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신선-8화 (8/100)

8화. 전하는 고자랍니다

다음 날 정오.

우희는 왕부 내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봉긋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소천이 혼인할 적 이겸으로부터 받은 취옥 비녀를 꽂았다.

곱게 늘어뜨린 보요는 서른세 개의 작은 구슬을 꿰어 만든 것인데, 우희가 걸음을 뗄 때마다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뒷자락이 길게 끌리는 물빛 예복은 몸의 원래 주인인 소천의 청초함을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몸단장을 도운 시녀들이 하나같이 뿌듯해하며 감탄할 만했다.

‘같은 얼굴이라도 분위기가 다르니까 꾸미는 재미가 있네. 색선 하우희도 이런 느낌을 낼 수가 있구나. 아주 재밌어. 신선해.’

우희 자신이 보기에 지금 모습은 청초함의 절정인데, 소천을 몇 년간 모신 시녀들의 감상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마마께선 점점 그윽한 분위기로 바뀌시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전에도 이 옷을 입으신 적 있는데 지금 같은 느낌이 아니었어요.」

「넋을 잃고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으세요.」

시녀들이 거울 속 우희를 보며 뺨을 붉혔다.

얘들아, 이건 색기란다. 하우희의 타고난 소질이 심소천의 몸 밖까지 풍겨 나는 거지. 자,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색기. 입 밖으로 내도 하늘이 무너진다거나 하지 않아요.

하나 기녀도 아니고 왕비에게 ‘색기가 넘치세요!’라는 말을 꺼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시녀들이 최대한 고상한 표현으로 우희를 추어올리는 까닭도 이해되었다.

“단왕비 마마께서 드십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이겸의 수하들이 일어나 예를 갖췄다. 우희는 가벼운 눈인사로 답을 대신했다.

그때 벌겋게 익은 두 남자가 우희의 눈에 들어왔다.

찜통 같은 방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지 쾌적한 연회장에서 저들 둘만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시녀 상아가 주인의 귀에 대고 어젯밤 매화의 노고를 속삭였다. 매화는 잠을 아껴 가며 신나게 장작을 태웠다고 했다.

비록 잠은 못 잤지만 흥이 올랐던 매화와 달리, 심가 사내들은 더위와 졸음으로 죽을 지경처럼 보였다.

우희가 본인 자리로 이동하다 말고 심가 사내들 앞에 멈춰 섰다.

왕비가 아직 서 있으니 다른 사람들도 착석할 수 없었다.

‘동작 봐라.’

우희는 심가 사내들이 주변 공기가 이상함을 알아챌 때까지 미동도 않고 그들을 응시하였다.

‘아직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

우희와 먼저 시선이 마주친 쪽은 소천의 둘째 오라비였다.

짜증 가득한 얼굴로 냉차를 들이켜던 그는 우희와 눈이 마주친 이후로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어서 소천의 백부가 우희를 인지했다.

종3품 장군 위세준도 서 있는 판국에 관직 없는 심가 사내들이 앉아 있는 건 말이 안 됐다. 하나 이전에 단왕부를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다른 사람이 일어나건 말건 꿋꿋이 자리를 지킨 듯하였다.

아마 소천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단왕부 사람들은 왕비가 가만히 있는데 굳이 문제 삼을 필요성을 못 느꼈을 터다.

아니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심정으로 무뢰한들을 못 본 척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언니가 온 게 아니냐. 처음부터 싹을 잘랐어야 하는 놈들을 너무 오랫동안 봐줬어.

우희는 심가 사내들을 빤히 보며 예복 소매 사이로 손을 들었다. 천천히 다섯 손가락을 펴 보이자 심가 사내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섯 조각을 기억하렴.’

우희가 어제 응접실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사내들은 몹시 당황하다가,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왕비에게 무릎을 꿇었다.

‘무릎은 접혔는데 이마가 땅에 닿질 않네?’

다섯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끈하는 기색이었지만, 다섯 조각의 고사 앞에서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다. 무릎을 꿇는 정도로 넘어가려 했던 둘은 더없이 느리게 이마를 찧었다.

비로소 왕비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일어나세요.”

“감사……하옵니다, 마마.”

“감사하옵니다.”

뒤에서 따르던 상아의 어깨가 마치 대장군의 그것처럼 빳빳하게 펴졌다.

우희는 다시 소매 안으로 손을 감춘 뒤 이겸의 옆자리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늦어서 죄송해요, 전하.”

“……딱 맞춰 오셨습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우희가 이겸을 향해 웃어 보였다. 보면 볼수록 어쩜 이렇게 귀하고 탐나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대낮부터 최상급의 미남으로 눈을 씻으니, 비록 양기 섭취를 못하는 날이 계속되고 있어도 견딜 만한 것 같았다.

이것 보라. 이겸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 달콤한 웃음이 절로 새어 나온다.

“그건 그렇고 백부님과 오라버닌 간밤에 푹 주무셨나요? 누운 자리가 바뀌어 잠을 설치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어디서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이 있다면 제 시녀 매화에게 말씀해 주세요. 매화가 확실히, 챙겨 드릴 것입니다.”

이를 몽땅 뽑으면 이 가는 소리가 나지 않을 테지.

대충 그런 뜻이 담긴 미소를 친정 손님들 쪽으로 보냈다.

“어머, 어찌하여 다들 절 쳐다보고 계실까요? 드시면서 이야기해요.”

남자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혼이 나간 채 젓가락을 놀렸다.

우희는 이번에야말로 맛있는 매실주를 식사에 곁들여 즐겼다는 후문이었다.

* * *

“단왕비께선 우릴 죽일 셈이십니까?”

연회가 끝난 뒤 왕비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둘째 오라비가 왈칵 성질을 부렸다.

“매화라는 그 계집애가 우릴 방에 가두고 밤새 장작을 미친 듯이 태웠습니다. 어찌 되먹은 건물이 창문도, 출입문도 모조리 밖에서 잠긴단 말입니까? 예? 그게 감옥이 아니고 뭡니까!”

“좋은 요리를 대접받아 놓고 이 무슨 추태입니까.”

우희가 실을 꿴 바늘을 움직이며 나긋하게 말했다.

멀리서 보기엔 정숙한 왕비가 자수를 놓는 중인 것 같지만, 옆에서 부채질을 하는 상아의 콧구멍이 연신 벌름거렸다.

우희가 한 글자를 완성시킨 뒤 만족스러운 양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나 나비가 아니라 바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마저 삐뚤빼뚤하기 짝이 없어 수틀을 처음 잡는 사람의 솜씨인 게 티가 났다.

‘난생처음 하는 걸 이토록 잘할 수가. 색선이 아니라 침선(針仙)이 되었어도 이름을 떨쳤겠어.’

언제나 스스로에게 너그러운 우희였다.

“저는 열과 성을 다해 모시라고 하였을 뿐인데, 아무래도 매화가 좀 과했나 보지요.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오늘은 어제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요.”

“흥, 두고 보겠습니다.”

“한데 이번엔 어떤 이유로 황도에 오신 건가요? 아까 얼핏 듣기로 두 분만 오신 게 아니라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위가 가신 덕분인 듯하다. 이제는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온 소천의 백부가 우희의 말을 받았다.

“그러합니다. 다른 이들은 지금 객잔에서 머물고 있지요.”

“왜 함께 오지 않으시고요.”

“가문의 여아 둘을 데리고 왔습니다.”

백부가 자못 점잖은 품새로 차를 마셨다.

“혼인하신 지 어언 3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마마의 섬약한 몸을 걱정하여 침소에도 들지 않으신다는 소문이 도는 걸, 마마 또한 귀가 있다면 아실 테지요.”

“아무리 그래도 3년은 너무 면구스러운 공백입니다. 대를 잇지 못하는 왕비라니, 이 무슨 가문의 수치입니까?”

“그도 모자라 물에 빠지는 사고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요.”

조카와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어가던 백부가 혀를 쯧쯧 찼다.

“하여 가문에서 음전한 아이 둘을 뽑았습니다. 전하의 측실로 바칠 것입니다. 마마께서 왕비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니 우리가 이토록 애를 써야 하는군요.”

“잠깐.”

우희가 수틀을 내려놓았다.

“측실이라뇨? 전하께선 저 외의 다른 여인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는데요.”

“전하야 워낙 단정한 분이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가문으로서는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3년입니다! 3년! 도무지 평북 땅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단 말이에요.”

그럼 숙이고 다니든가.

우희가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책임감이란 게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마마께서 나서서 여아들을 별채에 들어앉히도록 하시지요.”

“……이 이야기를 전하도 아시나요?”

“객잔에 일행이 묵고 있는 정도만 아십니다.”

“그 일행의 ‘용도’는 모르고요?”

“그러합니다만.”

우희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판을 짜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내심 소천과 몸이 뒤바뀐 게 잘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시점이 아주 기가 막혔다.

소천이 몸을 회복하자마자 이딴 놈들의 방문을 겪었어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놈들의 관절을 어여쁘게 분지르고픈 충동이 일었다.

왕비의 도리? 대를 잇지 못하는 수치? 여아를 바쳐?

측시이일?

본디 색의 신선 하우희는 정조 관념 따위 개똥 보듯 하는 몸이지만, 지금은 소천의 편에 서 있는 만큼 이야기가 달랐다.

심소천은 단왕 진이겸의 유일무이한 비(妃)여야 한다.

안 그래도 힘든 소천의 삶에 첩 문제까지 더해 주고 싶지 않았다.

친정이 그녀를 숨 막히게 하긴 해도, 어쨌든 소천 또한 가문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몸. 눈앞에서 측실들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니면, 이겸에게 감정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엄청난 압박감을 느낄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백부님께서 이렇듯 마음을 써 주시니 소천이 어찌 사양하겠어요. 감사히 받아들이지요.”

상아가 놀란 나머지 부채질을 멈추고 말았다. 우희는 수틀을 건네며 자신의 침상 머리맡에 놓고 오라고 말했다. 나머지 시녀들에겐 차를 다른 종류로 바꿔 오길 명했다.

세 사람만 응접실에 남게 되자 우희가 비로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전하께 후사 문제를 언급하셨나요?”

“방금 뭘 들으신 겁니까? 이는 마마께서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 하셨다는 뜻이네요. 다행입니다.”

우희가 짐짓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가 절대 이 응접실 밖으로 나가선 아니 될 것입니다. 상아마저 내보낸 덴 이유가 있거든요.”

얘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는지 사내들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무엇입니까?”

“단왕 전하는…… 고자랍니다.”

시선은 우희에게 둔 채 차를 마시던 둘째 오라비가 입안에 머금은 찻물을 장렬히 뿜었다.

백부는 제 귀를 의심하며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예, 고자요.”

“…….”

“통탄스러운 일이지요.”

“……아, 아니, 그것이. 어, 어쩌다가. 아니.”

우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사부님과 사형, 사저들을 껌뻑 넘어가게 한 소싯적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혼례식을 올린 당일 밤 직접 털어놓으셨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와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겠다고 결심하였지요.”

“그러니까…… 하, 한 번도? 이전에도…… 전혀?”

우희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들은 누가 와서 뒤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한 듯한 얼굴이 되었다.

“전하께선 이를 무척…… 의식하고 계십니다. 비밀을 아는 자는 왕부 안에서도 손꼽을 정도죠. 한데 이 시점에서! 백부님이 후사 이야길 들이밀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자신이 저지를 뻔한 실수의 무게에 중년사내가 손을 벌벌 떨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여아들은 황도에 두고 가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세상에나…….”

“이쯤에서 제가 두 분께 일깨워 드리고 싶은 점은, 고작 이런 이유로 단왕부와의 연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황망함을 감추지 못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정색했다. 잠깐 집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두 분이 책임지고 가문사람들의 입을 단속해 주세요. 아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평북 일은 두 분만 믿겠습니다. 하면 이만 돌아가 쉬시지요.”

우희는 다시 얼빠진 얼굴이 되어 응접실을 나가는 사내들을 지켜보았다. 사내들이 물러나자 상아를 비롯한 시녀들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마마, 괜찮으시어요?”

“난 무사하다. 저들이 좀 웃기게 되었지.”

우희가 어깨를 떨다가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손님들이 간밤에 더웠다고 하시는구나. 오늘은 이불을 여름용으로 바꿔 드리고, 방 안의 조그만 화로들을 빼렴. 저녁은 차갑게 먹는 요리 위주로. 그리고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잠근 다음 환기구를 모조리 개방하여라.”

“아직까지 새벽엔 공기가 서늘한데요.”

“맑고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셨으면 좋겠구나.”

왕비의 미소에 시녀들이 깨달음의 눈짓을 주고받으매, 화창한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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