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됐을 때 (3)
2018.10.08.
기대했던 비명 소리에 칼리드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에스텔은 참 대단했다.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쉽게 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답답함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웃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린 그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신의 웃음에 놀랐다. 아버지는 그에게 언제나 조용히 슬퍼하고 기뻐하라며 가르쳐 왔다. 그랬기에 그의 감정 표현은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소리 내어 웃으니 이상했다.
자신도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칼리드는 그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웃는 것이 표가 날까 흠흠 헛기침을 하며 다시 연무장으로 갔다.
“무슨 일입니까? 걱정되어 다시 왔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가, 가브라인 공자! 저, 저 평민 계집이 나를!”
타이로 공자의 꼴은 참담했다. 온몸에 모래먼지가 묻어 있었고, 그는 온몸이 욱신거린 듯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에스텔은 그 와중에도 당당했다.
“나는 나으리가 일부러 져준 줄 알았어.”
에스텔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결말은 빤했다.
칼리드는 웃음기를 꾹 눌러 참았다.
“감히 귀족을 때리다니! 저년을, 저년을……!”
그는 너무나 화가 난 모양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칼리드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공자. 설마 지금 평민 계집에게 맞았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니까, 당장 저년의 목을……!”
칼리드는 일부러 눈을 크게 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곤란하군요.”
“뭐, 뭐?”
“이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면 이 일이 소문 날 거 아닙니까?”
“소,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문제라도? 아!”
그제야 타이로 공자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자, 칼리드는 최대한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요? 아무래도 아버님께서는 에스텔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수도에서도 에스텔을 알고 있다지요. 만약, 에스텔의 목을 자르려면 합당한 이유가 필요한데……. 물론 이유는 합당하지만, 그 이유가 알려진다면 공자의 명예에 누가 될까 그게 걱정입니다.”
칼리드 말에 타이로 공자의 얼굴이 하얘졌다.
평민 계집에게 얻어터진 세도가 자제. 수도에서 몇 년 동안 웃음거리가 되어도 모자랄 일이었다.
게다가 타이로 공자는 평소 검 좀 쓸 줄 안다고 무척 뻐기고 다녔다.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에스텔은 평민이라서 검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반말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이 일은 불문에 부치는 게 어떨는지요? 아버님께 말씀드려서 에스텔은 조용히 교육하겠습니다.”
타이로 공자는 열다섯 소년이었다. 그는 에스텔에 대한 분노보다 자신이 또래 남자애들에게 비웃음당할 것을 더 걱정했다.
평민, 그것도 계집에게 사정없이 맞았다는 말은 확실히 위신을 중시하는 그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에스텔, 어서 사과해.”
칼리드가 그녀를 보며 말하자 에스텔이 배신감 어린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자신은 편을 들어준 건데 왜 화가 난 거지?
칼리드는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문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에스텔, 어서!”
“싫어! 이 똥개 같은 놈아!”
“저, 저 무엄한!”
타이로 공자가 소리쳤다. 에스텔은 칼리드의 다리를 걷어차더니 뛰어가 버렸다.
칼리드는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저, 저 계집을 그대로 보고만 있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저는 공자와 다르게 교육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귀족을 아무렇지도 않게 모독하다니……. 왜 그간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타이로 공자가 질린 표정을 했다. 그 얼굴을 보아 그는 더 이상 에스텔을 괴롭히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칼리드는 속으로 안심했다.
모든 일정을 마친 타이로 공작 부자는 수도로 돌아갔다.
그들은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고, 그 일은 없던 걸로 되는 듯했다.
공작 성은 다시 평화로워졌으며, 밖으로 돌던 가브라인 공작은 다시 검 수련에 매진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단 한 명, 에스텔을 제외하고는.
어째서인지 에스텔은 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꼭 이전, 칼리드가 에스텔을 무시한 것과 같았다.
칼리드 쪽에서 그녀를 보고 말을 걸려 먼저 다가가도 에스텔은 보는 족족 상대도 하기 싫다는 듯 그를 피했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그는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본적인 것이 습득되지 않았다.
그가 배운 것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며 미소로 적당한 예의를 차리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에스텔에 예의를 차리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평민 여자애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나? 그 역시도 귀족으로서 자존심이 있었다.
게다가 에스텔이 저지른 사고를 자신이 수습하기까지 했는데, 에스텔은 이런 무례한 방식으로 갚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이 되다가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저런 애 몰라. 칼리드 역시도 무시를 선택했다.
그렇게 그들의 일상이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그들은 또 다른 손님을 맡게 되었다.
국왕, 파비아누스가 방문한 것이다.
***
아무런 연통도 없었다.
그렇기에 가브라인 공작가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칼리드는 아버지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저택의 모든 사람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왕이라니? 칼리드는 단 한 번도 국왕을 본 적이 없었다.
가브라인 공작은 언제나 영지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자식인 칼리드 역시도 그랬다.
아버지가 긴장하는 것을 보니 칼리드 역시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절대 국왕 폐하 앞에서 불손하게 굴지 마라.”
국왕을 맞이하러 나가기 전 가브라인 공작이 한마디를 남겼다.
국왕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왜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칼리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 충고를 새겼다.
공작이 마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의 일행이 도착했다.
언제나 느끼는 거였지만, 수도 사람들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타이로 공작 역시 화려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는데, 국왕의 일행은 더 화려했다.
마차는 번쩍거리는 금으로 칠해져 있었으며,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말들은 털에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심지어 시종들이 가브라인 공작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고 국왕이 내렸다.
칼리드는 솔직히 말하면 국왕을 보자마자 실망했다.
같은 왕족임에도 탄탄한 몸을 가진 아버지와 다르게 국왕은 살집이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외모 역시도 그랬다. 칼리드의 아버지는 인물이 훤칠했으나, 이 나라의 국왕이라는 사람은 평범했다.
굳이 말하자면 실례되게도 성안에 있는 제빵사와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오히려 왕의 위엄이 있어 보이는 쪽은 자신의 아버지였다.
칼리드는 괜히 자랑스러워서 아버지와 국왕을 번갈아 보았다.
“공의 아들은 처음 보는군.”
가브라인 공작과 이야기를 나누던 국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칼리드는 그에 움찔했다. 국왕이 꼭 자신이 품은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브라인 가의 칼리드가 전하를 뵙습니다.”
“무릎 꿇을 필요 없다. 아비를 꼭 빼닮았구나. 귀여운 녀석.”
부드러운 목소리와 웃는 눈매가 칼리드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다정해 보였다. 그래서 칼리드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좀 전의 꺼림칙한 느낌이 기우라고 생각하면서.
“칼리드, 어서 들어가 보도록 해라.”
“공작, 짐이 그대의 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국왕이 웃으며 가브라인 공작을 보자,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던 표정. 그 낯선 표정에 칼리드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너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단다.”
“저에 대해서 말입니까, 전하?”
“그래. 네 아비를 닮아 검술이 뛰어나다지?”
“언제나 부족합니다, 전하. 전하를 보필하기엔 한참 모자라는걸요.”
칼리드가 고개를 숙이며 흘낏 가브라인 공작 쪽을 돌아보니, 가브라인 공작이 잘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구나. 내가 알기로 너는 네 아비를 닮아 아주 뛰어나다는데 말이야.”
자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그게 국왕 전하의 귀까지 들릴 정도란 말인가?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타이로 공자에게 들었단다. 타이로 공자와 대련을 해서 이겼다지?”
타이로 공자와 대련을? 대련을 한 건 에스텔이었다.
칼리드가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때 국왕이 말을 이었다.
“타이로 공자가 그러더구나. 네가 그놈과 대련해서 그 몸을 그렇게 멍투성이로 만들어놨다고.”
어째서인지 국왕은 웃고 있었으나, 칼리드는 그 웃음에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사실이냐?”
가브라인 공작이 물었다. 아니다. 그건 에스텔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칼리드는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면 에스텔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짝!
그때 엄청난 충격이 뺨에 가해졌고, 칼리드는 바닥으로 나가떨어졌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들었으나, 칼리드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왜냐하면 가브라인 공작이,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을 때렸기 때문이다.
“그간 내 너를 너무 무례하게 키웠구나! 감히 타이로 공자의 몸에 손을 대!”
가브라인 공작의 눈빛이 흔들렸다.
칼리드는 그가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나 증오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아까부터 아버지는 이상했다.
“어서 무릎을 꿇고 전하께 빌어라!”
바닥에 쓰러진 칼리드를 향해 가브라인 공작이 소리쳤다.
뺨을 잘못 맞아 입안이 터진 건지 입에선 비릿한 맛이 났고, 한쪽 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칼리드는 너무나 놀라 가브라인 공작이 시키는 대로 했다.
“죄, 죄, 죄송합니다, 전하.”
“…….”
“제, 제, 제가 무, 무례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를…….”
목소리가 떨리고 말이 계속 혀끝에서 헛나와 그는 말을 더듬었다. 칼리드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폭력에도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그것이 오싹했다.
“짐더러 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왜 애를 때리는가.”
국왕은 혀를 차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어 칼리드를 잡아 일으켰다.
칼리드는 일어선 채 멍하게 서 있었다.
“세게도 때렸구나. 어서 들어가 치료를 받도록 해라. 나 원 참, 네 아버지는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한지 모르겠구나.”
국왕이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칼리드는 허락을 구하듯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용인이 무어라고 말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치료를 받은 후에도 멍한 표정으로 방에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그는 타이로 공자가 거짓말을 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몸에 든 멍을 보고 에스텔에게 맞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자신을 핑계 댄 듯했다.
그제야 그는 아버지가 왜 화가 났는지 깨달았다.
아버지 입장에서 자신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만 사고를 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어렸을 적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던 가브라인 공작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아버지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일까?
겁에 질린 칼리드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이 상황이 너무도 두려웠다.
한참 동안 흐느껴 울자 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칼리드는 훌쩍거리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많이 아픈 모양이로구나.”
들리는 노인의 목소리에 칼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울었던 것인지 날은 어두워졌고, 해는 이미 지평선에 걸려 다 저문 지 오래였다.
그는 흠칫하며 일어났다. 방금 들린 목소리는 국왕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방이 어두웠기에 칼리드가 보이는 것은 국왕의 그림자뿐이었다
칼리드가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국왕이 손을 저었다.
불을 켤 하인을 불러야 하나?
칼리드가 우물쭈물하자 국왕이 손을 들어 칼리드의 뺨을 쓸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느껴졌다.
“가브라인 공작이 너를 살리기 위해 참으로 애달픈 노력을 하는구나.”
“…….”
칼리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저, 노인의 손이 달래주듯 칼리드의 뺨을 쓸었을 뿐이다.
“헛된 노력인 줄도 모르고.”
그와 동시에, 노인의 손이 칼리드의 목을 졸랐다.
노인임에도 국왕의 힘은 무척 강했고, 칼리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발버둥을 치다간 더 큰일이 벌어질까 칼리드는 자신의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 때 노인은 칼리드를 내팽개쳤다.
칼리드는 바닥에 쓰러진 채 기침과 구역질을 하며 두려움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에게서 발길질이 날아왔다.
사정없는 발길질이었다. 칼리드는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몸을 웅크려 그 발길질을 맞았다.
폭력은 고통스러웠으나, 칼리드는 차마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한참의 폭력이 지나고, 국왕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드가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그림자 진 국왕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커튼 사이에 들어오는 햇빛 한 줄기에 두 눈만이 보였다. 핏발 어린 눈동자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 눈동자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어려서부터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응?”
“…….”
“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있어야지, 네 아비처럼 말이다.”
“어, 어머니……?”
“칼리드, 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국왕의 두 눈이 다시 인자하게 휘어졌다. 칼리드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내가 죽였단다.”
뭐라고? 국왕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저 사람이? 대체 왜?
칼리드의 의문을 알아차린 것인지 국왕이 다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아비에게 물어보려무나. 감히 허락도 없이, 이 빌어먹을 가문에 후계자를 만들다니, 죽어 마땅한 죄지 않느냐. 그래서 죽였다. 네 아비도 그제야 알아듣더구나. 기어오르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야.”
위험했다. 이 사람은 너무도 위험했다. 자신을 죽일 것이다. 그럴 능력도, 그럴 힘도 있는 사람이다.
칼리드가 엎드린 상태에서 뒤로 물러나자 국왕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몸을 숙여 칼리드와 두 눈을 맞췄다.
“칼리드, 네 어머니의 목숨과 바꿔서 태어났으면, 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또다시 노인의 손이 칼리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칼리드는 움찔했으나, 혹 국왕이 자신을 죽일까 봐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것이 만족스러운 듯 국왕은 여러 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용서해 주세요, 전하.”
칼리드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참 동안 빌었다.
“내가 너희 부자를 살려주고 있음을 알거라.”
칼리드는 그것이 용서의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국왕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가자, 그는 숨을 몰아 내쉬며 와들와들 떨었다.
아직도 꽉 쥐인 목이 아팠다. 방금 그는 죽을 뻔한 것이다.
어머니를 저 사람이 죽였다. 그러나 거기에 분노보다 공포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저 남자가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국왕의 두 눈이 떠올랐다. 꼭 거미줄에 걸린 벌레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자신을 죽일 것이다.
분명히 죽일 것이다.
칼리드의 직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왜 저런 무서운 사람이, 저를 죽이려 하는가. 왜?
어린 칼리드는 복잡한 정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국왕이 가브라인 공작가를 미워한다는 것만 겨우 이해했을 뿐이다.
한참을 오들오들 떨던 칼리드의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죽는 게 무섭다.
죽는 게 두려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칼리드는 그렇게 되뇌다 결국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
꿈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죽음을 목격했다. 초상화 속 자신의 어머니가 국왕에게 죽었다. 자신의 아버지 역시 죽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다.
국왕이 악귀처럼 웃었다. 칼리드는 죽는 게 무서워 국왕에게서 도망쳤지만, 그의 손아귀는 몇 번이고 칼리드의 머리를 쥐었고, 그는 몇 번이고 국왕의 칼에 죽음을 맞이했다.
‘무서워. 죽는 게 무서워!’
칼리드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따스한 손이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을 쫓아오던 국왕이 멀어졌다.
칼리드가 앞을 보자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보였다.
“에스텔!”
그와 동시에 그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칼리드는 불에 덴 듯한 뺨의 고통과 약 냄새를 느꼈다. 그렇다면 잠자기 전의 일은 꿈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칼리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다시 떠올렸다.
국왕의 눈빛이 떠오르자, 가슴이 쉴 새 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손을 꽉 쥐는 누군가의 손을 느꼈다. 칼리드가 놀라서 옆을 바라보았다.
아침이 되었는지 커튼 사이에는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옆에서 손을 잡은 이가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에스텔이었다. 에스텔이 자신의 손을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두려움으로 두근거리던 심장이 느릿하게 뛰기 시작했다.
칼리드는 누워서 에스텔의 자는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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