년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은 사실을, 이 자리를 빌려 하고 있었다.
륜언의 표정이 비로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갔어요. 스스로 물길을 돌리지 않으면, 계속 날 하찮게 보겠구나 싶어서.”
“…….”
“그랬더니 남자색 예복을 입은 남녀가 미소를 머금더군요. 연회장에서 오직 그 둘이 날 보고 웃었어요.”
황후와 단왕은 당연히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단왕비는 아파서 불참한다는 말을 미리 들었던 손님들은 의아해하였다. 황제까지도 의문을 품은 상황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높은 확률로 단왕비를 불러낸 당사자가 아닐까.
“금 귀비의 오라비와 여동생이라죠? 그들은 내 변한 모습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어요. 황제 앞에 세우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일을 망칠 줄 알았는데 너무 자연스레 넘어갔으니까요.”
“본왕의 연기에 장단을 맞춘 까닭도, 이미 상황 판단이 끝나서였군요.”
이겸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든 이겸의 거짓 핑계가 들킨 이상, 애처가의 과보호라고 주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타인이 납득할 만큼의 애정행각을 보여 주어야 했다.
“네, 전하께선 그냥 제가 전하의 다정한 모습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줄 아셨겠지만 실은 다 알고 한 거랍니다.”
진짜 정신을 못 차린 순간이 드문드문 있었다는 건 두 남자가 몰라도 되는 부분이다.
‘어지간히 치명적이었어야지. 그렇게 눈을 접으며 웃으면 어쩌라는 거야?’
우희가 조용히 눈을 굴렸다.
“한데 내가 전하와 다정한 모습을 연출할수록 규수의 표정이 굳더군요. 아주 못 볼 것을 보는 표정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 떠올리기를, 금 귀비의 여동생이 전하를 연모하는구나 했지요.”
륜언이 끼어들려고 하였다.
“아니란 거 알아요.”
끼어들 기회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우희였다.
“내 생각은 이래요. 금 귀비는 황후가 되고 싶어 해요. 황후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으니 폐후로 만들 명분이야 충분한데, 문제는 조정에 전하를 따르는 대신들이 많다는 거죠.”
황제, 황후, 단왕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라고 했다. 황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단왕이 나서고, 반대로 황후는 단왕부의 위기를 제 일처럼 여긴다. 두 사람은 금 귀비 일가의 눈엣가시일 게 분명했다.
“저 둘의 관계를 끊어 놓을 수만 있다면.”
이겸은 혼자서도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겸의 협조를 잃은 황후는 이야기가 다르다. 자식도, 총애도 귀비가 움켜쥔 상황에서 황후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우희가 이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제가 맞혀 볼까요? 금 귀비 쪽에서 전하께 혼담을 넣은 적이 있죠?”
두 남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놀란 시선을 교환했다. 이윽고 륜언이 의심 어린 표정으로 우희에게 물었다.
“사람을 풀어 알아보셨습니까?”
“그리했다면 장 책사가 제일 먼저 알았을 텐데요.”
맞는 말이라 반박이 불가했다. 날 선 륜언에 비해 이겸은 훨씬 정중하였다.
“그건 본왕이 왕비와 만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거늘 어찌 알았습니까?”
확실히 이쪽이 듣기엔 더 좋다.
“아무리 금 귀비 일가가 힘 있는 명문세가라고 해도, 회유 시도 한 번 안 해 보고 단왕을 적으로 돌릴 순 없죠.”
가장 무난한 회유책은 바로 혼인이다. 황후와 단왕 사이에 거리감을 만드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하나 전하는 거절하셨어요. 이후 첩으로라도 권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저 외의 다른 여인을 들일 일은 없을 거라고 공표하기까지 하셨죠.”
이겸이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술만 답삭거리고 말았다.
뭘 말하려고 했는지 나중에 물어볼까? 우희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한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전하와 금 귀비 일가는 정적이 되었고, 저는 전하의 정비라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두들겨 맞아 왔다…… 뭐 이런 분석이에요.”
“과거와 현재를 그리 파악하셨다면 향후의 일은 어떻습니까. 예측 가능하십니까?”
좀처럼 승복을 모르는 장륜언이 마지막으로 이를 드러내 왔다. 우희는 책사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치며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이쪽이 한 연합을, 저쪽이라고 못 할 리 없죠.”
“……!”
“범왕이라고 했나요? 그의 복수심에 불을 지피면 귀비가 원하는 대로 이용해 볼 수 있을 텐데요.”
황제를 위협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의 친아우인 단왕을 쳐내는 것까지는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겸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범왕은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성미라, 귀비의 손에 잡혀 주지 않을 겁니다. 귀비야 협공을 원하겠지만요.”
“그래요? 전 범왕을 몰라서.”
우희가 손깍지를 끼고는 그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적을 치려면 적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알아야 하죠. 금 귀비가 원하는 건 황후책봉이에요. 그럼 전하의 또 다른 정적 범왕이 원하는 건 뭔가요?”
고요하던 이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저런 눈을 하는 것은 이제껏 보지 못했다.
우희는 순간 그의 눈동자에서 변경의 차디찬 바람을 느꼈다.
흩날리는 눈발, 검이 부딪치는 소리, 깊이 팬 상처와 코끝에 진동하는 피비린내.
“형님이 원하는 것은…….”
이겸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본왕이 소중히 여기는 걸 모조리 빼앗는 거죠.”
어째서인지 살짝 떨리기까지 하는 말끝.
“빼앗은 다음, 망가뜨리는 겁니다.”
우희와 이겸의 시선이 맞닿았다. 둘은 그 상태로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았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쪽은 우희였다.
“확실히 금 귀비와 다른 유형의 인물이긴 하네요. 그나저나 전하께선 어느 쪽에도 들키지 않게 조심하셔야겠어요.”
이겸이 무슨 뜻이냐는 눈을 하였다.
“더없이 소중한 게 생긴다면요.”
“……그래야겠죠.”
“변경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황궁은 가까우니까요. 귀비가 알면 옳거니 하고 써먹을 거예요.”
우희의 말에 잠깐 상념에 잠긴 듯 보이던 그였다. 이겸이 운을 뗐다.
“하지만 들킨다고 해도 무력하게 빼앗기진 않을 겁니다. 지금의 본왕은, 옛날과 아주 많이 다르니까.”
묘하리만치 무게가 느껴지는 눈빛.
“지킬 수 있습니다.”
“…….”
이 남자는 왜 갑자기 이런 눈을 하는 건가. 우희는 의아해하며 상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심소천에게 벌써 감정이 싹텄나 싶다가도, 자칫 숨 막힐 것 같은 깊이에 고개가 기울어질 따름이었다.
‘범왕이랑 사이가 심각하게 안 좋긴 한가 봐.’
이겸의 시선에 압도된 나머지 한동안 눈과 입이 매어 있었다. 그래서 책사가 집무실을 나갔음을 알아차리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 * *
단왕 부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륜언은 자신이 더 이상 남아 있으면 안 되는 자리임을 깨달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어느새 밤은 깊어, 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다. 하인들도 최소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처소로 돌아간 뒤였다.
봄밤.
륜언은 천천히 회랑을 걷다가 땅까지 닿는 달빛이 아까워 우아한 기와지붕 아래를 벗어났다.
방금 전 집무실에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당사자 앞에서는 크게 동요하지 않은 척했지만, 실제로 륜언의 속은 한참 전부터 술렁이고 있었다.
왕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안을 파고들었다. 아직까지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였다.
정적을 운운하기 전에 그대부터 내게 존중을 보이라.
직접적으로 입 밖에 내지 않았으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모두가 알아들었다.
“전하의 위신에 기대고 싶지 않다……. 당신은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문득 가슴께가 욱신거려 옷 위로 지그시 눌렀다.
심장이 여느 때보다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