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67화 (167/173)

#167화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됐을 때 (2)

2018.10.04.

칼리드는 멍하게 서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에스텔의 물음에 칼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칼리드는 에스텔의 방에 찾아온 상태다. 때마침 에스텔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칼리드는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수행을 했던 칼리드는 딱히 알몸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에스텔도 그런 것 같았다. 그가, 아니, 그녀가 옷을 모두 탈의할 때까지는.

“여자였어?”

“몰랐어?”

“몰랐어.”

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여자의 몸을 봤다는 것을 알았다.

바지를 입은 에스텔이 웃통을 벗은 몸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가슴이 나와 있다던데. 아, 그건 성인이 되면 나오는 건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느다란 몸에 헐렁한 셔츠가 걸쳐졌다.

“우와, 너 여자 몸을 봤는데도 부끄러움이 없구나?”

에스텔의 말에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야말로 부끄러움이 없는 것 같은데? 보통 여자들은 알몸을 보이면 수치스러워하지 않나?”

에스텔은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보는 칼리드도 조금은 놀랐을 뿐, 그것을 보고 딱히 부끄럽지 않았다.

“똑같은 몸인데 뭘 그렇게 꺅꺅거리고 숨겨.”

에스텔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잠그자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고 보면 왜 아레스는 이스타르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빠져들었던 것일까?

신화의 내용을 떠올리며 칼리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스텔의 몸을 봐도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스텔이 여자애라는 건 좀 신기했다.

칼리드가 그간 여자들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영지를 지나가는 귀부인과 레이디를 몇 번 봤었고, 그들은 모두 머리가 길고 조용한 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그가 알고 있는 여자의 특징과 정반대였다.

칼리드는 처음으로 신기함을 느꼈다.

남자들이 입는 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는 에스텔. 남자만이 쓸 수 있는 검을 드는 에스텔.

그는 에스텔이 처음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칼리드에게 있어서 에스텔이 여자라는 사실은 신기한 사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칼리드가 집사에게 에스텔이 여자라는 것을 밝히자마자 저택이 뒤집어졌다.

검술의 천재가 여자라는 점이 놀라울 거라고 생각은 했으나, 칼리드는 그녀를 저택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모든 사람이 에스텔을 죄인 취급했다.

검술 훈련에서 돌아온 칼리드는 갑자기 시끄러워진 분위기에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듣자 하니 아버지 역시 그녀를 쫓아내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이상했다. 에스텔이 쫓겨나다니. 꼭 자신 때문에 쫓겨나게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과 함께한 열흘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 시끄럽지만 에스텔은 칼리드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칼리드는 이 녀석이 조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얼굴을 찌푸린 채 저택을 산책하며 생각에 잠긴 칼리드는 검을 든 채 연무장으로 가던 에스텔을 발견했다.

사용인들 사이에서 말이 도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에스텔은 여전히 태평해 보였다.

에스텔이 칼리드를 발견하고 그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야, 칼리드.”

“…….”

“네가 나 여자인 거 말하고 다녔다면서?”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일부러 너 나가라고 말한 거 아니야.”

“알아.”

에스텔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칼리드는 그에 살짝 안심했다. 자신이 그녀가 쫓겨나길 바라서 쪼잔하게 일러바치는 인물이라는 오해는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드디어 여길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 고맙다.”

“뭐?”

칼리드는 눈을 크게 뜬 채 에스텔을 보았다. 에스텔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칼리드는 그에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여기 있기 싫어? 밥도 주고, 옷도 주고, 검술도 가르쳐 주잖아.”

“옷도 주고 밥도 먹여주는 건 고마운데, 답답해. 여기 일하는 녀석들도 날 잡아먹으려고 그러고. 그래도 공작 아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 내보낼 때 한몫 챙겨줄 텐데. 그걸 가지고 내 살길을 찾는 게 좋지 않아?”

“…….”

“검술이야 또 배울 기회가 있겠지. 그렇게 몰두하고 싶진 않아. 으아~ 끝이다, 끝.”

에스텔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칼리드는 그것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저 녀석은 후련한 감정을 느끼는데 자신은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

저 녀석은, 멋대로 남의 영역에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아놓고서, 미련 없이 떠난다고 하고 있었다. 남겨진 자신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는 어째서인지 화가 났고, 곧장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야, 너 또 나 무시하냐?”

에스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일부러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당장 아버지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긴 어쩐 일이지?”

아버지는 책상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꽤나 오랜만에 오는 아버지의 방이었으나, 칼리드는 그런 감흥 따윈 없었다. 그는 초조했고, 재빨리 본론부터 말했다.

“에스텔을, 그 아이를 쫓아내실 거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자아이라는 걸 너도 들었지 않느냐.”

“여자아이는 안 되는 겁니까?”

“여자라는 건 검을 쓰는 데 커다란 장애가 될 뿐이다. 힘도 갈수록 차이가 날 것이고, 체형 역시도 불리하게 바뀔 것이다. 재능이 아까울 따름이로구나.”

“…….”

“그 말을 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더냐?”

칼리드는 망설이다가 가브라인 공작을 보며 말했다.

“쫓아내지 마십시오.”

“뭐?”

“쫓아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민 여자애에게 연정을 품은 건 아닐 테고. 이유가 무엇이지?”

칼리드는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아버지 말씀대로 재능이 아깝습니다.”

“…….”

“같이 싸워봐서 압니다. 흔한 재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칼리드는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재능을 판단할 정도의 판단력은 있는 것이냐?”

“멀리서나마 아버지가 쓰시는 검을 봐왔습니다. 실력은 없더라도 보는 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칼리드의 말에 가브라인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애초에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네? 방금 분명히 쫓아내신다고…….”

“내 입으로 쫓아낸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쫓아낸다는 소식을 들었다니까 여자아이니까, 라고 애매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칼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러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 아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음에도, 가브라인 공작의 눈에는 어딘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 표정에 칼리드의 얼굴이 굳어지려던 찰나 가브라인 공작의 입이 열렸다.

“점점 네 어머니를 닮아가는구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칼리드는 눈을 굴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에스텔을 이곳에 두기로 하신 겁니까? 아버지도 여자아이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에스텔이 여자였으며, 검을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칼리드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건…… 아니, 아니다.”

가브라인 공작은 이유를 말해주지 않고 칼리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먼 훗날, 그는 그 이유를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에스텔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예법을 차려야 하며,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했던 행동도 에스텔 앞에 서면 풀어졌다.

집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은 에스텔과 그가 친하게 지내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가브라인 공작은 그들의 친분을 묵인했다.

어쩌면 이것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친구’일지도 모른다. 계속 이곳에 함께할 안정적인 인간관계. 칼리드는 에스텔이라는 존재에 안심을 느꼈다.

칼리드는 에스텔과 격의 없이 친해졌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에스텔에게 전달하기도 했고, 에스텔 역시도 길바닥에서 배운 잡지식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신분도, 살아오던 환경도 달랐으나 칼리드는 에스텔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가끔가다 에스텔은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을 해 칼리드를 불안하게 했다. 여기서 계속 머물며, 계속 함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아버지의 명령으로 이곳에 머물지만, 에스텔이 성년이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곳을 탈출할지도 모른다. 칼리드는 에스텔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점이 늘 불안했다.

***

“공자께서도 참 고생이 많으십니다.”

타이로 공자가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입니까?”

“가브라인 공작께서 공자는 가르치시지 않고 한낱 평민 여자에게 검을 전수하시다니, 이는 가브라인 가의 굴욕이 아닙니까? 동생 같아서 말하는 건데, 정말 공자가 불쌍합니다.”

타이로 공자가 오만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가브라인 가의 굴욕을 만드는 건 당신 같은 사람이 아닌가?

칼리드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타이로 공자를 대하는 데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가브라인 공작이 단단히 교육했기 때문이다.

타이로 공작가는 국왕의 외척 가문이었다.

국왕의 명령으로 시찰을 하는 도중, 가브라인 공작의 성에 와서 며칠간 체류하고 있었다.

두문불출하던 아버지는 타이로 공작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타이로 공자와 칼리드는 이렇게 남아 소위 말하는 귀족 자제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시간’을 가졌다.

칼리드로서는 쓸모없는, 심지어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타이로 공자는 정말로 형편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칼리드보다 나이가 많은 사춘기 소년이었으며,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알고 있어 사람들을 무시했다.

타이로 공자에게 있어서 가브라인 공작가의 모든 것은 수도의 유행과 뒤떨어지는 촌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가브라인 가의 시종들을 촌뜨기라고 비난하며, 칼리드의 우위에 선 듯 모든 것을 수도와 비교하며 우쭐거렸다.

특히나 칼리드를 피곤하게 했던 것은, 타이로 공자가 몇 개월 전 얼샤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 검술에 천재인 계집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에스텔과 마주치는 것을 최대한 피하게끔 했으나, 결국 연무장에서 가브라인 공작에게 수련받는 모습을 타이로 공자가 보게 되었다.

“저 천박한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계집이 저렇게 검을 들고 설치는 꼴을 보니 꼭 원숭이 같군요.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어.”

그에 칼리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자신이 에스텔에게서 받은 첫인상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타이로 공자는 칼리드가 그 말에 동의한다고 생각했는지 미소 지었다.

칼리드는 에스텔을 바라보았다.

막 휘두르는 듯했던 그녀의 검엔 어느새 기사 특유의 묵직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녀가 검을 한 번 휘두르자, 땀이 흩어져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검을 휘두른 채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은 환했다.

저게 천박해 보이나?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데.

그때 검술 수련이 끝난 모양인지 에스텔이 검을 내리며 미소를 지었다.

가브라인 공작이 타이로 공자와 칼리드를 한 번 바라보더니 저택으로 걸어 들어갔다.

에스텔은 하늘을 바라보며 후, 숨을 내쉬다 칼리드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 하찮은 계집이.”

타이로 공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칼리드가 저 인사에 어떻게 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그녀가 소리쳤다.

“야, 칼!”

그녀는 칼리드를 보고 빙그레 웃고 있었다.

“칼? 정말 무례한 계집이로군요, 공자.”

타이로 공자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칼리드가 이 인사를 받아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만약 받아준다면 타이로 공자가 기분이 상해할 거라는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이, 너, 이리 와봐!”

그가 소리치며 검지를 까딱였다. 그에 칼리드를 바라보던 에스텔이 고개를 돌려 타이로 공자를 바라보더니 얌전히 그 손짓에 다가왔다.

“헹, 그래도 오라는 말에 오긴 하는군.”

타이로 공자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에스텔은 타이로 공자를 힐끔 한번 보더니 칼리드에게 말했다.

“야, 칼리드, 아저씨가 너랑 대련하래.”

“어?”

“너, 너, 무엄하게 나를 무시해!?”

타이로 공자가 부들부들 떨며 말하자, 에스텔이 얼굴을 살짝 찌푸린 다음 타이로 공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한테 오라고 한 거야?”

“뭐?!”

“아니, 개를 부르듯이 오라고 해서. 내가 개는 아니잖아?”

“이, 무, 무, 무엄한!”

사태가 더 커지기 전에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자, 저 아이는 예법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 공자의 말대로 출신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니까요.”

칼리드의 말에도 불구하고 타이로 공자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가브라인 공작께선 그런 교육 따윈 시킬 생각이 없으시답니까?”

오히려 예법 교육이 필요한 것은 타이로 공자였다. 감히 일개 공자가 다른 가문, 그것도 같은 공작가의 방침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명백한 실례였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그에 분노했으나 꾹 참고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흥. 하긴, 저런 계집에겐 그걸 배울 만한 능력이 있을 리가 없지.”

칼리드는 그 말에 침묵했다. 타이로 공자는 그것을 동의라고 생각했는지 비웃음을 지었고, 에스텔은 그런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내가 친히 교육해 주지.”

칼리드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타이로 공자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평민이 귀족을 대하는 데 공손해야 한다. 우선, 어서 무릎을 꿇어라.”

“공자.”

칼리드가 만류하려고 입을 열자 타이로 공자가 말했다.

“공자, 이런 교육은 제가 대신시키겠습니다. 가브라인 공작님도, 공자도 너무 마음이 약한 모양입니다. 저는 저런 꼴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서요. 이곳은 수도와 떨어져 있어서 모르나 본데, 수도의 예법은 엄격합니다.”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대로 가다간 타이로 공자에게 에스텔이 괴롭힘을 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대놓고 말리면 타이로 공자의 심기가 상하게 된다. 이를 어떻게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에스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대단하신 나으리를 미처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브라인 공작 각하께 검술 수련을 하라고 명을 받아서요. 본디 칼리드 도련님과 함께 대련을 통해 수련해야 하는데, 나으리께서 대신 제게 가르침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스텔이 타이로 공자의 허리춤에 찬 검을 향해 눈짓했다.

타이로 공자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에스텔이 ‘천재’라는 말을 떠올리고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 타이로 공자가 에스텔의 손에 쥔 검이 목검이라는 것을 깨닫자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오냐, 그래. 내 그리하지!”

“에스텔. 그런 건…….”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그녀를 말리려 하자 타이로 공자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내린 명이 있으면 그걸 따라야지요. 저 역시도 저 평민 계집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궁금했습니다.”

타이로 공자가 자신만만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미리 말하는데, 이건 진검이다. 네 목을 벨 수도 있음이야.”

“아이고, 저는 목검인데 나으리께서는 진검이네요! 아이고, 무서워라!”

“그래, 어서 검을 뽑아 들어라!”

이 멍청한 대화에 칼리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텔은 지금 타이로 공자에게 일부러 대련을 유도하고 있었다.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더 웃긴 것은, 너무나 뻔히 보이는 수작에 타이로 공자가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 너무나 뻔했다. 말려야 했으나 칼리드는 이 상황을 막지 않기로 했다.

칼리드로서는 타이로 공자의 행동이 너무나 짜증 났기 때문이다.

칼리드는 이제 열세 살이었으며, 이 거만한 타이로 공자의 큰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미 결론이 내려져 있었다.

“저는 그러면 다른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겠습니다.”

“왜, 내 교육을 보지 않으시렵니까?”

“타이로 공자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죠. 아버님께서는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칼리드는 에스텔에게 눈짓 하나 주지 않고 돌아섰다.

시선을 줬다간 앞으로 에스텔이 벌일 일을 칼리드가 시켰다고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칼리드는 다른 연무장으로 걸어가는 척하다가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악! 끄아아아아악!”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무장에 타이로 공자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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