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냉전과 열정 사이 (2) (완결)
2018.10.25.
모든 것은 이자벨 황녀의 생일 파티로 인해 시작되었다.
생일 파티 당일까지 루시펠라는 이자벨을 위해 무엇을 해줄지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자벨은 루시펠라에게도 특별했다.
사랑하는 친구의 딸이기도 했지만, 클로렌스가 임신을 하며 출산하는 과정까지 전부 다 지켜봤기 때문이다.
클로렌스가 겪은 과정은 루시펠라에게 충격이었고,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클로렌스의 고통 속에서 태어난 이자벨은 너무나 작았다. 저게 어떻게 자신과 같은 인간이 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사물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엉엉 울기도, 때로는 미소를 짓기도 했다.
이자벨이 클로렌스를 처음으로 ‘마!’라고 부를 때는 자신이 더 감동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이자벨의 생일 파티가 열리고, 모든 귀족이 초대되었다.
이오지프와 클로렌스는 이자벨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었고, 사람들 역시 부모를 닮아 귀엽게 생긴 황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루시펠라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정말 예쁘군.”
시온 로에르, 클로렌스의 오빠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의 두 뺨에는 사랑스럽다는 홍조가 돌아 있었다.
왜 저 인간이 자신의 옆에서 저런 표정으로 서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보시지 그러십니까.”
루시펠라의 말에 시온이 고개를 돌리다 눈을 크게 떴다.
“아이딘 백작님이 아닙니까? 언제 여기 계셨습니까?”
“처음부터요.”
루시펠라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시온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왜 안 찾아가고 여기 서 계십니까?”
루시펠라가 재차 묻자 시온이 클로렌스와 이오지프를 흘낏 바라보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찾아갈 자격이 없으니까요.”
“자격이라니요?”
“황후 폐하가 예전 폐황자 테미르와 약혼하려는 것을 방관했으니까요.”
루시펠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 당시 클로렌스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아직도 기억했다.
클로렌스가 위험하게 자신을 이오지프에게 내던진 이유가 가족 때문이었지.
새삼 그 일을 기억해 낸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스스로가 잘못한 건 아시나 봅니다.”
루시펠라의 빈정거림에 시온이 피식 웃었다.
“네, 제가 누이의 얼굴에서 저런 미소를 평생 지워 버릴 뻔했습니다.”
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클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달려가 조카를 끌어안고 싶어 어쩔 줄 모르겠는 듯했다.
루시펠라는 어쩐지 답답해졌다. 클로렌스는 딱히 오빠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출산 선물은 보냈습니까?”
“당연히 보냈습니다. 아내와 같이 가장 좋은 것으로 준비해서요.”
“그다음은요?”
“네? 그다음이요?”
“그렇게 대답하시는 걸 보니, 클로렌스가 선물을 되돌려 보내진 않은 모양이군요. 그럼 클로렌스가 용서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백작님, 황후 폐하가 대외적 위신 때문에 제 선물을 받아들였을 수 있습니다. 저 애는 나를…….”
“거참, 말 많네.”
루시펠라가 시온의 등을 강하게 떠밀었다. 시온은 속절없이 비로드 위로 떠밀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클로렌스와 시온의 눈이 마주쳤다.
시온은 루시펠라를 잠시 노려보다가 굳은 표정으로 이자벨을 안은 클로렌스에게 다가갔다.
클로렌스는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루시펠라는 혀를 찼다. 어떻게 친구인 자신보다 여동생에 대해 더 모를까.
클로렌스는 대외적 평판도 중요시했지만, 정말 싫다면 대외적 평판을 해치지 않으며 그를 끊어낼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시는 오지 말라는 편지를 보낸다던가, 아니면 상징적인 물건을 보낸다던가.
참으로 바보 같은 인간이었다.
클로렌스의 앞에 선 시온이 이자벨을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오지프가 그것을 보며 무어라고 말을 건네자, 그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시온이 아이를 다시 클로렌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때, 루시펠라는 클로렌스가 시온의 어깨를 다독이는 듯하더니 어깨의 여린 살을 꽈아아아아아악 꼬집는 것을 보았다. 시온의 등이 크게 움찔거렸다.
“…….”
루시펠라는 갑자기 시온에게 미안해졌다.
클로렌스는 여전히 기쁜 듯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기쁜 건 기쁜 거고, 시온에게 화가 나 있었던 모양이다.
클로렌스에게 한참이고 꼬집히던 시온이 다시 돌아왔다.
그는 어째서인지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꼬집히는 게 기쁘단 말인가.
로에르 후작가의 둘째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첫째도 어지간히 이상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백작, 고맙습니다.”
“꼬집힌 게 그렇게 기쁩니까?”
루시펠라의 물음에 그가 꼬집힌 자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물론이지요.”
“세상에…….”
루시펠라는 정말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오빠라도 이상한 거는 이상한 거다.
맞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있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여동생에게 꼬집힘을 당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가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꼬집는 거 하나로 넘어가겠다는 말 아닙니까. 그간 왜 연락이 없었냐며 서운해하더군요.”
“…….”
아, 꼬집기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루시펠라는 아직도 자신이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조카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아이딘 백작.”
“별말씀을요.”
그리 감사받을 일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루시펠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그는 클로렌스를 다시 한 번 보더니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딘 백작.”
루시펠라는 시온에게서 나올 말이 뭔 줄 알고 있었다. 보나마나 아이는 가질 예정이 없냐고 물어보겠지.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그녀에게 질문했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일 때문에 아직은 생각…… 네?”
“하인트 공작 각하의 생일은…… 네?”
루시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온 역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인트 공작의 생일 파티는 일 때문에 생각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게 아닌 모양이다. 루시펠라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그보다 생일이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하인트 공작은 생일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인트 공작가에서 생일 파티가 따로 열린 적이 없었던 게 생각나서요.”
루시펠라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제드의 생일? 그러고 보니 그도 생일이 존재했다.
그와 만난 지 약 5년째, 결혼한 지는 1년째. 생일을 한 번이라도 챙겨본 적이 있었나? 답은 아니었다.
우선 에스텔은 그가 태어난 날을 몰랐다. 따라서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예전에 함께했던 칼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도 생각해 보면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생일을, 챙기는 게 당연한 건가요?”
시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적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클로렌스의 오라버니라는 사실엔 자존심이 상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생일이 없던 그녀가, 생일을 챙긴다는 행위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랬기에 누군가의 생일을 따로 챙겨준 적도 없다.
남들의 생일 파티를 가보긴 했지만, 그건 그저 파티이기에 간 것이지 딱히 ‘생일’이라는 것에 의의를 둔 적은 없었다.
루시펠라는 이자벨을 바라보았다.
이자벨의 생일은 진심으로 축하하고 싶었다. 그런데 제드가 이자벨과 다를 바가 뭐가 있지? 별로 따지고 싶지 않지만, 루시펠라에게는 이자벨보다 제드가 훨씬 귀했다.
생일은 태어나서 축하한다,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제드에게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어요.”
“네?”
시온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과묵한 성정이라고 하던데, 이런 표정까지 지을 정도면 확실히 그녀가 이상한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제드를 찾아보았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남편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공작이 많이 서운하셨겠군요.”
시온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상을 본인의 기준대로만 보면 안 된다고 그렇게 여러 사실로 깨달았건만, 자신은 변하지 않은 것이었다. 루시펠라는 자괴감에 빠졌다.
***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루시펠라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 될 땐 뭘 해도 안 된다더니 이런 엿 같은 경우를 봤나! 생일이 언제인지 알아보니, 바로 다음 주란다!
그녀는 결국 병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백작님!”
제드의 집사가 그녀를 말렸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지금 차라리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주! 다음 주, 다음 주라니! 대체 왜 내게 말을 하지 않은 거지?”
루시펠라의 물음에 집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인트 가에서 생일을 따로 챙긴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선대 공작부인께서, 주인님이 아주 어렸을 적에 몇 번 챙겨주시긴 했지만…….”
“했지만?”
“곧 잊어버리시더군요. 선대 주인님께서는 아예 신경을 쓰시지 않았고요.”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알 필요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기에 루시펠라는 제드가 어떤 환경에 자랐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냥, 부모 이야기에 대해 묘하게 부정적인 태도를 보면 별로 좋은 관계는 아니었을 거라 짐작만 했을 뿐이다.
클로렌스와 이오지프는 자신의 딸의 생일을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제드의 생일은 잊혀졌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그녀와는 다른 것이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다면 기분이 안 좋을 게 뻔했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드는 서운함을 느꼈겠지만, 말조차 하지 않은 것이겠지. 과분할 정도로 자신에게 맞춰주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제드가 자신에게 언제나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끔,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세심하다는 것도.
“지금이라도 안 게 어디야.”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해는 꼭 챙겨줘야지.”
루시펠라가 집사를 바라보았다.
“도와줄 거지? 제드에겐 비밀이야.”
집사가 이내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그런 것 같아서요.”
루시펠라는 그게 무슨 말인지 생일 당일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단 한 번도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다고요?”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보며 왜 시온과 클로렌스가 남매인지 깨달았다. 놀라는 표정이 똑같았던 탓이었다.
“지금이라도 챙겨주려고. 많이 서운한 모양이야.”
루시펠라의 말에 클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셨다니 다행이네요.”
클로렌스는 상냥한 독설을 날릴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클로렌스는 독설을 다 마친 후 루시펠라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주었다.
태어난 날이므로 가장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명심 또 명심하며, 그녀는 그다음 주 단 하루, 제드를 위한 날을 준비하고자 노력했다.
생일을 준비하는 곳은 당연히 자신의 집이었다. 일주일 내에 생일 파티를 여는 것은 무리였고, 제드는 떠들썩한 것을 싫어했다.
루시펠라는 그간 제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사했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딱히 선호하는 음식은 없었지만 의외로 초콜릿 케이크를 잘 먹었으며, 생선보다 육류를 선호했다. 포도주 역시 백포도주를 마셨다. 음식은 그렇고, 또 신발이나 옷은…….
‘생각해 보면 상당히 고급스러운 취향이잖아!’
루시펠라가 입을 벌렸다. 평민 출신으로 살다가 귀족이 되어 살아가는 그녀가 애초에 귀족으로 살아온 제드와 생활 방식이 비슷하다는 게 이상했다.
자신이야 아무거나 다 좋다는 식이었지만, 제드는 까다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대체 자신을 얼마나 배려해 준 것일까!
그랬기에 루시펠라는 제드와 눈도 못 마주쳤다. 마침 제드는 무언가 다른 신경 쓰는 일이 있는지 다행히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생일 파티 준비는 순조롭지 않았다.
그녀는 제드에게 들키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준비해야만 했다. 누군가의 완벽하고 행복한 하루를 위해 준비하는 것은 힘들었다. 특히나 선물을 생각하는 것도.
클로렌스는 손수건에 수라도 놓아서 주라는데, 자신이 그런 재주가 있겠는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주라고 해봤자 좋은 검을 보는 재주인데, 이미 제드는 좋은 검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예술품이나 옷, 장신구에 대한 그의 심미안을 충족시키기엔 루시펠라가 그럴 수준이 못 되었다.
귀한 걸 선물하고 싶었지만, 일주일 전에 구하고 싶다고 구해진다면 그건 정말 귀한 게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
드디어 생일날이 다가왔다. 그날은 제드가 아이딘 백작저에 묵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루시펠라는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루시펠라의 모습이 이랬기 때문이다.
한데 치장을 마치자마자 제드가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물론 잡다한 것은 준비가 다 끝났지만, 아직 세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에 루시펠라는 당황했다.
방으로 찾아온 제드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제드.”
역시, 오늘 생일이라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무심함을 탓하며 제드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제드는 당황했지만, 이내 그녀의 입맞춤에 응했다.
입을 맞추니, 그의 표정이 풀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루시펠라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 제드.”
그 말을 들은 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표정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생일이라니?”
“어?”
되레 놀란 건 루시펠라였다.
잠깐만. 생일이라서 기분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아, 오늘이 내 생일이었던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이 시기였군, 내 생일이.”
황당했다. 심지어 시기만 어렴풋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 생일 따윈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거였다.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나타나 그녀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생일날 고독을 씹으며 씁쓸하게 웃는 제드’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모르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알 리가 있나.”
아니, 그럼 그쪽이 모르면 누가 아는데? 너무나 억울한 루시펠라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치려는 걸 애써 삼켰다.
제드는 루시펠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날 위해서 생일 파티라도 준비한 건가?”
“응.”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치게 담백한 반응이었기에 루시펠라는 살짝 실망했다.
“식사도 준비해 뒀어, 당신이 좋아한다는 걸로 잔뜩.”
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시펠라는 자신이 크게 실수를 한 건가 생각했다.
“그 드레스는, 왜 입은 거지?”
“그거야 당신과 루시펠라로서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니까. 네글리제 차림이었던 건, 빼두고.”
“…….”
“생일 축하해, 제드.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루시펠라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생일을 축하받지 못해 쓸쓸한 제드 따윈 없었지만. 그것은 진심이었다.
당신이 존재해서 나는 살아갈 수 있었어, 내 삶은 당신과 함께 살아가서 의미가 있을 수 있었어, 라는 말 역시 하고 싶었으나 쑥스러워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어.
축하를 듣고 있는 그는 무표정이었다. 그는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살짝 본 그의 두 뺨은 붉어 보였다.
“제드?”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아니면 생일이라는 게 별로 그에게 좋은 의미가 아닌 걸까? 방금 말은 실수한 걸까?
여러 생각에 그녀가 혼란스러워할 때, 제드가 루시펠라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축하를 받는 게 기분 좋은 일인 줄은 몰랐군.”
“어?”
“그래, 정말 행복한 일이야.”
“제드.”
자신도 모르게 걱정되어 그를 부르자, 제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루시펠라가 그제야 안도하며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자 껴안는 팔의 힘이 더 세졌다.
제드는 루시펠라를 꼭 끌어안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루시펠라 역시 그의 등을 끌어안은 채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한참 후, 제드가 조용히 물었다.
“루시, 그러면 지금까지 이것 때문에 바빴던 건가?”
“나도 이런 건 처음이라서, 좀 많이 헤맸어.”
“나는 또…….”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작게 ‘이오지프 그놈이’라고 속삭였다.
“왜, 왜? 또 폐하가 무슨 일이라도 한 거야?”
“아니야, 아무것도.”
제드가 고개를 흔들었다. 루시펠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면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 당신이 날 신경 써준 건데.”
제드가 환하게 웃자, 루시펠라의 얼굴 역시 밝아졌다. 그녀가 들떠서 말했다.
“사실, 이자벨 황녀 전하의 생일 파티를 보다가 당신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지 뭐야. 물어보니까 오늘이래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
“그간 챙기지 않아서 미안해.”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피식 웃었다.
“정말 당신은 나와 평생 함께해야겠군.”
“응?”
“정말 평생을 같이하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우린.”
“왜, 왜?”
“나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대의 생일을 단 한 번도 챙긴 적이 없다고.”
“…….”
루시펠라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내 생일은 나도 몰라. 그런데 누가 알아.”
“응?”
“나 생일을 몰라. 그러니까 에스텔의 생일 말이야.”
“모른다고?”
“나도 모르는 내 생일을 당신이 안 챙겨줬다고 내가 서운할 리가 있나? 신경 쓰지 마.”
루시펠라가 가볍게 말했다.
“사람을 풀어서 그렇게나 찾았는데, 결국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니.”
제드가 탄식했다. 생일에 신경 쓰고 또 이오지프의 말에 신경 쓰느라 복잡했던 게 한순간에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루시펠라가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이, 자신의 생일 때문이었다는 것은 어쩐지 기뻤다.
루시펠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이 뭔가 생각에 빠져 있나 했더니, 자신의 생일을 찾고 있었던 거로구나. 자기 자신도 몰랐던, 그 생일을 이 사람은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그것이 이상하며, 기뻤다. 지금 제드도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것일까?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것을 본 제드가 루시펠라의 등에 손을 얹었고, 조용히 속삭였다.
“남들은 그런 우리더러 냉전 중이라던데. 참 우습군.”
“남들이 그래?”
“그래. 우리가 뭐 마음이 다했네, 이제 드디어 갈라선다네, 하고 말하고 있더군.”
“우리처럼 열정적인 사이가 어디 있다고.”
루시펠라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드 역시 웃으며 그에 동의했다.
루시펠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생일인데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제드가 되물었다.
“내 생일 파티를 준비했다면서, 내 선물은 준비 안 한 건가?”
“선물이야 준비했지.”
루시펠라가 빙그레 웃었다.
“요새 몇 달간 제드와 함께하지 못했으니, 보름 동안 제드 집에서 있는 거?”
“그게 다야?”
제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리고 내 영지도 이제 안정됐으니 한동안 대리를 맡기고 당신이랑 하루 종일 그 집에서 함께하는 거?”
“…….”
“왜냐면, 우리 둘 다 바빴잖아. 내가 당신을 위해서 특별히 내 시간을 쓰는 거야. ‘내 시간’이 선물 아니겠어?”
“…….”
제드가 아무 말이 없자, 루시펠라가 역시 너무 급조한 티가 나는 선물인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때가 되어 기발한 생일 선물이 나타나는 기적 따위가 있을 리 있겠나.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봐도 선물로 할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제드가 눈치채고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 그녀는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과연 예상대로 제드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한 달.”
“어?”
“보름은 너무 짧아. 한 달.”
“한 달은 좀, 너무 긴데…….”
“누가 봐도 급조한 선물인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나?”
윽! 역시 제드다.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는 결국 한 달간 제드의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드가 자신의 생일 선물에 만족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하여 루시펠라와 제드가 냉전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즉시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어디서 소문이 퍼진 것인지, 이들이 아이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수도에 퍼졌다.
그만큼 그들의 관계는 열렬했으며, 그들은 서로에게 열정적이었다.
여담으로, 그 한 달 동안 그들은 자식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아이는 아직도 생각을 못 해봤어. 일단 일이 안 바쁘면 그때 한 번 낳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몸이 상하니 굳이 낳지 않은 게 좋을 것 같아. 후계자 문제는 양자를 구해도 돼.”
루시펠라는 아이를 낳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보다 열려 있었다. 대신 제드 쪽은 극렬하게 거부했다.
우선 제드의 어머니가 죽은 원인이 출산이었고, 이오지프에게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된 여러 정보는 꽤나 살벌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출산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