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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신선-3화 (3/100)

3화. 언니가 소천이 한을 풀어 줄게

‘어머, 눈이 부셔!’

우희는 저도 모르게 긴 소매로 얼굴을 가리는 자세를 취해 버렸다. 당연히 한쪽 눈은 소매 밖으로 내밀어 훌륭한 꽃송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먼저 단정한 청회색 포삼(袍衫)을 입은 너.

곧은 눈썹 아래 자리한 눈은 봉황을 닮았다. 세 살에 글을 떼고, 일곱 살에 상량문을 지어 올리는 신동들이 저런 눈을 가졌을 것이다.

다만 문사와 책사는 한 끗 차이다.

문사는 학문을 닦아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하나 책사는 다르다. 평생 모사꾼이라는 조롱 듣는 길을 스스로 택한 자들이다. 필요하다면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야 하는 게 책사다.

여기다 빈틈없는 입매는 봉황의 눈과 어울리는 한 쌍이라.

‘입안에 든 것도 입매처럼 날카로울지 궁금하구나.’

우희가 소매 너머에서 흐뭇이 웃었다.

책만 잡고 있다고 해서 몸이 무르지 않은 것도 좋았다. 등줄기를 곧게 세우고 앉은 몸태를 보아하니, 벗겨 보면 생각보다 훨씬 근사할 듯하였다.

붓과 먹물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난질이 떠올라 더욱 기뻐진 색의 신선이었다. 물론 상대는 질색하며 긴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것이다.

더러운 짓도 서슴지 않는 책사라 하여 우습게 보는 것입니까?

이 악물고 차갑게 발끈할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짜릿했다. 저런 부류의 꽃을 꺾는 과정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좋아, 좋아.’

우희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무관에게로 옮겨 갔다. 갑자기 몸 깊은 곳에서부터 열기가 훅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육 척이 훨씬 넘는 장골이었다. 몸을 이루는 뼈가 굵고 단단하며, 그 위에 덮인 피부는 매끄러우면서도 가무잡잡했다.

말(馬)에 빗대면 하루에 능히 천 리를 달린다는 한혈마라. 우희 눈에는 걸어 다니는 양기 도시락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많은 장수가 위엄 풍기는 외모를 위해 턱수염을 기르곤 하는데, 사내는 깨끗한 턱을 지닌 점도 좋았다. 아직 젊기도 하거니와, 수염으로 가리기엔 얼굴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색의 신선을 이리 동하게 하다니 요망한지고.’

우희의 미소가 깊어졌다. 왕비가 긴 소매 너머 야릇한 표정을 짓는 것에 당황한 사내가 시선을 피했다.

귀여웠다. 뭉친 근육을 풀어 주겠답시고 저 두꺼운 허벅지를 문지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반면 저 사늘하게 침잠한 어둠은 무엇인고.’

워낙 극과 극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느라 세 번째가 있는 줄 미처 몰랐다.

검은 무복을 입고 이마엔 흑건(黑巾)을 두른 청년이었다. 갓 스물이 지났을까. 조각달이 비치는 겨울밤의 호수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말수가 적을 것 같았다. 평소엔 사람을 똑바로 보지 않을 것 같았다. 그가 누군가의 눈동자를 바로 볼 때가 있다면, 그건 상대의 목숨을 앗을 때뿐일 것이다.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 곁을 내주지 않았을 생. 오직 주군의 그림자로 살아온 잘 벼린 한 자루의 검이었다. 미소도, 눈물도, 가슴 뜨거운 순간도 없었을 터.

‘어쩜 이리도 다채로운 꽃밭이란 말이냐.’

오랜만에 눈이 제대로 씻기는 기분이었다. 우희는 감격스러움에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계는 1만 년 산 신선의 기대를 상회하는 곳이었다. 아직 우희의 눈은 집무실 내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에 가 닿지 않았다.

어째서 그를 두고 최고라고 하는지는, 우희를 등지고 있던 네 번째 사내가 몸을 돌리자 알 수 있었다.

벼락이 내리꽂힌다는 게 이런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려나.

각진 어깨에 고르게 잡힌 근육의 몸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사내는 깨끗하고 금욕적인 미남자로 선학(仙鶴)처럼 고결한 분위기가 전신에 배어 있었다. 붓도 잘 어울리고, 검은 더 잘 어울릴 모습이었다.

게다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최상의 양기! 그 양은 어떻고, 질은 또 얼마나 대단한지. 이 정도로 빼어난 양기 보유자를 찾을 수 있을까? 인간계는 물론이요, 선계를 뒤져봐도 찾기 어려울 듯했다.

몸이 뒤바뀐 이후로 양기 섭취를 제대로 못한 우희의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며칠 쫄쫄 굶은 사람에게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겨 온다고 생각해 보라. 우희는 이미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부인……?”

아직 꿈속을 노닐고 있는 우희가 몽롱한 웃음을 지었다.

“몸이 채 회복되지 않았다고 들었거늘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인간계 최고 양기 보유자는 목소리도 끝내줬다. 한 음절 들을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늘 곁에 있는 시녀는 어디 두고 혼자 왔습니까?”

“아…… 상아라면 처소에 있지.”

“왕비.”

사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아무래도 정말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순간 우희의 정신이 돌아왔다. 사내의 말이 뒤늦게야 귀에 꽂혔다. 그는 자신을 부인이라고 불렀다.

우희의 미소가 싹 걷혔다.

‘그럼 네놈이 심소천을 3년이나 독수공방시킨 그 고자?’

우희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이동했다. 비록 몸은 바뀌었지만 양기를 알아보는 신선의 촉은 어딜 가지 않았다.

이자는 고자가 아니다. 절대 고자일 수가 없다. 하늘을 뚫고 천상계까지 뻗어 나가는 이 양기를 보라.

우희의 시선이 다시 이동했다.

‘그럼 변태?’

색의 신선께선 다양함을 포용하시기에 남들과 다른 기운도 한눈에 알아보는 감을 지니셨다.

단왕 진이겸은 변태가 아니었다.

‘아쉽…… 아니지. 흠, 아니야.’

우희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진이겸은 정도(正道) 중의 정도를 걷는 자. 다른 길로 새는 진이겸은 빛깔 잃은 꽃과도 같을 것이다. 그것은 진이겸에게 어울리는 길이 아니었다.

‘하면 고자도 아니고 변태도 아닌 데다 따로 숨겨 둔 애첩조차 없는 당신이.’

우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왜 동침도 안 하고 애를 말라 죽게 한 거지?’

그가 청혼 안 했으면 소중히 아껴 주는 다른 사내를 만나 잘 살았을 지도 모르는 심소천인데.

‘동침을 안 할 거면 최소한 다정하게 챙겨 주기라도 하든가. 백 일에 한 번 들여다보긴 왜 들여다봐? 번거롭게 차는 왜 마셔? 그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디? 여태 독살 안 당한 점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 같은데.’

문을 뻥 차고 들어온 이후로 웃기만 하던 왕비가 점점 굳은 표정을 지었다.

집무실 내 사내들이 난색을 표했다.

왕비를 모셔 갈 시녀를 호출하던 단왕 진이겸, 그의 귀에 들린 말은 다음과 같았다.

“동침을 왜 안 하세요?”

그 순간 집무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분위기가 되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못 들은 척 넘어가려고 해도 왕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질문을 던졌다.

“왜 저랑 밤을 보내지 않으시냐고요.”

네 쌍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혼인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뭐 하자는 겁니까? 혼인이 장난이야?”

“……마마!”

저 멀리서 상아가 눈물바람으로 달려왔다. 우희가 무슨 말만 하면 우는 아이치고 달리기가 제법 빨랐다. 눈 깜짝할 새 옆에 당도해 있었다.

상아가 사내들에게 황망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주인을 모셔 가려 했다. 우희는 시녀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삿대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겸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니 더더욱 괘씸함과 분함이 치솟는 까닭이었다.

“왜 이런 미모의 부인을 독수공방시키는 거야? 응? 너, 너, 너 말이야. 그렇게 양기 배출 안 하고 살면 썩어 문드러진다? 내가 밤마다 저주할 거야. 이봐, 내 말 듣고 있어?”

아랫사람들이 보건 말건 상관없었다. 색의 신선은 평소 너그러운 편이지만, 한번 화가 치솟으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이에 극락정 10제자는 눈치가 선계 최고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우희는 분노했다. 근래 이만큼 화가 난 적이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왕비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왜 동침을 안 하냐고오오오!”

시녀의 훌쩍이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끼어들었다.

* * *

“상아야.”

“…….”

“나 정상으로 돌아왔거든? 한데 넌 어찌하여 아직도 입이 붕어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냐.”

시녀의 눈썹이 팔(八) 자로 변했다.

“또 울면 나 밥 안 먹는다?”

“아니 되옵니다.”

“밥 안 먹으면 몸이 상하겠지. 간신히 되찾은 기운도 빠지겠지.”

“절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상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얘 다루는 법 하나는 알겠다고, 내심 웃는 우희였다.

“아무튼 그건 됐고,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하문하시옵소서.”

“넌 심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시중을 들어 왔지? 친정에서 어땠는지, 왕부로 와서 어떻게 지냈는지 계속 봐 왔지?”

“예, 마마.”

상아는 주인이 또 어떤 돌발행동을 하려고 이런 밑밥을 까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한편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면 상대의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 믿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우희도 진지하였다. 하늘을 찌르던 분노가 가라앉은 다음, 몇 시진이나 고민을 거듭한 끝에 도출한 결과다.

“네가 보기에…… 내가 따로 좋아하는 사내가 있는 것 같더냐?”

“예에?”

“내가 사고 때문에 기억을 잃은 사람이라 치고 솔직히 말해 보아라. 오랫동안 심소천이라는 주인을 옆에서 지켜봐 왔지 않으냐. 혹여 고향에 두고 온 정인 때문에 남편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일까?”

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었다. 진이겸이 아무리 잘난 사내라고 한들 이미 정을 준 사람이 있다면 기존의 연인을 갈라놓은 방해자밖에 되지 않을 터다.

침묵 또는 한숨으로 일관하는 부인.

진이겸은 마음의 문을 닫은 여인을 억지로 취할 뜻은 없기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어느덧 3년이 되었다는 결론이었다.

하나 상아는 절대 그럴 리 만무하다며 도리질을 쳤다. 왕비의 정절 같은 가치 따위에 연연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똑같았다. 정말 없다는 거였다.

“제가 왜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어요. 심씨 가문은 평북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지요. 어릴 적부터 심 낭자가 아리땁다는 소문이 일대에 자자했지만, 나리께서 무서우신 까닭에 그 누구도 마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답니다. 한낱 노비인 제가 이런 말을 해선 안 되나…… 나리께서 너무하셨어요. 다른 댁 아가씨들은 예쁘게 차려입고 꽃놀이를 가셨죠. 공자들로부터 연서와 선물을 받고 으쓱해하셨고요. 그리고 어느 댁 나리도 그걸 질타하지 않으셨단 말이에요! 오히려 우리 딸 이리 잘났다 기고만장하시거늘, 어찌하여 저희 나리께선 마마가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고 벌을 내리시는지. 나중엔 너울로 얼굴까지 가리라고 하시고…….”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상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다가 주인의 으름장을 떠올렸는지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고향에 두고 온 정인 같은 건 없으세요. 왜냐면 평북엔, 마마의 정인은커녕 친구라고 할 만한 이조차 안 계시니까요.”

“네 말뜻을 알겠다.”

우희가 맞잡은 두 손을 비볐다.

“하면 네가 보기에, 전하보다 좋은 남편감이 이 나라에 존재한다 싶으냐?”

겨우 열일곱 먹은 소녀에게 어려운 질문인가 싶었으나, 이에 대한 상아의 답은 의외로 확고했다.

상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노비 상아, 목을 걸고 말씀드리건대 단왕 전하보다 좋은 사내는 없을 것이옵니다.”

“알겠으니 목을 걸 필요까진 없다. 하나뿐인 목을 소중히 여기렴.”

우희는 헤헤 웃는 상아를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 미모와 재능이면 어딜 가든 남에게 눌려 살지 않을 팔자인데 새삼 안타까웠다.

‘이리 몸이 바뀐 것도 인연인데 우리 상부상조해 볼까, 심소천?’

두고 온 정인도 없겠다. 어차피 왕부를 나가도 심소천 성정에 우희처럼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왕비가 3년쯤 혼자 산천 유람을 다니고 싶다고 해도 원하는 대로 하라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남편의 사랑과 꽃다운 가신들의 충정을 듬뿍 받는 몸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한계는 있지만, 그 한계가 남들보다 훨씬 멀리 있는 삶.

우희는 자신이 심소천의 몸을 쓰는 동안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고자 하였다.

‘그러다 정 왕부가 싫으면 이혼하는 거고.’

똑같은 이혼이라고 해도 남편이 귀히 아끼는 왕비가, 그렇지 않은 왕비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을 테니까.

‘다만 나는 네 남편의 양기를 좀 얻어 가자는 거지.’

심소천 몸에 내재된 공력을 다루려면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진이겸의 깨끗한 양기가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양기를 얻고, 공력을 잘 다루게 되어, 그 공력으로 극락정까지 찾아간다. 심소천에게 상황 설명을 해 준 뒤 몸을 바꾼다. 그야말로 완벽한 결말이라.

‘다시는 너를 가벼이 보는 자가 없도록 땅을 잘 다져 놓고 가마.’

우희가 흐뭇한 웃음을 머금었다.

‘이 언니가, 소천이 한을 풀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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