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66화 (166/173)

#166화 내가 너를 미워하게 됐을 때 (1)

2018.10.01.

칼리드의 유년 시절은 그렇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는 없었고, 아버지인 가브라인 공작은 그저 검에 매진할 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으며, 칼리드는 아버지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랬기에 애정을 받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도, 불행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검을 잡았다. 목검이지만 그것을 잡고 휘두르는 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랬기에 첫 수업이 끝났음에도 칼리드는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보다 더 타인 같았던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색하고 낯선 상황에 칼리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가브라인 공작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칼리드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시선을 마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에 칼리드는 쑥스러워하며 시선을 피했다.

다만 나쁜 기분은 아닌지라,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가브라인 공작이 보인 것은 칼리드와 같은 미소가 아니라 눈물이었다.

“미안하구나. 정말로 내가 미안하구나.”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칼리드는 자신의 강건한 아버지가 내보인 눈물을 보며 의아해했다.

커다란 팔이 자신의 등을 감쌌고, 칼리드는 아버지에게 안겼다. 따뜻하고 단단한 품이 느껴졌다.

“네 어미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사랑해 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앞으로도 너를 사랑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아버지의 흐느낌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무어라고 더 말했지만, 어린 그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두 번 다시 이런 포옹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

칼리드는 왜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보이는 눈물 때문에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눈물이 대답이었다.

그 후, 가브라인 공작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칼리드 역시도 굳이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칼리드의 조용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가 열세 살이 되던 해였다.

가브라인 공작과 영지를 시찰하는 도중이었다. 그들은 마물이 도시 한복판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칼리드를 남겨둔 채 가브라인 공작과 기사들은 마물을 토벌하러 사라졌고, 그는 시종 한 명과 함께 도시 한복판에 남겨졌다.

기사들과 돌아다니며 하급 마물을 보았기에 칼리드는 이번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서 있었다.

“꺄아아아악!”

그때 자신이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섬뜩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쪽에서도 마물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도, 도련님, 어서 피하십시오!”

시종의 말에 자리를 피할까 하던 칼리드는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이쪽으로 도망쳐 왔기 때문이다.

도망치는 사람들 뒤에는 시커먼 마물이 쫓아오고 있었다.

마물은 눈이 여러 개 달렸으며, 기다란 혀를 내빼고 있었다. 짙은 피비린내와 악취가 물씬 풍겨왔다.

그는 제대로 된 죽음을 처음 접했고, 따라서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마물이 칼리드를 발견하고 돌진하려던 바로 그때, 한 소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자신보다 체구가 살짝 작은 소년이었다.

“……!”

칼리드는 자연히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든 것은 번쩍이는 검이었으며, 그가 위협적으로 한 발을 내딛자 마물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말은, 마물이 저 어린 소년에게 겁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칼리드가 사람들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이 무기를 빼 들고 마물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야, 어서 안 도망가?!”

소년이 뒤를 바라보며 소리치자 그제야 칼리드는 정신을 차렸다.

그때, 소년이 아슬아슬하게 발톱을 피했다.

“이 괴물 새끼가!”

긴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소년은 아주 능숙하게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칼리드는 그 거대한 마물을 바라보았다.

저 소년이 너끈히 상대하는 것을 보아, 자신이 마물과 대적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날을 위해 검을 배워 온 것이다. 칼리드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곤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도, 도련님!”

이미 시종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곧장 검을 휘둘러 마물의 다리에 생채기를 남겼다. 덕분에 그는 간발의 차이로 마물에게 머리를 뜯길 뻔했다.

그때, 또다시 소년이 마물에게 달려들어 그는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칼리드는 저 소년이 꽤나 수준급으로 검을 잘 쓴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기사만큼 검을 쓰는 거지? 저렇게 작은 몸에 저게 가능한가?

마물이 휘두르는 발톱을 날쌔게 피하며 소년은 마물의 굵은 발에 상처를 입혔다.

“야! 구경할 거면 저리 가고, 도와줄 거면 도와줘!”

소년이 빽 소리치자, 칼리드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소년의 공격에 정신이 팔려 무방비하게 노출된 마물의 허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뒷다리가 날아와 칼리드를 걷어차려고 했다. 칼리드는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 멍청아! 목을 공격했어야지!”

참으로 말 많은 소년이었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마물이 휘두르는 손을 피하며 소년은 칼리드에게 손짓했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이번엔 빨리!”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일부러 위협적으로 검을 흔들었고, 마물은 으르렁거리며 소년을 응시했다.

칼리드는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러나 마물이 뒤에서 자신을 목을 노리며 다가온 칼리드를 눈치챈 것은 순간의 일이었다.

마물이 홱 뒤를 돌면서 아가리를 벌리며 칼리드에게 달려들었다.

칼리드는 재빨리 그 아가리 사이로 검을 꽂아 넣었다.

“크으으으으!”

마물은 입을 다물려고 했으나 검이 단단히 고정되어 다물지 못했다.

검을 빼기 위해 마물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칼리드는 소년에게 눈짓했다. 소년은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깔끔하게 마물의 목을 찔렀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피를 뒤집어쓴 칼리드와 소년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소년은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리드 역시도 소년에게 호기심이 생겼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시종을 찾기 위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는 아버지와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눈을 크게 뜬 채 자신과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브라인 공작 역시도 놀란 표정이었다.

“도련님!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놀란 시종의 말에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브라인 공작을 바라보자, 그는 이미 자신을 보고 있지 않고 그 소년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검을 배웠나?”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보고 가브라인 공작이 말했다.

“따라와라.”

“내가 왜?”

가브라인 공작의 눈짓에 기사들이 일제히 소년을 잡아 들었다.

“이거 놔!”

소년의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브라인 공작이 칼리드에게 다가왔다.

그는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한참 칼리드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큰 부상은 없나 보군.”

“…….”

“잘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네 목숨을 중히 여기거라.”

“…….”

담담한 어투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그러나 어째서인지 칼리드는 가브라인 공작의 두 눈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

새로 들어온 소년은 이상했다.

마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의무라도 되는 듯 소란스러웠다.

쥐죽은 듯 조용한 공작가에 들어와 살게 된 소년은 며칠 동안은 자신을 내보내 달라며 꽥꽥거리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한 소란에 가브라인 공작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칼리드도 그것이 옳다고 판단하며, 그의 조용함을 방해하는 그 원숭이 같은 소년에게 관심 따윈 주지 않았다.

무언가 합의가 된 것인지, 소년은 더 이상 내보내 달라고 소리치지 않았다. 그러나 항상 사용인들과 싸웠다.

가끔 책 읽는 시간이 소년의 고함 소리에 방해받을 땐 저 입 좀 닥치면 안 되나,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는 그런 생각을 애써 숨겼다. 소년은 아버지가 데려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문제는 소년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꾸 칼리드에게 말을 건네왔는데, 칼리드로서는 딱히 대답해 줄 말도 찾지 못했고, 별로 대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항상 그를 지나쳐 갔다.

보통 그런 식의 태도를 보이면 사람들은 그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칼리드가 배워 온 인간관계에서의 ‘거절’은 그러했다. 그러나 소년은 이상하게도 끈질겼다.

자신이 귀족이고 소년 자신이 평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자신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아버지가 데려왔다고 아버지를 믿고 나대는 건가? 아니면 신분의 법도와 예의를 생각할 정도의 지능이 없는 건가?

훗날, 칼리드는 이것이 자신이 ‘그녀’에게 품은 일종의 적대감임을 인정했다.

***

그날은 아주 맑은 날이었다.

칼리드는 교육이 끝나고 뒤에 있을 검술 훈련을 위해서 연무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칼리드는 그 당시, 소년이 검에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그 문제의 소년이 나타났다. 그는 화가 났는지 숨이 거칠었으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이, 귀족 도련님이라고 날 무시하는 거냐?”

“…….”

“오늘 네 그 곱상한 얼굴을 짜부라뜨리고 말 거야!”

자신에게 소리치는 소년을 칼리드는 말없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시라니. 그냥 상대하기도 싫고, 상대해 봤자 시끄러워서 피한 건데. 그게 무시인가?

물론 누가 봐도 무시라고 할 행동이었건만, 칼리드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무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대한다면 시끄러워질 게 뻔했기에 칼리드는 소년에게서 몸을 돌렸다.

“너 인마, 또 날 무시해!”

정말 시끄럽고 끈질기다라고 생각할 때 별안간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뺨에 내리꽂힌 주먹은 제법 단단했고, 아팠다.

그 주먹에 나동그라지면서 칼리드는 처음으로 분노했다.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다니, 어디에 팔아먹은 예의란 말인가! 그가 이를 갈았다.

“이 원숭이 같은 놈이……!”

“뭐? 나보고 원숭이라고 했냐?”

싸울 의지가 이미 충만했던 소년과 싸울 의지가 비로소 생겨난 소년이 주먹다짐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가브라인 공작의 시선에 칼리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년 역시도 씩씩거렸다. 그들의 얼굴은 싸움의 영광스러운 흔적으로 알록달록했다.

“저 새끼가 먼저 날 무시했단 말이야, 나으리.”

“저 자식이 먼저 제게 주먹을 날렸습니다, 아버지.”

칼리드가 분노 서린 얼굴로 말했다.

그 얼굴을 본 가브라인 공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곤 이내 피식,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칼리드는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가브라인 공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

“…….”

그 말에 칼리드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소년 역시도 노란 눈으로 노려보았다.

“공작가의 자제라는 놈은 사사로이 주먹질에, 평민이라는 놈은 기껏 거둬 재능을 펼치게 해준 은혜도 모르고 공자에게 다짜고짜 주먹질이라니.”

가브라인 공작의 말이 맞기에 그는 감히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년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러면 날 다시 쫓아내던지! 억지로 데려와 놓고선 뭐가 어쩌고 어째?”

“…….”

진실로 칼리드는 저 소년의 패기에 감탄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가브라인 공작이 소년의 목을 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작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어느 정도 교양이 필요할 것 같군.”

“교양은 개뿔. 검술 때문에 붙어 있는 거니까, 여기서 더 뭘 시키려 했다간 다 때려치울 거야.”

“자꾸 그 혀를 놀리다간 혀를 자를 수도 있다.”

“어이고, 무서워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

소년이 팔짱을 끼며 노려보았다. 반항적인 눈빛이 영락없이 야생동물 같았다.

가브라인 공작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둘 다 당분간 근신하도록.”

소년이 불만스러운 듯 뭐라고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공작의 단호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더 반항했다가 뼈도 못 추릴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공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졸지에 저택에 갇히게 된 그들은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칼리드는 저런 놈에게 주먹을 휘둘러 어울려 주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아버지에게 혼난 것 역시도 그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앞으로 저놈이 자신에게 얼쩡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후련했다.

물론, 바로 다음 날 그게 오산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야, 심심해!”

다짜고짜 방에 쳐들어온 소년은 책을 읽고 있는 칼리드의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근신이라는 말을 모르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뻔뻔함에 칼리드는 혀를 내둘렀다.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칼리드가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과연 귀족 도련님 아니랄까 봐, 대단하네.”

“너는 책도 못 읽나?”

“응. 글을 모르니까.”

칼리드의 주변에는 글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한데 그런 존재가 있다니, 칼리드에게는 상당히 충격이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는 게 귀찮고 짜증 났다.

“무슨 책이야? 엄청 어려운 책이겠지?”

“별로 어려운 책도 아니야. 좀 나가 줄래?”

“싫어, 심심하다고. 너 때문에 내가 지금 밖에도 못 돌아다니잖아.”

“그건 네가 먼저 나한테 시비를 걸었잖아.”

“네가 날 무시해서 그런 거잖아!”

또다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칼리드는 저 시끄러운 녀석의 입을 어떻게 하면 다물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번에 또 싸운다면 아버지도 가만히 있진 않을 것이다.

칼리드는 사람을 시켜서 쫓아낼까 하다가 포기했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포기라는 걸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타협을 선택했다.

“심심하면 책이나 읽고 놀아.”

“글 모른다니까.”

“그러면 알아서 놀아.”

“놀 만한 게 없는데. 여기 너무 심심해. 내 또래는 너밖에 없다고. 놀아주라.”

“하아…….”

“왜, 귀족 도련님이라 나랑 노는 건 좀 그래?”

“그렇다곤 말 안 했어.”

사실 그가 신분에 대한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평민과 귀족, 신분의 격차가 있음에도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해 버린 소년 때문에 그걸 문제 삼을 시점을 놓친 것뿐이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나으리’라고 부르는 불손한 태도를 보면 문제를 삼는 게 이상했다.

“뭐 하고 놀 건데?”

“뭐 하고 놀긴! 검 가지고 놀자.”

“…….”

결국 또 검술 수련을 하자는 건가. 칼리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실내 연무장은 이곳에 없었다.

“그건 불가능해. 우린 밖에 못 나가.”

“심심해, 심심해, 심심하다고!”

“제발, 조용히 좀 해.”

칼리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이 시커먼 먼지 덩어리 같은 소년이 자신에게 꽤나 끈질긴 것을 알았다.

“좋아.”

“응?”

“그럼 이야기를 해줄게.”

“이야기?”

“이런저런 이야기 말이야. 신화나 동화 같은 거. 어차피 근신은 길어봤자 사흘이야. 그러니까 그동안 나름의 교양이라도 좀 습득해 봐.”

“……재미없을 것 같은데.”

“싫으면 다른 데 가던지.”

이것은 칼리드가 내걸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이었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고 생떼를 쓰면 그땐 저놈을 내쫓아 버릴 것이다.

“그래, 그럼.”

그러나 소년은 사람들의 마지막 선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씨익 웃으며 의자를 칼리드 바로 옆에 가져와 앉았다.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그 모습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러면서도 칼리드는 누군가가 자신 옆에 이렇게 있는 게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야, 너는 이름이 뭐야?”

소년이 물었다.

“도련님이라고 불러.”

“누가 안 부른대? 이름을 알려달라는 거잖아. 같이 지낼 사이인데.”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호박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자신에게 맞먹었다는 건 알고는 있는 걸까? 뒤끝 하나 없는 태도에 평민들은 다 그런 건지, 저 애가 특이한 것인지 고민하면서 칼리드는 조용히 대답했다.

“칼리드.”

“칼리드? 생각보다 짧네.”

“그러는 네 이름은 뭔데?”

키우는 짐승도 지칭할 이름은 지어주는 법이었다. 하물며 저 빌어먹을 평민 소년을 부를 이름이 필요했다.

이름을 묻는 것은 칼리드가 타인에게 보이는 첫 관심이었다.

“내 이름? 에스텔.”

“에스텔?”

에스텔, 별이라니. 생각보다 좋은 이름이었다.

“어때, 내 이름 근사하지?”

그렇게 웃는 소년의 두 눈이 반짝였다.

에스텔.

그는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소년의 눈을 바라보았다.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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