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됐을 때 (4)
2018.10.11.
햇빛이 서서히 스며들자 에스텔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은 햇빛이 가득 담겨 마치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는 눈이 부신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졸린 듯 느릿하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런 광경을 칼리드는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내 그를 눈에 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
칼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에스텔 역시도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녀는 칼리드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왜, 왜 쳐다보는 건데.”
사실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화가 나야 했다.
결국 그녀가 저지른 일 때문에 가브라인 공작에게 뺨을 맞았고, 국왕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분노 대신 느껴진 것은 그녀의 손이 따뜻하다는 촉감이었다.
“야, 칼리드. 뭐라고 말 좀 해봐.”
“…….”
칼리드가 여전히 침묵을 고수하자 에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눈을 데록데록 굴리더니 망설이며 말했다.
“미안해.”
“…….”
“내가 그놈, 아니, 그 도련님을 패서 네가 혼났다면서? 다 들었어.”
에스텔은 칼리드의 두 눈을 피했다.
“나는…… 네가 그놈하고만 어울려 다니니까 화가 났어. 그것도 짜증 나는데 네가 그놈이랑 둘이서 날 평민이라고 무시하는 줄 알았어.”
항상 목에 힘을 주고 말하던 에스텔이 처음으로 조용하게 말했다.
칼리드가 방금 들은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지 에스텔이 소리쳤다.
“그래, 질투했어, 질투했다고! 그래서 그놈한테 한 방 먹였던 거야!”
에스텔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말했다. 신기하게도 에스텔의 그런 모습을 보니 햇빛이 마음에 스며드는 듯 따스해졌다.
그 어두운 밤, 자신을 괴롭히던 어두운 기억과 감정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공작 아저씨에겐 내가 그랬다고 솔직하게 말했어.”
에스텔이 칼리드의 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팠겠다.”
가브라인 공작에게 맞은 뺨이 부었는지 에스텔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자 어째서인지 칼리드는 울컥했다. 그러나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으며, 이내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스텔이 그것을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해. 내가 정말로 미안해, 칼리드.”
“…….”
“내가 뭐든지 다 할게. 다 할 테니까…….”
칼리드는 손을 뻗어 에스텔을 끌어안았다.
에스텔이 놀란 듯 몸이 굳었지만 딱히 저항하지는 않았다.
에스텔을 품에 안으며 칼리드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에스텔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더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잠자는 동안 자신의 손을 잡고 곁에 있어주었다. 이렇게 끌어안아도 밀어내지 않고 있다.
심지어 무엇이든 다 하겠다며,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대체 오해는 무엇이기에, 또 오해에서 비롯된 미안함이란 무엇이기에 에스텔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
칼리드는 에스텔의 간극에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쩔쩔매는 에스텔을 보며 기이한 쾌감을 느꼈다.
“정말로 뭐든지 할 거야?”
“응, 응!”
칼리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에스텔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칼리드는 에스텔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면,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와 함께 있어.”
“응?”
“나랑 계속 같이 있자.”
에스텔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눈을 굴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떠날게.”
“진짜?”
“그래, 진짜. 맹세할게.”
에스텔이 그렇게 말하자 칼리드는 웃었다.
자신이 처한 불행한 상황마저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했다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감정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는 절대 자신이 어제 느꼈던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약한 부분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구해줄 수 없었고, 에스텔은 국왕에게 미움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렇게 에스텔이 모르는 작은 비밀이 하나 생겨났다.
***
“국왕 전하께서 연무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시종의 말에 칼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는 수업을 끝내고 성안에 계시는데 왜 거길 찾아가신 걸까? 그러던 그는 연무장에 있는 인물을 떠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연무장에는 수업이 끝난 에스텔이 연습하고 있었다.
국왕과 에스텔이 만날지도 모른다!
칼리드는 다급히 뛰어나갔다.
국왕은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이다. 에스텔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가브라인 공작의 묵인하에 에스텔은 예절을 배우지 않았다.
구속하면 구속할수록 더 엇나가는 게 에스텔이라는 것을 공작 역시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공작은 그녀가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검술을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 그녀가 국왕에게 대체 얼마나 예의 바르게 행동하겠는가. 어쩌면 에스텔의 무례함을 보고 국왕이 가브라인 공작가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칼리드가 연무장에 다다를 때였다.
그는 에스텔과 국왕이 의자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걸음을 늦추고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래 보이느냐?”
“응, 할아버지가 검을 잡으면 아마 세 걸음도 안 돼서 허리가 나갈걸. 몸 상태를 생각해야지.”
“허허허. 이 녀석, 못 하는 말이 없구나!”
국왕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반면, 에스텔이 한 말을 들은 칼리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너무나 놀랐기에 심지어 예의를 차리는 법도 잊고 에스텔의 이름을 불러 버렸다.
“에스텔!”
“야, 칼리드!”
에스텔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칼리드는 국왕이 자신과 에스텔을 번갈아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차, 하며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저, 전하를 뵙습니다.”
“어? 진짜 국왕님이었어?”
에스텔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에 국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이더냐?”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국왕 전하를 만나! 우와, 우와!”
에스텔이 눈을 빛내며 국왕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함부로 국왕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났다.
“에스텔, 예의를 차려야지.”
“됐다. 나는 이게 더 좋으니.”
칼리드의 말에 국왕이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역시, 국왕님한테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좀 그랬나?”
“계속 불러도 된단다.”
국왕이 관대하게 말했다. 그에 칼리드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 상황은 대체 무엇이지? 왜 국왕은 에스텔의 무례함에 화를 내지 않는가?
심지어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에스텔, 네가 그 유명한 공작이 데려온 천재라지?”
“내가 그렇게 유명해?”
“국왕은 모든 걸 알고 있느니라. 특히나 귀중한 재능을 가진 자에 대해서는 더더욱. 나라의 소중한 보물이 아니더냐.”
“우와.”
에스텔은 여전히 눈을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칼리드는 이 대화가 어디로 튀어나갈지 몰라서 불안했다.
언제 국왕이 웃었던 낯을 다시 굳히며 에스텔, 또는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죽이겠다고 말할지 두려웠다.
“내가 보물이야?”
“그래, 너 같은 아이는 보물이지. 평민과 함께 살면서 견습 기사보다 더 검을 잘 쓰다니, 그것도 여자애가 그런 건 흔치 않은 재능이란다.”
그러나 이들 사이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앉아 있는 이 노인이 국왕인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보았다면 필시 그들을 노인과 손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가브라인 공작이 네가 여자아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대로 뒀는지 궁금하구나.”
“아무 생각이 없었겠지. 나으리는 나보다 더 검에 미쳐 있으니까.”
“그런 거냐?”
국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할아버지도 여자는 검을 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럴 리가.”
국왕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곤 눈을 가늘게 접은 채 얼마간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그래, 나중에 기사가 되지 않으련?”
“엥? 나는 평민인데 기사가 될 수 있어?”
“내가 원한다면 가능하다. 너 같은 인재를 썩히는 것이 너무도 아깝구나.”
“어…….”
에스텔에게도 놀라운 제안인지 그녀는 눈을 깜빡였다.
“짐에게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네 재능을 나라를 위해 쓰는 게 어떠냐?”
“나라를 위해서?”
“그래, 나라를 위해서. 네가 실력이 있다면 그 실력을 마땅히 모두를 위해 써야지.”
에스텔은 눈을 깜빡였다. 칼리드는 에스텔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왕이 말한 기사란 영주가 내리는 기사 직이 아니었다. 왕의 기사, 즉 왕실기사단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한참 후에 나온 말은 거절의 말이었다.
“음…… 어, 나는 안 할래.”
“응? 왜 안 한다는 거냐?”
“여기서 칼리드와 있을래. 기사가 되면 여기서 나가야 하잖아.”
그 와중에도 에스텔은 칼리드와 약속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국왕은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건 어떠냐. 가브라인 공자도 왕실기사가 되면 되지 않느냐. 공작가에 있는 것보다 더 좋을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쏟아진 말에 칼리드가 움찔했다. 자신을 왕실기사로 만든다고?
물론 고위 귀족의 자제가 국왕의 밑에서 기사로 일하는 경우는 흔했다.
그것은 고위 귀족이 그만큼 국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가브라인 공작가의 사람들을 수도로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정말로 에스텔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일까? 하지만 국왕이 에스텔의 실력을 알면 얼마나 잘 알겠는가. 그냥 해본 말인 것일까?
칼리드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번 생각해 보려무나.”
국왕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더니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 만남은 별문제가 없는 것일까?
혼란스러워하는 칼리드의 옆에서 에스텔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야, 국왕 전하 진짜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어.”
칼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텔의 눈에는, 국왕은 사람 좋은 할아버지로 보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평민인 그녀를 기사로 발탁한다고 말하기까지 했으니, 그녀가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나보고 할아버지라고 계속 부르라고 했다니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칼리드가 조용히 물었다. 에스텔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뭐? 기사가 되는 거?”
“그래.”
에스텔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빠지는 듯하다가 말했다.
“난 안 할 거야.”
“왜?”
“기사가 되면 너랑 같이 있을 수 없잖아.”
“그럼 나와 같이 있는 걸 떠나서 네 감정은 어떤데?”
“나는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기사가 되는 건 엄청 멋있어 보여.”
“멋있어 보인다고?”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거잖아. 난 내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 신기하다.”
에스텔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표정이었다. 그러다 그녀는 칼리드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꼭 기사가 되어야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렇지?”
그는 안심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지은 미소였다.
사실 그도 이렇게 말하는 에스텔이 ‘기사’라는 자리에 미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기사가 되는 건 쉽지 않았고, 국왕이 설마 그녀를 진짜로 기사로 만들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 후, 국왕은 다시 수도로 떠났다.
칼리드는 이번 일이 그저 조용히 넘어갈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를 바꿔 버렸다.
***
“전하께서 에스텔이 탐이 나나 보더구나.”
가브라인 공작의 말에 칼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국왕이 했던 말은 역시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스텔은 평민이잖아요. 게다가 여자이고. 한데 대체 왜?”
“전하의 마음을 어찌 알겠느냐.”
그렇게 말하는 가브라인 공작은 미묘하게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너 역시도 기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제가 아버지를 따라 기사가 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왕실기사 말이다.”
“…….”
가브라인 공작의 말에 칼리드의 얼굴이 굳었다.
정식 기사 서임을 받는 것과 서임을 받아서 왕궁에 일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갑자기 왕실에서 일해야 한다니?
“국왕 전하의 명은 거역하지 말거라. 그분은 그걸 기억하시는 분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알 수 없어.”
“……아버지는 국왕 전하가 두려우신 겁니까?”
그 질문을 하면서도 칼리드는 아버지의 ‘아니다’라는 대답을 듣길 원했다.
강건한 육체를 가진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안심시켜 주길 바랐다. 걱정 말라고, 세상 모든 무서운 것으로부터 아버지가 지켜주겠다고. 그러나 가브라인 공작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그렇다.”
“…….”
“전하는 여차하면 우리 둘을 모두 죽일 생각이시니.”
가브라인 공작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칼리드는 자신이 품은 생각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절망했다.
그래서였다.
“기사가 되자, 에스텔.”
그래서 칼리드는 별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에스텔의 손을 잡으며, 기사가 되자고 말했다.
네가 아스트라의 품에 안긴 전사들처럼 찬란하게 죽을 수 있게.
“그래, 함께 기사가 되자, 칼리드.”
거기에 자신의 의지와 소망 따윈 없었다.
그저 국왕이 원했기에, 국왕을 거역하기 싫어서, 라는 비굴한 이유만 있을 뿐이었다.
음울한 칼리드의 표정과 다르게 에스텔은 너무나도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을 도와주는 기사 따윈 없어. 그냥 국왕의 개로 이용당할 뿐이야.
어쩌면 너도 나도, 국왕에 의해 죽을지도 몰라.
칼리드는 이렇게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었다.
***
성년이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브라인 공작은 가혹하게 이들을 굴렸으며, 본격적으로 왕실기사단원이 되자 이들은 견습 기사 신분으로 기사 이상의 것을 해야만 했다.
그들은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칼리드는 그것이 국왕이 자신을 죽이기 위함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또 살아남았다.
생과 사를 경험하는 그 치열한 현장 속에서는 언제나 에스텔이 함께 있었다.
그는 에스텔이 자신을 떠날까 봐 전전긍긍했다.
이 삶이 싫지 않을까? 언제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도망치지 않을까?
그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에스텔을 붙잡았다.
오해하게 했고, 나중에 그 오해를 풀어주며 그녀가 느끼는 미안함을 이용했다.
처음에는 그것이 미안했으나, 나중에는 죄책감 따윈 사라졌다.
오히려 칼리드는 에스텔이 그때마다 폭발적으로 보이는 감정에 중독되어 갔다.
***
여자는 자라나면서 남자와 차이가 생기며 약해진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에스텔은 여전히 강했다. 그리고 강한 만큼, 밝았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도, 국왕의 미움도 에스텔의 옆에 있으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순수했고, 세상을 이해타산 없이 단순하게 보았다. 그랬기에 에스텔과 함께하는 곳이 비록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전쟁터였지만 그는 거기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년이었던 그가 자라나 남자가 되고, 에스텔 역시도 자라나 여자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야, 칼리드. 레이드 경이 한 번 만나보자는데? 한데 이건 뭐지?”
에스텔이 편지를 달랑달랑 든 순간 칼리드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분노가 깃들었다. 살면서 거의 느껴보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이었다.
뭐지? 칼리드는 자신의 감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여자를 사귀듯, 그녀도 남자를 사귈 수 있다. 그건 아주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감정은 왜?
“에스텔, 귀족이 평민 여자를 희롱하는 건 흔한 일이야. 그리고 너는 평민이지.”
에스텔이 말한 남자가 꽤나 친절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며, 방계 혈통의 귀족이었기에 만나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설마 그놈을 질투라도 한다는 건가?
질투라니, 그렇다면 나는 에스텔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자각은 너무도 갑자기 이루어졌다. 에스텔에게 온 편지 한 장.
그것에 분노하며 깨달은 것이었다.
에스텔은 형제와도 같은 사이다.
서로가 서로의 곁에 있는 게 아주 당연한 그런 사이. 소위 말하는 ‘가족’이 아닌가?
칼리드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운이 좋아 살아남으면 공작가를 이어받기 위해 그는 결혼을 해야 했다.
그 대상이 평민인 에스텔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런데 대체 왜.
칼리드는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
기사 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칼리드와 에스텔은 잠시 동안 가브라인 영지에 내려갔다 와야 했다. 가브라인 공작이 그들에게 검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검을 받은 그들은 다시 수도로 올라오는 도중이었다.
밤이 되자, 그들은 여느 때처럼 천막을 쳤다.
두 사람이 그곳에 묵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으나, 칼리드는 그 당연한 것마저 의식이 되어 에스텔을 천막 안에 두고 결국 바깥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감정은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한순간에 품는 연정이겠지. 아니, 어쩌면 자신이 가족처럼 생각하는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에스텔을…….
어쩌면 더운 여름이기에 머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다시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그는 에스텔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었다.
평소라면 물을 뜨러 갔나 보다, 아니면 자신처럼 산책이라도 하나 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배가 고파서 사냥이라도 나갔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빈 천막 안을 본 칼리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걱정. 그래, 그는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라진 에스텔을 찾아 헤맸다.
다행히 달빛은 밝았기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텔을 바로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강에 몸을 담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칼리드!”
에스텔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숨기지 않은 그녀의 상체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다문 턱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갔다. 칼리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뭐 하는 거야?”
“너무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너도 들어올래?”
“…….”
예전에도 이랬다.
처음 에스텔이 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에스텔의 알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린 소년인 칼리드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다.
그러나 지금 칼리드는 이것이 몹시 부끄럽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것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그의 양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분명 아무 매력도 없는 몸이다. 에스텔의 몸은 그가 알던 여성의 몸과는 달랐으니까.
희고 고운 피부 대신 흉터투성이의, 근육이 잡혀 있는 몸. 어느 남자가 이런 몸을 좋아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그는 왜 아레스가 이슈타르를 마음에 품었는지 절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아레스는 강에서 목욕을 하는 이슈타르를 봤기에 그녀를 마음에 품었던 게 아니다.
그것은 자각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는 처음부터 이슈타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