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12화 (12/100)

12화. 자꾸 그대가 신경 쓰여

왕비와 책사가 숭정당으로 향한 이후 반 시진이 지났다.

보고서를 처리하던 이겸은 오늘따라 집중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잔이 비어 있었다. 언제 다 마셨는지 의아해하며 주전자를 기울이자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인을 불러 차를 새로 우려 오라 명했다. 향기 은은한 차가 이내 책상 위로 올라온 것까지는 좋았으나, 맹물 마시듯 삼킨 까닭에 혀를 데고 말았다.

엉망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현아.”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단왕의 호위무사 곽현이 발소리를 내지 않고 나타났다.

“왕비께서 준비를 잘하고 계신지 궁금하구나. 네 지금 숭정당으로 가서 교습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지켜봐라. 두 사람에겐 알리지 말고 조용히. 한 시진…… 아니, 반 시진 뒤에 와서 보고하도록.”

현이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호위무사를 기다리는 동안이 그토록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이겸은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소멸한 집중력을 끌어모아 겨우 보고서 두 개를 처리했을 때, 현이 숭정당에서 돌아왔다.

이겸은 입술까지 가져간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현의 귀환을 반겼다.

“어떻더냐?”

현이 대답했다.

“자주 웃으셨습니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현의 사늘한 입매는 도통 다시 열릴 기미가 없었다.

하여 이겸이 질문했다.

“왕비께서 자주 웃으셨단 뜻이겠지?”

현이 답했다.

“예.”

“그리고 또?”

“계속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이후로 또 말이 없다. 그게 끝인가 보다. 현의 과묵함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러다가 문답으로 날밤을 지새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이겸은 방법을 바꿔 보기로 했다. 지금은 전쟁 중이며, 현은 적진을 염탐하고 온 상황이라 가정한 뒤 이에 대한 상세 보고를 해 보라고 말했다.

현은 잠시간 말을 하지 않다가, 긴 속눈썹을 딱 두 번 깜빡였다.

“제가 도착했을 때쯤 장 책사는 연회에 참석할 사람들 중 특별히 주의해야 할 인물을 꼽고 있었습니다. 그 인물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와 대처 방식을 설명했습니다. 세 번째 인물을 설명할 때 마마께서 하품을 하셨고, 장 책사가 마마를 노려보았습니다.”

현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일곱 번째 인물의 설명에 이르자 마마께서 한숨을 쉬셨습니다. 결국 장 책사가 조용히 이를 갈았고, 마마께 지금까지 들은 내용을 읊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이쯤에서 현의 표정이 미미하게 바뀌었다. 표정이라곤 없는 아이인데 신기했다.

저것은 뜻밖에 놀란 얼굴이려나.

남들 눈엔 무표정과 별다를 바 없게 보이겠지만, 현을 어릴 때부터 봐 온 이겸은 언제나 일자로 다물린 입가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었다.

“마마께선 장 책사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리셨습니다. 그러고는 장 책사가 했던 설명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으셨습니다.”

현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마마의 말씀을 듣고서야 제가 앞에 놓친 인물이 다섯 명이고, 그 전에 장 책사는 황실의 권력 구도에 대해 설명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들은 것을 그대로 외우셨다는 말이구나.”

“예.”

이겸이 무의식중에 보고서 끝을 매만졌다.

사고를 기점으로 갑자기 뛰어난 능력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던가?

륜언의 말은 뾰족한 붓끝처럼 핵심을 날카로이 꿰뚫긴 하나, 상당히 어려운 인용과 비유가 다수 섞여 있었다.

웬만한 이는 한 번 듣고 외우기는커녕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조차 갸우뚱할 정도였다. 그런 설명을, 그것도 열두 명에 달하는 인물에 대한 정보를 바로 외웠다?

조용히 생각을 이어 가던 이겸은 이내 쓴웃음을 삼켰다. 사고 이전의 소천과 비교를 해 보려고 해도, 예전의 그녀가 어땠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문득 륜언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주군에게 티끌만큼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짐 덩어리 왕비. 어디로 치울 수조차 없는 눈엣가시. 이전의 소천을 향한 책사의 시선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데 소천의 성향이 완전히 변함에 따라 왕비에 대한 책사의 생각도 바뀐 것 같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면서도 교육을 시키겠다며 숭정당에 데려갔다. 황금 같은 닷새의 시간을 오로지 소천을 가르치는 데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불철주야라고 강조했던가.’

이겸도 바쁘지만 륜언이라고 절대 시간이 남아도는 게 아니거늘.

이상하게 입맛이 썼다.

“왕비께서 한 번에 기억하시는 걸 본 장 책사가 어찌하더냐?”

이에 현이 지체 없이 대답했다.

“잠시 말을 잇지 아니하고 마마를 응시하였습니다.”

이겸의 눈앞에 그림이 그려졌다. 뭐 이 정도 일을 가지고 놀라느냔 듯이 생글대는 소천과 그런 왕비를 말없이 응시하는 륜언.

창문 너머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진 숭정당.

“정정…… 해야겠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잠시’가 아닌 듯하여.”

현이 고쳐 말했다.

“장 책사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도 기척을 내지 않으려고 더욱 주의한 게 기억납니다.”

소천을 보는 동안 륜언의 머릿속엔 어떤 생각이 떠오르고, 또 지워졌을까.

그 깊은 속내가 궁금해졌다.

아득해졌다.

이겸이 아는 륜언은 세속의 가치에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았고, 천자(天子)의 앞에서도 두려운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위협도, 유혹도 통하지 않는 인물.

스스로 갈고 닦은 중심이 굳건하기에 륜언을 얻으려면 그의 마음이 움직이게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에도 동하지 않는 장륜언을 움직이게 하는 것.

그것은 재능이었다.

좀 더 자세히 덧붙이자면, 그의 눈에 정교하게 세공하고픈 원석처럼 보여야 했다. 욕심과 확신을 동시에 주어야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볼 가치가 있게. 륜언의 허를 찌르며 압도한다면 그보다 좋을 순 없고.

이겸의 책사는 그런 인물이었다. 여간해서는 상대에게 대화의 마지막을 가져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책사가, 말없이 소천을 응시했다는 보고에 가슴이 덜컥하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륜언은 흔들렸을까.

평소 책사의 높은 기준치를 떠올리면 ‘고작’ 그 정도 재주로 감탄을 끌어낼 순 없었다.

하지만 소천을 향한 기대가 워낙에 낮았으니, 상황이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하지 않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장륜언이.

가만히.

조용히.

근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이겸의 안에 파문처럼 번져 나갔다. 이겸은 현에게 일렀다.

“앞으로 나흘간 계속 지켜보고 지금처럼 상세히 보고하도록 해라.”

“예.”

호위무사가 이유를 캐묻지 않는 아이라 다행이었다. 왜 주군의 곁을 비우면서까지 그래야 하느냐고 물어 온다면 뭐라 대답할지 이겸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명령을 부하에게 내리다니. 아무래도 자신은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봄이라, 그런가.

* * *

미쳤지.

이겸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자신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어제 현에게 그런 괴이한 명을 내린 걸로 충분하지 않나. 공무를 뒤로한 채 직접 숭정당까지 와서 기웃거릴 필요가 있나 말이다.

하지만 왔다. 어디 왔다 뿐인가. 진행 상황이 궁금해서 걸음 했다며 당당히 얼굴을 비쳐도 되거늘, 담벼락에 붙어 서서 밀정처럼 안을 살피고 있었다.

교습 이틀째였다. 왕비와 책사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 둔 채 수업 중이었다. 그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였다.

오늘 주제는 궁중예법인가 보다. 륜언이 세상에서 제일 깐깐한 선생의 눈으로 소천의 실수를 지적했다.

왕비인 소천이 황제에게 절을 할 때, 황후에게 절을 할 때, 같은 품계의 황친과 인사를 나눌 때 취해야 하는 예법이 각각 달랐다.

륜언은 무릎을 굽힐 때의 각도와 상체를 살짝 비트는 정도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소천은 이 모든 게 질린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핏 두 사람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틀렸습니다.”

륜언이 무인의 검만큼이나 기다란 막대를 소천의 팔꿈치 아래에 갖다 댔다. 가볍게 톡톡 쳐올렸다. 위로 더 들어 올리라는 뜻이었다.

소천이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팔꿈치를 휙 들어 올렸다.

“틀렸습니다.”

륜언의 막대가 이번엔 팔꿈치 위를 찔렀다.

“수평을 맞추세요.”

“내가 측량기의 눈금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진짜. 사고 이전에도 딱히 모든 예법을 완벽하게 지키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못 들은 척하기는.”

“혼잣말은 소리를 내지 않고 하시는 게 맞습니다.”

“장 책사는 누군가의 발가락을 빨아 본 적이 있을까.”

선생과 제자의 눈이 마주쳤다. 륜언의 눈에 경멸과 회한, 그밖에 열두 가지의 부정적인 감정이 스치는 것을 담벼락 너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반면 소천은 제 잘못 따위 없다는 양 태연한 표정이었다.

단왕부 책사의 뒷골이 급격하게 당기는 순간이었다.

“설마 황궁 연회에서도 이렇게 하실 작정입니까? 그럼 한시라도 빨리 말씀해 주십시오.”

“말하면 수업 접게요?”

소천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눈을 반짝이며 웃는 모습이 어찌나 활짝 핀 꽃송이 같은지. 마음 약한 선생이라면 그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대감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 륜언은 달랐다.

“당장 오늘 저녁에라도 사고를 내서 마마를 일어나시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요.”

소천의 웃음이 그대로 굳었다.

“왕부 앞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정도면 폐하께서도 넘어가 주시겠죠.”

“꼭 피를 흘려야 돼요?”

“가장 직관적이지 않습니까. 소문나기도 좋고.”

“자객이라도 고용할 건가요?”

“뭐 그리 번거롭게까지.”

륜언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었다.

“마차에 치이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치이는 시늉만 하고 가짜 피 뿌릴 거죠?”

륜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천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는 애교에 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륜언의 막대 끝이 다시금 소천의 몸에 닿았다.

“그러니 똑바로 하십시오. 놈들에게 꼬투리 잡을 빌미를 주지 마시란 소립니다. 혹시라도―.”

“전하께 누를 끼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 하려고 했죠?”

소천이 뒷말을 가로챘다. 정확히 그 말을 하려고 했던 륜언으로서는, 상대를 지그시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막대가 소천의 팔꿈치를 톡 때렸다.

“아!”

맞은 것에 비해 몇 배는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륜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엄살은.”

수업은 계속 그런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호되게 가르치는 륜언과 언제든 다른 화제로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소천.

전혀 궁합이 안 맞는 것처럼 보여도, 깨닫지 못한 새 서로에게 익숙해져 갔다.

좋은 일이지 않은가. 가장 신뢰하는 가신(家臣)과 아내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은, 단왕부 전체를 생각했을 때 긍정적인 변화였다.

‘한데 기분이 왜 이렇지.’

막대가 소천의 몸을 건드릴 때마다 담벼락 너머 이겸의 어깨가 흠칫했다. 소천이 내지르는 비명이 과장인 걸 빤히 아는데도 꺅, 소리가 터질 때마다 숭정당으로 뛰어 들어가고픈 충동이 일었다.

그렇게까지 냉엄하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가뜩이나 피부가 연한 사람. 막대로 찌른 곳이 멍들면 어떡하느냐고.

거듭 생각해도 연회 참석 당사자인 본왕이 가르치는 게 맞는 것 같다며 소천을 데리고 나올까.

머릿속이 몹시도 어지러웠다.

결국 이겸은 번잡한 속을 꾹 누른 채 담벼락을 떠났다. 집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새하얀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하얗고 어여쁜 것을 보니 소천이 떠올라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자꾸 그대가 신경 쓰여…….”

허공에 흩어지는 혼잣말.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할, 이겸만의 속내.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저답지 않은 행동을 연이어 한 까닭에 심기가 언짢아졌다.

이틀 뒤인 교습 넷째 날.

륜언이 도저히 안 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께선 연회 당일 입궁하시되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방에 누워 계시라고 말했다. 태의를 미리 포섭해 두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덧붙였다.

다 같이 한통속으로 황제를 속이게 되었는데, 어째서 이겸 자신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가.

소천이 하루라도 빨리 숭정당을 나오게 된 게 기뻐서가 아닐까?

이제껏 무의식중에 외면해 온 진실이 귓가를 간질였다. 저도 모르는 새 자신은, 륜언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소천의 시선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이 봄볕에 움트는 새싹처럼 이겸의 안에 돋아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