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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10화 (10/100)

10화. 더 놀다 가시지 않고요

우희는 탕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맞은편에서 식사 중인 이겸을 쳐다보았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뜻인가 보다. 미남자가 반듯한 자세로 젓가락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안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이겸의 움직임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젓가락을 쥔 손가락은 예법 교본에 실어도 될 만큼 정석적이었다. 쓸데없이 요리를 뒤적이지도 않았고, 쩝쩝대거나 후루룩 들이마시는 불쾌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간혹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 나는 가벼운 소리가 우희의 귀를 간질였다.

‘얌전한 자태로 잘도 먹는구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여 긴장하는 단계는 한참 전에 지났고, 이젠 정갈함이 몸에 배었어.’

바르되 여유롭다.

그것이 이겸을 향한 우희의 평가였다.

이 나라 황제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친동생을 상당히 의식했을 것 같다.

인간들의 황위 쟁탈전은 무척이나 치열하다고 들었다. 황제는 친동생이 황위 욕심 없이 자신을 지지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조금 분하지 않았을까?

이겸에게 이복형제가 있다면 그들의 열등감은 또 어떨까? 누가 봐도 다 가질 수 있는 인물이 기꺼이 한발 물러나 있는 모양새다. 본인은 그저 정도를 걸어왔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혼자 내상 입는 자들이 많았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왕비께선 어찌 식사를 하지 않으십니까?”

이겸이 조용히 질문했다.

“아까부터 요리가 아닌 본왕을 보고 있는데…… 본왕이 점심 대신인가요?”

우희는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얘 오늘 왜 이러니.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실제로 먹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겸이 상 너머에서 우희를 쳐다보며 권했다.

“드세요. 보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을 겁니다.”

1만 년 수련한 내공이 아니었다면 이성을 잃고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를 말이었다.

색선을 이토록 안달 나게 만들다니, 과연 봉무국 제일미(第一美)다웠다.

우희가 여태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했음을 알면서도 태연히 저런 권유를 하는 건 뭘까?

달콤한 양기 보유자님, 방금 나눈 대화가 묘한 뜻으로 들릴 수도 있단 것을 아시지요?

모르고 했다는 헛소리는 넣어 두세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올라간 네 입꼬리가 그 증거니까요.

“침 삼키시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립니다.”

“그랬나요?”

이겸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진 채였다.

“본왕이 가고 나야 식사를 하실 참입니까. 그냥 지금 같이 드시죠. 야한 생각은 그만하시고요.”

우희가 풉 웃었다. 탕을 새로 떠서 입으로 가져가니 적당히 식어서 먹기가 좋았다.

이겸의 말이 맞았다. 보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희의 손길에 앞섶을 꽁꽁 여미며 자리를 뜬 단왕. 여색에 일말의 관심도 없을 듯한 그는 사실 우희가 던지는 말은 다 알아듣는 인물이었다.

알아듣다 뿐인가. 본인이 내키기만 하면 눈 하나 깜짝 않고 비슷하게 받아칠 수 있었다.

하우희, 대체 왜 그가 숙맥일 거라 생각했지? 유혹에 당황한다고 해서 이쪽에 무지한 건 아닌데.

진이겸은 절대 색을 모르는 사내가 아니야. 하, 모를 수가 없지. 인간계에서 저 잘난 몸으로 무려 24년을 살아왔는데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 뒀겠어? 심지어 민가의 사내도 아니고 황실의 후손인데?

그러니까 이겸은 아무것도 모르는 미남이 아니라, 알지만 넘어오지 않는 미남이란 소리였다.

‘큰일이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난 전자도 좋지만, 후자엔 말 그대로 속수무책인데.’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드는 건 사양이었다. 양기만 쏙쏙 흡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져야 한다고, 사부님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당부하셨는데.

색으로 수련하는 것을 넘어서 사내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셋째 사저의 고생을 옆에서 봤지 않나 말이다.

「흑, 흑흑, 죽었어. 죽어 버렸다고.」

「……사저, 미음이라도 마시면서 울어요. 몸 상해요.」

「막내야아아, 인간은 왜 이렇게 빨리 죽니이이이. 볼일 보러 멀리 좀 다녀왔더니 벌써 죽었대애애. 그 사람 아들이 말해 줬어어어.」

「……50년이 지나긴 했으니까요.」

「흐아앙! 다신 사내한테 마음 안 줄 거야!」

하지만 셋째 사저는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마음에 꼭 드는 사내를 만나 좋아해 버리고 말았다.

보다 못한 대사형이 인간 사내한테서는 양기만 빼먹고, 마음은 신선에게 주라며 이마를 짚었을 정도였다.

지금도 셋째 사저는 어딘가에서 몇만 번째인지도 모를 연인과 정분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사저 꼴 나면 안 되는데.’

진심으로 이겸에게 빠져들면 곤란하다. 그저 기간 한정 미모를 감상하며 양기를 취하는 데 의의를 두자.

갑자기 위기감을 느낀 색선이었다. 우희는 이겸을 힐끔대는 것을 관두고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본인 입으로 밥부터 먹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왕비가 진짜 말없이 밥만 먹으니까 이상했나 보다. 건너편으로부터 우희를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겸이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답삭거리다가 말았다. 이후로 단왕 부부 사이에 조용히 식사하는 소리 외의 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겸이 돌아간 뒤, 주인 부부의 화기애애함에 덩달아 들떴던 시녀들이 돌연 달라진 분위기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너희만 아쉬운 줄 아느냐? 나도 속이 쓰리단다.’

모처럼 상대가 한발 앞으로 다가왔는데 색선 체면에 열 걸음 뒤로 달아났다.

‘사부님이 보셨으면 속상해하셨을 거야.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인간을 향한 감정 때문에 덜컥 겁을 먹다니. 심지어 셋째 사저처럼 몸과 마음을 통하기도 전인데!’

우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볼 때마다 놀랄 만큼 닮은 얼굴이 자신을 마주 보고 있었다.

이 몸은 가여운 왕비 심소천의 육신이다. 자신은 인연이 닿은 김에 심소천의 주변 상황을 잘 정리해 준 뒤 극락정으로 떠날 것이다. 그 ‘주변 상황 정리’에 진이겸을 날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사실 진이겸의 양기는 심소천 몸에 잠들어 있는 공력을 깨우는 보조제로 쓰일 것이기 때문에, 이만하면 지나가던 신선치고는 제법 신경 써 준 거라 할 만 했다.

‘흡수한 양기가 내 도력이 되는 것도 아닌걸. 결과적으로 심소천의 힘이 될 거란 말이지.’

자신이 그 과정에 얻는 즐거움은 소소한 수수료 정도로 해 두자.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총합했을 때 중요한 건 단 하나.

‘취향 적중이라 하여 빠지면 안 된다.’

우희는 거울을 보며 뺨을 마구 두드렸다.

정신 통일! 정신 통일!

뺨을 두드렸기 때문이겠지? 왕비의 배꽃 같은 얼굴에는 어느새 홍조가 떠올라 있었다.

* * *

“저런, 더 놀다 가시지 않고요.”

우희가 짐짓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단왕부에 들어온 지 나흘 만에 끔찍한 상태로 변한 심가 사내들이 분한 눈으로 우희를 노려보았다.

몸에선 뜨끈뜨끈 열이 나지, 콧물은 멈추질 않지, 며칠 연속으로 잠을 설친 까닭에 머리는 몽롱하지. 거기다 어제 왕부 밖에서 특별히 공수한 이불의 벼룩 때문에 전신이 가려워 죽을 지경일 터였다.

우희에게 귀가를 보고하는 잠깐 동안에도 여기저기를 긁어야 했다. 그 무엇보다 체면을 중시하는 자들이다. 얼마나 수치스럽고도 원통할까. 품위 있는 자세로 서 있으려고 해도 손이 저절로 가슴, 목덜미, 사타구니로 움직였다. 코를 훌쩍이며 몸을 벅벅 긁는 모습이 아주 흡족했다.

벼룩으로 괴롭힐 줄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황제의 친동생이 거하는 저택이니까.

“마마의 몸이 멀쩡하신 것을 확인했으니 가장 큰 볼일은 끝났습니다. 전하께 그런 비밀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텐데요……. 아무튼 측실 문제는 마마께서 해결하기로 하셨으니, 이만하면 가문으로서는 성의를 보인 게지요.”

소천의 백부는 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재채기를 했다.

어이쿠, 소리 한번 요란하기도 하지.

우희는 넓은 소매로 입가를 가린 뒤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은 소매 너머에서 대단히 웃고 있었지만, 상대는 연거푸 재채기를 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백부가 손수건으로 코를 닦은 뒤 우희를 다시금 노려보았다.

“마마의 정신이 하루빨리 돌아왔으면 좋겠군요. 예전의 음전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기 전엔 단왕부를 찾지 않겠습니다.”

“백부께선 제 예전 모습이 더 좋으신가 봅니다. 한데 이를 어쩌지요? 전 지금 모습도 썩 마음에 들거든요.”

“이, 이 모욕을 절대―.”

“심가 저택이 하루아침에 쑥대밭으로 변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소매를 내린 그곳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있었다. 색선의 가장 깊고 어두운 부분이 인간 심소천의 밖으로 드러났다.

사내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두려운 존재와 맞닥뜨린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 입을 제대로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

“살려 줄 때 돌아가라.”

우희의 눈이 사내들을 직시했다.

“지금, 당장.”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더는 인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내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얼른 자리를 떠야 했다. 본능이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들 앞에 있는 사람은 소천인 동시에 소천이 아니다. 귀신에 홀린 듯한 와중에 그것만은 알아차린 모양이다.

“하, 오랜만에 신선의 위엄을 보였군.”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는 자들의 뒷모습을 보며 우희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도력 충만한 원래 몸이었으면 눈동자 색깔도 바뀌었을 텐데. 그 모습을 본 인간은 백이면 백 바지를 적시며 벌벌 떨곤 했다.

하지만 놈들을 혼쭐내 주고 싶다곤 해도, 아름답게 꾸며진 실내에서까지 그런 추태를 보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진심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게 만들었잖아.’

우희는 완벽한 마무리를 위해 왕비궁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대장을 불렀다. 그에게 눈빛이 사나운 호위병 둘을 뽑아 왕부 담장이 끝나는 곳까지 심가 사내들 뒤를 따라가라고 명했다. 검을 찬 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로 손쓸 필요는 없이 사내들의 뒷모습을 노려보면 된다고 하였다.

대장이 왕비의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놈들은 한동안 단왕부 쪽으론 발도 뻗지 못할 것이다.

“흉한 존재가 물러갔으니 이제 소천의 자매들을 구출해 볼까.”

한 시진 뒤.

아직 앳된 얼굴의 규수들이 상아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왔다. 같은 가문 사람이긴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친척 언니가 아닌 왕비다.

까마득히 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불려온 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규수들은 긴장을 지우지 못한 표정이었다.

우희는 먼저 편안히 앉기를 권한 다음, 상대가 몸 둘 바를 몰라 할 때까지 미소 띤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규수들은 예뻤다. 심소천에 비할 정도는 아니나, 미인 많은 황도에서도 뒤를 돌아보게 할 수준이었다.

‘평북 심가는 사내만 그 모양 그 꼴인 거야?’

이미 사라진 낯짝들을 떠올려 무엇하리. 우희는 규수들에게 일종의 제안을 할 작정이었다.

“백부님과 오라버닌 한 시진 전 평북으로 떠나셨다. 그분들 말씀대로라면 너흰 전하의 측실이 되어야 하겠지. 하나 전하께서 이를 원치 않으실 뿐 아니라, 너희 역시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어떤 여인이 측실의 삶을 꿈꾸겠느냐. 안 그래도 인간계는 여인에게 혹독한데 말이다.”

규수들은 너무 긴장한 탓에 평소 접하기 어려운 단어가 들린 줄도 몰랐다.

가문 어른들도 떠난 곳.

이제 자신들의 처분은 오롯이 단왕비의 몫이었다.

“너희에게 측실이 아닌 전하의 처제라는 명분을 줄까 한다. 왕부 밖에 거처와 시중들 사람을 마련할 테니, 너흰 거기서 머물며 원하는 것을 하는 게 어떠하냐. 공부를 하고 싶으면 선생을 붙여 줄 것이고, 혼인을 원한다면 마음에 차는 짝이 나타날 때까지 자리를 주선하여 줄 터.”

우희가 생긋 웃었다.

“대신 전하만은 내 것으로 남겨 두자꾸나.”

규수들이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평북에 돌려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 썩은 곳에 가 봤자 뭘 하겠느냐. 돌아간들 또 누군가의 아내나 측실로 떠밀리지 않을까.”

우희는 규수들을 일으키고 젖은 뺨을 닦아 주었다.

“그러느니 여기서 새 삶을 찾는 게 낫지.”

상아는 눈물 많은 아이답게 본인 일도 아닌 일에 손수건을 꺼냈다. 망할 놈들을 혼내는 것도 좋지만, 선업을 쌓는 일에 이토록 흐뭇하다니.

역시 하우희는 타고난 신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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