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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7화 (7/100)

7화. 신선 언니의 서열 관리

“매화 차례야.”

“동백이 차례 아니었어?”

“하도 웃어서 정신이 없네. 난 홍련이 차례인 줄 알았지 뭐야!”

“마마는 누구 차례인지 기억하세요?”

시녀들이 일시에 우희를 쳐다보았다. 오늘도 왕비궁은 놀러 온 시녀들의 웃음소리에 햇살처럼 밝은 분위기였다.

우희는 향긋한 수국차를 홀짝인 뒤 매화라는 이름의 시녀를 가리켰다.

“거 봐! 내 말이 맞았지?”

순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시녀가 왕비의 동조에 으쓱해하였다. 멈춰 있던 놀이판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희가 눈을 뜬 첫날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처음엔 달라진 왕비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시녀들이었다. 하지만 귀가 솔깃한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고, 간식을 마음껏 먹게 하고, 온갖 유희로 즐겁게 해 주는 주인에게 빠른 속도로 마음을 열었다.

왕비의 성격이 바뀐 것은 크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원의 말도 한몫했을 터.

하나 역시 어딜 가든 환영받는 색의 신선 하우희의 매력 덕분이 아닐까?

우희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겸은 이토록 많은 놀이를 언제 다 익혔느냐고 물었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선계에서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신선놀음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나.

“두 번째가 거짓말이야!”

“난 첫 번째 같은데?”

한창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었다. 우희의 허락을 받고 낮잠을 자러 갔던 시녀 상아가 허겁지겁 처소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마엔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마마…… 큰일이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사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런 얼굴이냐?”

“흑…….”

“일단 이야기부터 해 주고 울면 안 될까?”

상아가 코를 훌쩍였다.

“평북에서 사람을 보냈습니다. 마마의 백부님과 둘째 공자께서 오셨어요.”

보고가 끝나길 기다리던 시녀들이 하나같이 날카로운 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우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 상황은 뭐지.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느냐?”

그동안 상아 다음으로 왕비를 가까이서 모셨던 매화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친정분들이 다녀가고 나면 마마께선 며칠을 앓아누우셨거든요. 미음조차 못 넘기시고 침상에 누운 채 떨기만 하셨답니다.”

“그래?”

“기억이…… 안 나시겠지만요.”

모두들 왕비가 친정 손님에게서 정확히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평북의 평 자만 들려와도 새하얗게 질린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우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손에 쥔 찻잔을 천천히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존체가 미령하다는 핑계를 댈까요? 그렇게 접견을 미루는 거지요. 친정분들도 하염없이 왕부에 머물 순 없을 테니까 며칠만 버티면 포기하고 돌아가시지 않을까요?”

함께 놀면서 정이 붙었을까나. 또 다른 시녀가 왕비를 보호한답시고 나름대로 꾀를 짜냈다.

상아가 울먹한 눈으로 우희를 보았다. 벌써부터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친정에서 사람을 자주 보내니?”

“그리 자주는 아니옵니다. 1년에 한 번, 어쩔 땐 두 번이요. 하지만 작년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얼굴을 비추셨습니다.”

“그때마다 심소……천인 나는 앓아누웠고?”

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도 뭔가 이상하셨는지 올해엔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물론 왕부가 바쁠 것 같다는 이유를 드셨지요.”

우희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왕비에 비해 시녀들의 표정은 이미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우희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손님들이 가고 난 다음의 내 몸에 상처 같은 건 없더냐?”

상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매질을 당했을까 걱정하시는 거여요? 아니옵니다. 그런 흔적은 보지 못했사옵니다. 아무리 친정분들이라도 존체에 손을 대실 순 없어요. 마마께선 단왕비. 황제폐하의 제수이신걸요.”

“하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멀쩡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우희의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손으로 해치지 않았다면…….”

형체가 없는 칼로 심소천을 찌른 것이다. 그들이 쓴 무기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말(言).

평생 가문의 사람들에게 시달린 소천이었다.

숨소리 한 번 못 내고 살아온 아이를, 멋대로 혼인시킨 후에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학대하다니.

소천아, 이 언니가 네 자리를 싹 정리해 주고 가겠다던 언약 기억하느냐?

그 첫 번째 대상이 제 발로 찾아온 것 같구나.

우희는 찻잔에 남아 있던 수국차를 단번에 털어 넣었다. 탁자 위에다 빈 잔을 내려놓는 힘찬 소리에 시녀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들라 하라.”

“예? 지, 지금 바로 말씀이신가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好).”

우희의 아름다운 얼굴에 단풍보다 붉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성의에 보답해 드려야지.”

올 땐 두 발로 걸어왔겠지만, 나갈 땐 네 발로 기어야 할 것이다.

* * *

“몸은 멀쩡하다더니 과연 사실이구나. 오히려 안색이 훨씬 좋아 보인다.”

소천의 백부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꺼낸 말이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둘째 오라비란 자 또한 백부와 똑같이 행동했다.

우희는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턱을 괸 채로 책장을 넘겼다.

상아는 우희의 옆에 서서 예쁜 금붕어 자수가 놓인 부채를 천천히 부쳐 주고 있었다.

“소천아, 자세가 음전치 못하구나.”

백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읽고 있는 책 제목은 무엇이냐? 요즘 유행한다는 통속소설은 아니겠지? 넌 단왕 전하의 정비이니 저잣거리 여인들처럼 행동해선 아니 된다. 그건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짓이야.”

“심소천, 백부님이 묻고 계시지 않느냐.”

우희가 책장을 팔락 넘겼다. 그녀는 심가 사내들이 응접실 문을 넘는 순간부터 단 한 차례도 그들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심소천, 이 무슨 무례냐!”

둘째 오라비가 손가락질을 하며 그녀를 꾸짖었다.

“몸은 멀쩡하되 사람이 달라졌다더니 네 정녕 실성한 것이냐.”

“오라버니, 진정하세요. 전 잠시 독서에 정신이 팔린 것뿐인데 이리 화를 내시니 민망하네요. 게다가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여전히 시선은 책에 둔 채로 우희가 말을 이었다.

“밖에서 들으면 단왕비의 오라비가 누이를 때리는 줄 오해하겠어요.”

“무슨 헛소리냐!”

“백부님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전 지금 혜량왕의 고사를 읽는 중이랍니다. 마침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오네요.”

우희가 목을 가다듬었다. 이내 낭랑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왕이 외숙의 목을 치고 그 시신을 다섯 조각 내어 도성 밖에 버리라 하니 사람들이 반대하였다. 오직 왕비만이 이렇게 말했다. 황용춘은 왕위계승을 도운 공이 있긴 하나, 점점 무례함이 하늘을 찌르기에 살려 둘 수 없다. 제아무리 1품대신이어도 왕의 앞에서 예를 갖추지 않음이 말이 되는가? 이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매끄럽게 윤을 낸 손톱 끝이 책장을 톡톡 두드렸다.

우희가 빙긋이 웃었다.

“목을 치고 시신을 다섯 조각 내다니, 그래도 혜량왕이 많이 봐주었네요. 조각부터 내고 목을 칠 수도 있었잖아요. 듣자하니 거열형이 참 고통스럽다던데.”

“혜량왕의 고사라면 백부님과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굳이 읽을 필요까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매화야.”

둘째 오라비의 말을 공기처럼 흘려버리며 우희가 시녀를 불렀다.

“내가 책에 빠져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는데 혹시 손님들이 단왕비께 인사를 올렸느냐?”

“마마께 아뢰옵니다. 예를 갖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런.”

우희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놀라는 척하고 있는데 너무 성의 없이 놀라는 게 모두의 눈에 빤히 보였다.

“오랜만의 접견이라 깜빡 잊으셨나 보다. 당장이라도 다섯 조각 내서 활활 불태워 버리고 싶지만 이 몸은 온화하기로 유명한 단왕비 심소천이 아니냐.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드려야겠지.”

우희가 탁자에서 몸을 떼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두 사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백부님, 오라버니. 왕비께 예를 올리시지요.”

사내들은 우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자기들끼리 시선을 교환하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요.”

우희가 인사를 재촉하며 미소 지었다.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그러는 백부님이야말로 본인이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우희는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시녀를 재차 호출했다.

“손님들께 왕부의 예절을 알려 드리도록 하렴.”

“예, 마마. 손님이 단왕 전하와 같은 계급이시라면 허리를 세운 채 얼굴 앞으로 두 손을 모아 인사하시면 됩니다. 조정대신이라면 거기서 허리를 숙이며, 관직이나 품계가 없으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려야 마땅합니다.”

“시범을 보여 드리겠니.”

상아처럼 토끼머리를 한 시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머리를 숙이며 또렷하게 외쳤다.

“아무개가 단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잘하였다. 일어나라.”

“감사하옵니다.”

우희가 다시 심가 사내들을 보았다. 어라, 아직도 거기 앉아 있었어? 이런 눈빛을 쏘며 바닥을 가리켰다.

두 사내의 면상이 아주 볼만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우리 보고 네게…… 무릎을 꿇으라는 소리냐?”

“가문의 체면이 달린 일입니다, 오라버니. 설마 평북 심가 사내들이 단왕부에 무례를 범했다는 소문이 나길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요.”

“네, 네가 감히!”

“……감히?”

우희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응접실 문이 열리며 왕비궁의 호위병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서른 자루의 검이 우희의 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웃전에 인사 하나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살려 두어 무엇하겠습니까.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나 할 텐데요.”

“너……!”

“왕비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 대기나 하고 말입니다. 정말 형편없네요.”

우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역시 상대의 입에서 나온 말을 고대로 돌려주는 순간이 제일 짜릿하였다.

“언제까지 앉아 계실 참인가요.”

두 사내가 우희와 호위병을 번갈아 보았다.

“인사 기다리다가 해 넘어가겠어요. 지금도 제 귀엔 태양이 한 치 한 치 이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두 사내가 아주 느리게 일어섰다. 우희 앞에 선 그 순간까지도 자신들에게 닥친 일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다섯 조각…….”

“평북, 심가의, 오극.”

소천의 백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분질서가 엄격한 세상에서 얼마나 직립보행만 하고 다녔으면, 몸을 접을 때마다 관절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단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평북 심가의 소병이 단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소천의 둘째 오라비도 떨떠름히 인사했다. 사내들은 재차 눈을 맞춘 뒤 세상 느리게 상체를 숙여 이마를 찧었다.

‘조금만 더 느렸으면 내년이 됐을 거야. 그럼 신년 인사를 시켰을 텐데.’

우희는 사내들의 웅크린 등짝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선계에도 온갖 희한한 성질머리들이 널려 있다. 그들의 행태에서 상대를 단시간 내 가장 효과적으로 밟는 법을 배웠다.

‘뭐든 배워 두면 쓸모가 있을 거라더니 맞는 말이었네.’

혼자 조용히 웃고 있는데 어정쩡하게 웅크린 두 개의 몸에서 헛기침 소리가 자꾸 들렸다.

“이런, 잠깐 딴생각이 들어서요. 일어나도 좋아요.”

두 사내가 분함과 당혹이 뒤섞인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감사의 말은?”

우희가 그들이 놓친 것을 일깨워 주었다.

“……감사하옵니다, 마마.”

“감사하옵니다.”

“잘하셨습니다. 왕부에 머무는 내내 저와 마주칠 때마다 이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순간 우희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기별도 없이 오셔서 미처 일정을 비우지 못했답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내일 정오에 뵙도록 하지요.”

“뭐라고?”

“이제 물러감을 고하는 인사를 하세요.”

다시 무릎 꿇은 사내들이 귀신에 홀린 표정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호위병도 물러간 자리에 우희와 시녀들만이 남았다.

무서운 나리들 앞이라 시선조차 돌리지 못하고 부채질에 집중했던 상아가 감격의 울음을 터뜨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나은 것 같다는 말만 반복했다.

“참, 손님들의 거처를 정하였느냐?”

“늘 묵으시던 동쪽 별채를 드렸습니다.”

우희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내가 최고로 귀한 대접을 하랬다고 말하며 북쪽으로 옮겨 드려라.”

“북쪽 별채가 더 넓고 화려하긴 하지만 그곳은 지금 수리 중이옵니다.”

“안다. 문고리를 죄다 거꾸로 달아서 방 안이 아닌 방 밖에서 잠글 수 있지 않느냐.”

“어머나.”

영특한 구석이 있는 매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우희도 마주 웃었다.

“주무시기 전엔 인삼탕을 내어 드리고 밤새도록 장작을 태우렴. 이달 치를 모두 써도 좋다. 어차피…… 곧 계절이 바뀔 테니까.”

“명 받잡사옵니다.”

우희가 손을 뻗어 상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빨개진 코끝을 가볍게 치고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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