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내를 볼 땐 세 가지를 기억하렴
“그럼 순남 지역은 이렇게 처리하도록 하지.”
“예, 전하.”
책사와 업무를 논하다 보면 목이 타기 일쑤다. 서로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잊고 대화를 하기 때문이다.
요 며칠 이겸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일의 해결 방향이 잡히고 나자 겨우 차를 들이켤 수 있었다. 상대도 한참 전에 식은 차를 예사로 마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푸르스름한 하늘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을 이루었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륜언에게 운을 띄웠다.
“오늘 연회장에서의 위화감을 자네도 느꼈나?”
보고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차를 마시던 륜언이 잔을 내려놓았다.
“마마의 친정 인간들 말씀이십니까.”
경멸이 가득한 말투였다. 륜언은 호불호가 뚜렷한 성격인 데다 싫음에 대한 이유가 명확했다.
3년 전, 책사는 왕비의 친정에 대해 알게 되자마자 혼담을 거둘 의사가 없는지 여쭈었다. 사실 그건 일반적인 여쭘 정도가 아니라 비난에 가까웠지만.
평생 혼인을 하지 않으셔도 상관없다. 한데 왜 굳이 평북 심가여야 하느냐. 전하의 짐이 되면 되었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가문이다.
책사에게 마땅한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꿈속의 소녀가 꼭 소천과 혼인하라고 하였다. 본왕도 찜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왠지 그녀의 말을 무시하면 안 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륜언의 사람됨을 알기에 더더욱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진이겸도 신점(神占)이나 예지몽 등을 믿지 않는 부류나, 장륜언은 이겸보다 몇 배는 더한 인물이다. 책사는 납득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를 굴리다가, 심가가 주군을 협박 중이라는 결론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주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밀히 손을 쓸 수도 있을 터.
이겸 또한 소천의 가문 사람들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나, 그들의 몰살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누구보다 실리를 추구하지만 취향만은 남달리 고상한 륜언은 첫 대면에 왕비의 친정과 선을 그었다. 해마다 사람을 바꿔 가며 찾아오는데 어쩜 하나같이 무례한지 모르겠다며 경멸을 감추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륜언의 원망은 왕비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왕부의 안채를 차지하고 앉은 무력한 종이 인형.
그것이 소천을 보는 륜언의 시선이었다.
“마마께 무릎 꿇고 이마를 찧더군요. 끔찍하게 하기 싫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하긴 했죠.”
륜언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였다.
“듣자하니 어제 왕비궁에서는 호위병을 움직이셨다고 합니다.”
“호위병을?”
“예를 갖추지 않겠다고 버티는 자들에게 호위병으로 겁을 주셨다지요.”
책사는 처소에 틀어박혀 일만 하는 것처럼 보여도, 황궁부터 변경에 이르기까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고 있었다.
그러니 륜언이 왕비궁 소식을 알고 있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드디어 본인 손에 쥔 패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셨나 봅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마마의 위신을 세우고자 하는 점은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마마의 위신이 곧 단왕부의 위신이니까요.”
“그리 호평할 일인가?”
이겸의 말에 책사가 설핏 웃었다.
“호평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저 다행이라고 했는데요.”
“자넨 평가에 박한 인물이야. 본인도 알고 있겠지?”
“절 만족시키기란 굉장히 어려울 겁니다.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관하게요.”
륜언이 스스로 차를 따랐다. 그러더니 이겸을 향해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현재로선 전하께서 유일하십니다.”
“날 좋게 봐 준 것에 기뻐해야 할지, 그리 단언할 정도로 본인 안목에 자신이 넘치는 건지 헷갈리는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둘 다입니다.”
이겸에게서도, 륜언에게서도 엷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름다운 단왕은 찻잔 가장자리를 어루만지며 책사의 말을 곱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마마를 다시 봤습니다. 성격의 변화는 이미 알고 있던 바나, 전에 없던 위엄을 보이시기에 조금 놀랐습니다. 아랫사람을 다루는 데 능하시더군요.”
륜언이 잔을 기울이며 찻물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전의 마마보다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이것만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습관적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만지던 이겸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방금 책사의 말은 상당히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겸과 소천 사이에는 아무 감정이 없고, 굳이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미안함뿐이다.
소천의 뜻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혼담을 넣은 것. 그래 놓고는 끝내 다정한 남편이 되지 못한 것.
소천을 떠올렸을 때 이겸의 안을 주로 채우는 감정은 이러했다.
반대의 경우는 모르겠다. 소천은 남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짐작컨대 원망과 의구심 정도가 아닐까?
어째서 한 번 스치듯 본 게 전부인 자신에게 혼담을 넣었는지.
소천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눈은 늘 같은 질문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미안함과 의구심, 그리고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 듯한 거리감.
부부 사이 존재하는 감정치고 이상하다는 걸 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자신과 소천의 관계가 발전할 가능성은 없을 터다.
이게, 얼마 전까지 이겸의 마음이었는데.
‘뭐지……?’
이전보다 지금의 소천이 훨씬 좋다는 륜언의 말이 신경 쓰였다. 결코 다른 뜻으로 말한 게 아님을 아는데도 그랬다. 저도 모르게 ‘그런가?’ 하고 되물으려다 말았다.
날카로운 륜언은 그 짧은 한 마디에서 주군의 흔들림을 알아차릴 것이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륜언에게 자신의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전의 마마보다 지금이 훨씬 좋습니다.」
그러니까 그만 좀 떠오르라고.
이겸은 어금니를 지그시 문 채 차를 따랐다.
행동거지가 반듯하기로 유명한 단왕답지 않게 잔 밖으로 찻물이 몇 방울 튀었다. 자사호(紫沙壺)를 기울이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이었다.
책사가 보지 못했기를 바라며 탁자 위를 소매로 스윽 훔쳤다.
아까와 달리 차 맛이 썼다.
* * *
평북에서 손님들이 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매화의 보고에 따르면 첫날밤은 찜통 속의 만두처럼 푹 익고, 둘째 날은 온밤 내내 한기에 떤 손님들이 오늘 드디어 감기약을 청했다고 한다. 잠을 설친 탓인지 황도 구경은 고사하고 햇볕 아래 꾸벅꾸벅 졸기도 했단다.
우희는 감기약 대신 각성제를 내주라고 명했다.
‘백만 그릇을 마셔 봐라. 네놈들 콧물이 떨어지나.’
세 번은 안 당한다며 숙소 이동을 요구하기에 동쪽 별채로 옮기는 것을 허락하였다.
‘황제의 침전으로 옮긴다 한들 너흰 오늘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약효가 사라진 아침을 맞이해 보렴.’
코맹맹이 소리로 분노할 사내들이 떠오르자 퍽 즐거워졌다.
그리하여 오늘은 ‘옛다, 기분이다.’ 하는 심정으로 인간 소녀들에게 색선의 가르침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내 그간 너희에게 관심이 소홀했던 것 같구나. 슬슬 사내를 만날 나이가 되었지?”
“마마, 그 무슨 부끄러운 말씀이세요!”
꺅꺅 소리를 지르면서도 오늘의 주제가 싫지 않은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동료의 옆구리를 찌르며 짓궂은 눈빛을 보냈고, 옆구리 찔린 시녀는 상대의 팔뚝을 때리면서 입막음을 하였다.
벌써부터 분홍빛 계절을 즐기는 이가 몇몇 보였다. 색의 신선으로서 무척이나 기꺼운 풍경이었다.
“사내를 볼 때는 세 가지를 기억하면 되느니라. 예로부터 이를 삼상(三上)이라 하는데 마상, 장상, 누상이 그것이다.”
우희가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설명했다.
“첫째, 마상(馬上). 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자, 말을 타고 있는 사내의 무엇을 보아야 할까?”
갑작스런 질문에 시녀들이 당황했다. 용기 있는 누군가가 조심스레 손을 들더니 말했다.
“……얼굴이요?”
우희가 안타까운 듯 탄식을 흘렸다.
“허벅지다.”
“……!”
우희가 의자에 다리를 올린 뒤 자신의 허벅지를 짝 내리쳤다.
“사내의 활력은 무릇 이 허벅지에 달린 것. 지나치게 가늘거나, 물렁살이거나, 보기에만 그럴듯하게 가꾼 것은 모조리.”
손날을 세워 목 치는 시늉을 하였다.
“갖다 버려라.”
전에 없는 파격적인 강습에 시녀들이 침을 삼켰다. 우희가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허벅지 힘으로 수박 한 통은 부술 수 있어야 하느니.”
“수박…… 한…… 통.”
우희가 다시 한 번 허벅지를 소리 나게 쳤다.
“기억하렴. 말 위의?”
“허벅지.”
다들 입을 모아 주인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다음은 장상(牆上), 담장 위로 얼굴을 내민 모습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이겠느냐?”
더욱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손을 드는 아이가 있었다.
“……얼굴?”
우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발받침의 여부다.”
“헉.”
너무나 개탄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 가는 우희였다.
“아무리 세태가 각박하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게 있거늘, 흉측하게도 자신의 키를 속이는 자가 있다. 그것이 한 치 남짓이면 용납 가능할 터.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고 두 치, 세 치, 네 치 점점 더 높아지니 신혼 침상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속았음을 깨닫는 것이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아담한 미남자를 좋아하는 이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경고하고픈 것은, 작은 자신에 위축되어 공연히 여인까지 괴롭히는 놈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담장 위로 얼굴을 내밀고 훤칠함을 주장하는 자들을 믿지 말 것.”
누군가 손바닥에다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왕비궁이 때아닌 학구열로 뜨거워졌다.
“마지막으로 누상(樓上), 누각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에야말로…….”
“얼굴이니라.”
일관성 하나는 대단한 아이였다. 시녀가 활짝 웃으며 만족감을 표했다.
“사내의 얼굴을 뜯어먹고 사느냐는 소리가 1만 년 전부터 들리는데, 귀담아들을 가치도 없는 개소리이니 무시하도록 하여라.”
우희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온갖 헛소리를 접하게 될 것이야.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이거라며, 너흴 움츠러들게 만들 것들. 세상 이치에 어두운 사람처럼 느끼게 할 것들. 부디 청컨대 미혹되지 말거라.”
왕비는 힘차게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이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얼굴은 중요하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한다.
“미남을 취하여라.”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동이 넘실대는 얼굴로 손뼉 치던 시녀는 뒤늦게야 손바닥 필기를 깨닫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옆에서 동료가 세 가지 조건을 상기시켜 주었다.
뜨거운 호응에 뿌듯해진 찰나였다. 기둥 너머에서 울림이 그윽한 음성이 들려왔다.
“독특한 견해십니다.”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단왕에게 예를 갖췄다.
“본왕도 삼상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습니다. 하나 그것은 사내의 조건이 아니라, 사내를 설레게 만드는 여인의 모습이었는데요.”
“혼자 마음이 동해 놓고 여인의 탓으로 돌리니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우희가 나긋한 걸음으로 이겸을 향해 다가갔다.
“진즉에 바꿔야 하는 이야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고심 끝에 고친 것이랍니다.”
“이제 보니 왕비께서 스스로 정립한 의견이군요.”
“탄복하셔도 좋아요.”
우희가 화사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본왕은 어떻습니까?”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우희가 눈을 깜빡이자, 이겸이 시선을 빗긴 채 다시 물었다.
“삼상의 조건에 부합합니까?”
허벅지, 키, 미모. 우희의 눈에 들어차느냐는 뜻이었다.
기품이 배어나는 수려한 얼굴로 딱히 안 궁금한 척하며 답을 기다리는 자태라니.
‘귀여워 죽겠구나. 혹시 나 침을 흘리고 있진 않을까?’
우희가 눈을 곱게 접으며 이겸의 팔에 매달렸다. 기회가 날 때마다 가까이 붙어서, 상대가 몸이 닿는 상황에 빨리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전하야 부합하고도 남으시죠. 다만 두 가지는 알겠는데…….”
우희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하나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정말이지, 왕비께선 단번에 화제를 그쪽으로 이동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새로 얻은 재주가 어떠세요?”
이겸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점심을 여기서 들까 하여 왔습니다.”
깜찍하게 말 돌리기는.
우희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리를 이동하며 팔짱이 풀리긴 했지만, 욕탕에서의 그날처럼 즉시 내치지 않은 점은 주목할 만했다.
첫 번째 조건을 확인할 날이 한발 앞으로 다가온 것 같아 즐겁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