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상식인 진이겸의 혼인
봉무국 황제만큼이나 바쁜 단왕 진이겸. 그가 낮 시간을 빼서 의원을 접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고 전후로 너무도 달라진 왕비 소천 때문이다.
의원들은 자꾸 왕비의 몸에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이겸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전쟁터의 참상을 목격한 이후 충격에 빠지는 병사는 여럿 보았다.
공을 쌓아 진급하겠다고 외치던 이들이 전투를 한 번 겪은 뒤엔 막사 밖으로 나가길 두려워할 정도로 움츠러드는 모습은 이겸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안타깝지만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천의 행각은 이들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얼마 전 물에 빠져 죽을 위기를 겪었으나, 왕부 내의 큰 연못가를 태연하게 산책하고 다녔다. 딱히 물을 겁내는 기색도 없는 데다, 의식을 찾은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딴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언젠가 읽은 의학책에서 사람이 머리에 큰 부상을 입으면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고 한 게 떠올랐다.
혹시 물살에 쓸려가다가 바위에 머리를 부딪친 게 아닐까. 겉보기엔 괜찮다고 놔뒀다가 1년이나 2년 뒤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되었다.
하여 단왕부와도 인연이 깊은 고명한 의원을 부른 것이다.
그는 사고 전의 왕비를 알고 있었다. 그라면 지금 이겸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였다.
“어떤가? 이미 세 명의 명의에게 보였지만 하나같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였네. 그들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왕비의 상태가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겸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보기에도 왕비가 괜찮은 것 같나?”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의원이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간차를 두고 발생하는 후유증을 염려하시는 게지요. 사실 후유증이란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려워서, 아무리 뛰어난 명의라도 발병 시기를 예측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오늘 소인이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왕비마마의 몸이 정말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의원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열 명 중 대여섯이 달고 있는 흔한 감기 기운조차 없더군요. 자극에 대한 반응도 정상이고요. 마마의 존체에 관해선 안심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겸이 손끝으로 찻잔 가장자리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이겸을 근심 속에서 꺼낸 것은 의원의 초연한 음성이었다.
“한데 정말 다르긴 다르더군요. 마마께 쌍둥이 자매가 있다면 두 사람이 잠시 자리를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바로 그 말이네.”
“손목 위의 상흔이 아니었다면 소인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을 겁니다.”
의원이 말하는 상흔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소천이 왕부에 들어온 첫 해, 이겸에게 직접 차를 올리다가 화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남편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었다.
그냥 뜨거운 물을 쏟은 것도 아니고 화로에 피부가 닿아서, 물집이 아문 자리엔 엄지손톱 크기의 흉터가 남고 말았다.
당시 소천의 상처를 치료한 이가 지금 이겸 앞에 앉아 있는 의원이었다. 환자의 용모는 잊어도 환부는 기억하는 게 의원인지라.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이겸도 욕탕에서 소천과 마주쳤을 때 진홍색 상흔을 확인했다.
소천은 소천이었다. 용모가 같은 사람끼리 자리를 바꾼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의원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실은 이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전까지 억눌려 있던 또 다른 인격이 사고를 계기로 드러난 게지요.”
“또 다른 인격?”
“예, 자주 있는 일은 아니나 아예 전례가 없는 일도 아닙니다.”
의원이 차로 목을 축인 뒤 말을 이었다. 주름진 얼굴엔 어느새 젊은 왕비를 퍽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평북 심가(家)는 예로부터 여아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가풍이라지요. 마마께선 어렸을 적부터 가문의 지엄함에 억눌려 숨죽인 채 지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심가 사내들이야 밖에 나가서 누이의 정숙함을 으스대기 좋았을 테지만, 한창때의 소녀에겐 가혹하기 그지없는 환경입니다.”
의원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다 단왕부로 오셨지요. 소인이 보기에 이곳은 마마의 친정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온화한 분위기입니다만.”
의원의 눈이 어째서인지 이겸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집무실 밖을 쳐다보았다.
“마음을 붙이시기엔 어려웠을지도요.”
“방금 좀 묘한 눈빛이었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분이라 다행입니다.”
의원이 다시 차를 호로록 들이켜더니 일어날 채비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도 있고, 영영 아니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마의 존체가 무탈한 데다, 바뀐 인격도 사람을 해하려 드는 나쁜 모습이 아니지요. 그저 이전에 비해 과하게 활발할 뿐이라면 전하께서 한발 물러나 주시는 게 어떨까요.”
의원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마마께서 누리지 못한 시간을 뒤늦게 맞이하는 중이라고 여기시면서요.”
“……알겠네. 그 말을 듣고 보니 마음이 좋지 않군.”
“소인의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이겸은 홀로 남았다. 조금 열어 둔 창문 사이로 봄 햇살이 스며들었다.
소천이 단왕부 문턱을 넘던 날도 이처럼 날씨가 화창했었다.
황제가 태감 손에 진귀한 보물을 들려 보냈고, 각국의 사신이 찾아와 축하인사를 건넸다. 선물을 실은 수레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황제의 유일한 동복아우, 단왕, 15만 병사의 수장이자 표기장군.
그런 이겸의 정비를 맞이하는 날이니만큼 혼례식은 대단히 성대하였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선남선녀의 맺어짐을 축하했다.
오직 혼인 당사자인 부부만이 굳은 표정이었다.
손님들은 이를 두고 예식 당일이라 긴장한 것이라고 여겼다.
둘은 가문의 이득에 따라 맺어지는 정략혼도 아닌 데다 서로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긴장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신방 화촉 아래서 본 얼굴엔 미소도, 눈물도, 아무 감정도 없었지.”
이겸은 어느덧 아득해진 기억을 떠올렸다.
“깊디깊은 체념뿐.”
먼저 혼담을 넣은 쪽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신방에 든 이겸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
후회와 혼란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로 무거운 관과 혼례복을 벗겨 준 다음, 옆방으로 건너가 밤을 지새웠다. 신방에 혼자 남은 소천 또한 편히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봉무국의 어떤 규수와도 혼인할 수 있는 단왕이, 3년간 동침도 하지 않을 심소천에게 혼담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야기를 하려면 제법 오래전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시작은 꿈이었다.
이겸이 황자이던 시절. 아마 열한 살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꿈속에 이름 모를 소녀가 등장했다. 눈 아래를 하얀 너울로 가린 소녀는 몹시도 씩씩하고 귀여웠다.
소녀는 이겸보다 어려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황자가 말하는 어려운 고사 성어를 다 알아들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이유를 조심스레 물어본 건, 꿈속에서의 만남이 네 번째에 이르렀을 때였다.
때가 되면 그때 보여 주겠다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본인이 너울을 벗고 싶지 않다는데 억지로 명령하고 싶지 않았다.
소녀는 명령이 필요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 낯설면서도 특별한 관계에, 열한 살의 황자는 조금씩 빠져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어쩔 땐 두 달에 한 번. 꿈속의 소녀와 어울려 놀았다. 신기한 건 현실의 이겸이 나이를 먹을수록 소녀도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너울 너머로 짓는 미소에 더는 귀엽다는 표현을 쓸 수 없게 된 어느 계절이었다.
『이겸, 여기 좀 봐.』
현실에서는 감히 누구도 부르지 못하는 본명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는 꿈속의 친구가 자신을 불렀다.
『이게 내 얼굴이야.』
소녀가 흰 너울을 벗었다. 이겸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알아. 굉장하지?』
미인이 넘쳐나는 황궁 내에서도 소녀 같은 용모를 보지 못하였다. 아름다움에 익숙한 이겸이었으나 이때만큼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동시에 그 사실에 대해 겸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겸이 놀라는 게 당연하다는 듯 으쓱해하는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런 모습마저 너무나 그녀다웠기에.
『승전 선물인 셈인가?』
이겸이 물었다.
스무 살의 젊은 왕은 국경 너머 쳐들어온 외부 세력을 진압한 뒤 황도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백전백승의 무장다운 행보라고, 가는 곳마다 환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
『네가 전쟁에서 이겼는데 왜 내가 너울을 벗어야 해? 그리고 넌 전쟁터만 나갔다 하면 이기잖아. 승전 선물이랍시고 벗을 거면 진즉에 얼굴 보여 줬지.』
새삼스레 무슨 승전 선물을 찾고 있느냐며 면박을 주었다.
『너울 안팎의 얼굴을 잘 기억해 두라고. 9년이나 봐 왔으니까 이거 썼을 때의 내 모습은 잘 알겠지?』
왜 얼굴을 기억해 둬야 하는지, 어째서 지금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소녀는 예고 없이 펑 하고 사라졌다.
정말이지 제멋대로인 말괄량이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제 입가가 부드럽게 풀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이겸은 큰길을 지나던 중에 너울 쓴 규수를 보았다.
시녀와 호위가 그녀를 첩첩이 둘러싸고 있었지만 9년이나 봐 온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바람결에 하늘대는 너울과 아래로 내리깐 눈, 무심히 돌아보는 고개. 모든 것이 너무도 익숙했다.
이겸의 군대가 잠시 휴식하기로 한 평북 지역의 명문, 심가의 규수라고 하였다.
이후 심가의 가주가 단왕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청을 해 왔다.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요청에 응하지 않았던 이겸은 수하들의 의아한 시선을 외면하려 애쓰며 심가 저택으로 향했다.
거기서 소천을 만났다.
소천의 형제 중에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우연을 가장하여 두 사람을 맞닥뜨리게 하는 방법은 황궁에서도 지겹게 봐 온 것이었다.
이겸은 소천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식사 자리로 돌아갔다. 그의 군대는 예정대로 다음 날 평북을 떠났다.
어째서인지 이겸이 황도로 돌아오고 한 달이 지났는데도 소녀는 꿈에 등장하지 않았다. 두 달이 흐르고, 석 달째가 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기에 속이 제법 타들어 갔다.
그래서였을까. 익숙한 얼굴이 보인 순간, 하마터면 달려가 두 손을 덥석 잡을 뻔하였다.
그러나 소녀는 화를 냈다.
『야, 이 얼간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아직도 일만 하고 있어? 진짜 내가 신선 체면에 어디 가서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해요. 어우, 속 터져. 어우.』
『그게 무슨…….』
『얼굴 봤잖아. 너울 쓴 모습도, 너울 안 쓴 모습도 똑똑히 확인했잖아!』
평북에서의 일을 뜻하나 보다.
이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공연히 목을 가다듬었다.
『나 안 좋아해?』
이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빨리 혼담 안 넣어?』
『호, 혼담이라니.』
『평북 심가! 혼담 안 넣을 거냐고.』
단왕의 수려한 얼굴은 난색이 되었다. 소녀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심 낭자에게 혼담을 넣어야 하는 거지?』
『……미치겠네.』
소녀가 결국 이겸의 등짝을 때렸다. 지금은 태후가 된 양어머니에게서도 맞아 본 적이 없는 그는 생각보다 강한 손맛에 상대를 다시 보았다.
현실에서 그녀가 이겸의 군대에 들어온다고 하면 제1병영에 배치할 용의가 있었다.
『한눈에도 심 낭자가 네가 아닌 줄 알겠더군. 대면하는 즉시 알 수 있었다. 한데 어째서 얼굴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대화 한 번 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 혼인을 청해야 하지?』
『이…… 상식으로 똘똘 뭉친 인간.』
소녀가 머리를 싸맸다. 이겸을 설득할 방법을 궁리하는 듯했다. 깊은 한숨 끝에 나온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도 알지. 나도 아는데, 일(一)에서 삼(三)으로 넘어갈 땐 꼭 이(二)를 밟아야 하는 그런 이유가 있어요.』
『……더 모르겠는데.』
등짝을 한 대 더 맞았다.
『난 우리가 지기이자 정인인 줄 알았는데 이겸은 아니었나 보지?』
사람을 때리고 난 뒤에 하는 말치고는 무척 달콤했다. 정인이란 말에 이겸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그것을 본 소녀가 비로소 생긋 웃었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평북 심가에 혼담 보내기다? 약속!』
처음이었다.
진이겸이 살면서 어떤 일을 떠밀리듯 찜찜하게 처리한 적은.
그리고 그게 인생중대사인 혼인이란 점이 스스로를 더욱 당혹스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