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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14화 (14/100)

14화. 언니의 1만 년 내공

우희는 아무 생각 없이 연회장으로 온 게 아니었다.

누군가 사람을 보내 우희를 끌어내려 하는데, 이겸의 힘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음모를 꾸미는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심지어 감히 황제의 명을 운운하니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낯선 궁녀를 따르는 척하며 황후의 궁녀와 맞붙게 해, 둘 사이 흐르는 긴장감을 살핀 것이었다.

이 둘은 적일까? 아니면 한편일까?

요 며칠 장륜언과 황궁 연회 준비를 하면서 황후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경계심 많고 냉소적인 책사가 황후에 대해서만은 믿음을 보이기에 신기했다.

희한한 건 황제 이야기를 할 땐 또다시 중립을 취했다는 점이었다. 황제의 통치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설명하던 륜언은, 황후처럼 믿을 만한 인물이냐는 우희의 질문엔 잠시 답을 미루었다.

결정적으로 이겸이 황후의 결정에 대해 의심 않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우희는 가설을 하나 세웠던 것이다. 이미 상대를 신뢰하는 남자들은 품지 못할 의심.

실은 황후가 모종의 이유로 뒤통수를 치는 거라면?

앞에서는 단왕부의 신임을 사 놓고 뒤돌아서 엿 먹이는 짓을 꾸준히 해 온 거라면 어떨까?

어디 한번 반응을 살펴볼까나?

이것이 우희가 연회장에 등장한 이유였다.

누가 봐도 단왕비가 함정에 빠진 순간, 황후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만약 황후가 범인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흐뭇한 얼굴을 하고 있나 관찰하려고.

한데 우희가 등장할 때부터 남들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그게 바로 저들 남매였다. 특히 금 귀비의 여동생이라는 규수. 영특해 보이는 얼굴에선 도무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하나 우희가 혼자 힘으로 위기를 넘기자 규수의 미소도 사라졌고, 우희와 이겸이 화기애애함을 연출할수록 규수의 얼굴은 어둡게 변했다.

‘진이겸이 꽃 중의 꽃이긴 하지.’

우희가 술 주전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니도 아까 좀 위험했단다. 오랜만에 이성을 잃을 뻔했어. 하물며 어린 인간인 넌 어떠하랴.’

별생각 없이 술을 따르려는데 이를 막아서는 손길이 있었다.

이겸이었다.

“연회이긴 하지만 아직 몸이 완쾌하지 않았거늘 억지로 술을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억지로, 라는 표현을 쓰기엔 방금 내가 너무 주저 없이 술을 따른 것 같지 않니?

우희가 속눈썹을 예쁘게 깜빡이는 동안 이겸이 궁녀를 불러 명했다.

“단왕비께 따뜻한 인삼탕을 내와라.”

본능적으로 이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고 말았다. 우희의 눈썹이 여덟 팔(八) 자가 됐다.

“그건 쓰잖아요.”

“당연하죠. 인삼탕이니까.”

“여기까지 와서 쓴 거 마시기 싫어요.”

“술보단 훨씬 좋을 겁니다. 왕비께선 손발이 차니 인삼탕으로 몸을 데우는 편이 좋아요.”

순간 우희의 눈빛이 요염해졌다. 그녀는 가볍게 쥐고 있던 이겸의 소맷자락을 괜히 비틀었다.

“몸을 데우기에 더 효과적인 방법을 제가 아는데―.”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이겸이 웃었다. 언제는 목욕 시중 들어 주겠다는 말에 앞섶을 그러모은 채 도망쳤으면서 오늘은 왕비의 유혹이 귀여운 듯 굴고 있었다.

손끝으로 볼을 톡 건드리는 이런 잔재주는 언제 익힌 것이냐. 요망한 것.

“여긴 황궁입니다, 왕비. 부디 때와 장소를 가리세요.”

“하여튼 인삼탕은 싫어요.”

“…….”

이겸이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궁녀에게 말했다.

“인삼탕을 내어오되 꿀 한 종지를 따로 가져와라.”

“예, 전하.”

이겸은 궁녀가 가져온 인삼탕에 꿀을 두 숟가락 갠 뒤 직접 후후 불어 식혔다. 우희의 입까지 가져다주고는 맛이 괜찮은지 보라고 하였다.

그 모습에 홀려서 인삼탕을 한입 받아 마셨다. 우희가 대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 정도로 씁니까?”

“전하께서 직접 맛을 보세요.”

이겸이 한 모금 마셔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본왕의 입엔 괜찮지만 왕비께서 쓰다니 꿀을 더 넣어야지요.”

숟가락으로 천천히 탕을 휘저으며 우희가 마시기 좋은 상태를 맞추었다. 참으로 흐뭇한 광경이었다. 알아서 마실 수 있다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가 다정히 거절당했다.

‘그래, 나도 안다. 그냥 예의상 한번 물어본 거야.’

연기를 빙자하여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육촌 친척과 대화를 나누던 황제가 갑자기 동생 부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단왕비야 사고를 기점으로 달라졌다지만, 짐의 친아우는 어찌하여 신혼으로 돌아갔느냐? 진짜 신혼이었을 때도 지금처럼 꿀이 떨어지진 않더니 말이다.”

떠먹여 주는 대로 인삼탕을 날름날름 받아먹고 있던 우희가 입가를 가리며 부끄러운 척을 했다. 이겸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연한 웃음만 지었다.

“짓궂으십니다. 지금이 딱 보기 좋은데 폐하께선 어째서 단왕 부부를 놀리시는지요.”

황후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황제는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며, 나쁜 의도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 후로도 이겸의 시중은 계속되었다. 연회장의 손님들은 저마다 웃고 떠들기 바빴지만, 다들 곁눈으로는 단왕 부부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오늘 저녁노을이 깔리기 전에 단왕 부부 사이가 각별하다는 소문이 사람들 입을 타고 퍼질 판이었다.

우희가 부채질하고 이겸이 장작을 넣었다.

요리를 반쯤 비웠을 무렵 건너편을 쳐다보자 규수의 얼굴이 시커멓게 굳은 게 보였다. 다음 순간, 우희와 규수의 눈이 마주쳤다.

금 귀비의 여동생은 우희의 미소에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연회가 끝나고 단왕부로 돌아가는 길.

마차 밖 풍경을 구경하던 우희는 이겸을 돌아보며 웃었다.

“오늘 저 잘했죠?”

“……그 으쓱거리는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잘했잖아요.”

우희가 두말할 필요 없다는 양 등을 곧추세웠다.

“어지럼증이 핑계라는 것도 안 들켰죠. 사고 때문에 성격이 변했다는 사실을 폐하 입으로 공언되게 했죠. 폐하는 제 바뀐 성격이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고, 이후로 다른 위기는 없었잖아요.”

이겸이 말없이 우희를 응시하였다. 봉인을 해제해 주길 기다리는 건가? 몸을 스윽 기울여 아까 이겸이 했듯이 상대의 뺨을 가볍게 건드렸다. 실소 비슷한 것이 단정한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정말 본인 좋을 대로만 기억하는군요.”

“어차피 왕부로 돌아가면 륜언과 오늘 연회에 대해 논의할 거 아니에요. 그때 돼서 저의 명석함에 놀라지 마시고요.”

다시 한 번 이겸의 뺨을 건드렸다.

“요런 건 어디서 배우셨을까?”

손길이 제법 자연스러웠는데 말이다. 혹시 황자였을 적 궁녀들을 홀리던 기술이 무심결에 나오고 만 건지 의심해 보는 우희였다.

그렇다고 불쾌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색의 신선으로서 흐뭇하고 귀여울 뿐.

궁녀들과 함께 갈고닦은 실력이 아니라면 그냥 타고났다는 뜻인데, 만약 그런 거라면 하늘의 공평치 못한 분배에 포효하는 자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한데 이겸은 우희의 장난스런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이상한 데서 불편함을 드러냈다.

“륜언을 이름으로 부르십니까?”

“방금 전하도 이름으로 부르셨잖아요.”

“…….”

“본인이 말하고도 좀 이상하죠?”

이겸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륜언도 몇 번 말하긴 했어요. 너무 친근하게 들릴 수 있으니 남들 앞에선 그리 부르지 않으시는 게 좋겠다고요. 알겠다고 하고 둘만 있을 땐 계속 이름을 불렀죠.”

어느 지점에서 이겸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둘만 있을 때, 인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그 부분은 포기하던데요. 결단 하나는 참 빨라요.”

“그랬군요.”

“이름을 부르는 게 좋아 보이면 전하도 이름으로 불러 드릴까요?”

우희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이겸?”

저녁으로 넘어가는 늦은 오후라 마차 안이 어두웠다. 하지만 그런 장소에서도 이겸의 목덜미가 붉게 물드는 것만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인간의 몸은 갑자기 체온이 오르거나 떨어지면 탈이 난다던데, 지금 이겸의 상태는 전자에 해당하지 않나 염려될 정도였다.

굉장했다. 피부가 희어서 더 눈에 띄는가?

“역시 왕비의 격에 맞지 않겠죠. 책사야 아랫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전하는 전하이신데. 아이 부르듯 이름을 부르는 건 별로일 거예요.”

“……왜 그렇게 됩니까?”

이겸이 딱딱한 어조로 반문했다.

“그런 사소한 걸로 격이 깎일 신분이 아니십니다. 부인이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어때서요. 전혀 흠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론,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행동하셔도 좋습니다.”

어째 목소리가 줄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게 들렸다.

혼잣말이라기엔 또렷하고, 대놓고 말하는 거라기엔 소리가 작았다.

“황궁에선 대담하더니 왜 이런 부분은…….”

이대로 마차 안에서 양기를 쪽쪽 빨아들일까 고민하던 찰나.

단왕부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제가.”

장륜언이 어금니를 악문 채 말했다.

“단왕 전하의 정적(政敵)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이 안 나는데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럼 그랬나 보죠.”

살기 가득한 눈빛이 우희에게 쏟아졌다.

전하의 정비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목을 쳤을 텐데. 이걸 죽여 살려? 가만히 놔뒀다간 내가 제 명에 못 살 텐데?

순수한 분노가 륜언을 집어삼키는 중인 게 보였다. 우희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책사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그댄 화낼 때가 제일 곱단다.’

으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륜언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버텨 내지 못할 살벌한 눈빛을 쏘아 댔다. 그러더니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테니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놓으십시오.”

“설명하세요.”

지나치게 호쾌한 대답이 문제였을까. 륜언이 다시금 우희를 노려보았다.

“지금 조정에는 단왕 전하를 따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품과 능력 면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시니 이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하나 조정은 힘의 균형이 중요한 곳. 황제가 아닌 자가 너무 두드러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요.”

이겸을 꺾으려는 자들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라고 하였다.

“전하의 정적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황위 쟁탈전에서 밀려나 변방으로 축출된 범왕(範王), 오늘 뵌 금 귀비 일가가 그들이죠.”

“거기서 잠깐!”

우희가 손을 들어 륜언의 설명을 중지시켰다. 상대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내가 왜 기억이 안 난다고 했는지 알겠어요.”

우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딱히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였을 거예요.”

“마마와, 전하는, 한배를 타신, 몸인데.”

륜언의 말이 딱딱 끊겼다. 그의 이성도 따라 끊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찌하여 정적을 기억할 필요가 없단 말씀입니까. 예? 그것도 황궁에 들어가 폐하와 황친들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말입니다. 예?”

찻잔을 움켜쥐는데 저거 나한테 던지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낯선 궁녀가 왔을 때 이상함을 알아채셨다면서요. 그럴 경우 낯선 자는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황후마마의 궁녀에게 연회장 상황을 파악하게끔 하라고 조언드렸거늘.”

난 너희와 달리 황후와 교류가 없어요. 걔가 진짜 우리 편인지 궁금했다니까? 그걸 알아보려면 상대의 수에 속는 척 현장으로 나가는 게 제일 빠르지.

하지만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과연 현명한 행동일까? 황후를 신뢰하는 두 남자 앞에서, 내가 그 사람을 의심했노라 밝히는 게? 결국 우희를 불러낸 건 황후가 아니라 금 귀비 일가라는 사실이 드러난 상황에서 굳이?

우희는 이 부분에 관해선 입을 다물기로 하였다.

“조언을 따르시지 않을 거라면 저 장륜언은 왜 이 자리에 있는 겁니까?”

“흐음, 전하도 가끔 조언과 다르게 행동하시지 않나요?”

“그건 전하이시니까요. 상황 판단과 분석력이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상황 판단과 분석력이 뛰어나면 때에 따라 독자적으로 행동해도 되는 거군요?”

어떻게 자신의 말을 그런 뜻으로 해석하느냐는 륜언을 향해 우희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 상태에서 시선은 옆으로 돌려 이겸을 힐끗 쳐다봤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 심소천의 분석을 들어 보세요. 오늘 황궁에서 내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하나하나 알려 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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