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65화 (165/173)

#165화 외전 2. 훔쳐 간 이름 (2)

2018.09.27.

“젤다, 잘 들어라. 넌 주인님의 친딸이란다.”

그녀는 알토가 자신에게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꿈을 꾸거나.

젤다는 눈만 깜빡였다.

“그간 숨겨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알토의 말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누구와 사랑했는지, 어머니를 사랑했다는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맨 처음 든 감정은 ‘역시’라는 감정과 환희였다.

역시 그랬다. 자신은 루아나와 같은 출생이었다. 그래서 루아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주인님께는 미리 말해 드렸다. 너를 찾고 계신다.”

젤다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누워 있는 노인은 젤다의 손을 잡고 가만히 눈물만 흘렸다. 그것을 본 젤다의 두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손을 맞잡은 그들은 이제 하녀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라 부녀로서 처음 마주했다.

“좀 더 가까이 오렴.”

갈라진 목소리로 남작은 애정을 담아 그녀를 향해 말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널 앞에 두고도 아비라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했다.”

그 말에 그녀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비로소 루아나에게만 향했던 애정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그것에 충족감을 느끼며, 그녀는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

모든 것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루아나 아가씨에게는 알리지 마라.”

재회를 끝나고 난 후, 방을 나오자 알토가 말했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설마, 지금 그녀의 고귀한 출생을 숨기라고 말하는 것인가? 남작의 핏줄임을 알면서도, 또 하녀처럼 살아가라는 것인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아가씨께서 마음이 많이 상하실 거다.”

알토는 젤다를 돌봐 주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서까지 그를 아버지로 여기지 못했던 이유는, 그는 아가씨와 남작가를 더 우선했기 때문이다.

“루아나의 마음이 상한다고요?”

“루아나라니, 아가씨에게 무슨 말버릇이냐.”

“루아나와 나는 자매라고요! 저는 걔 언니고요!”

“무례하구나! 네가 그렇다고 진짜 귀족이라도 되는 줄 아느냐?”

“왜 못 되는데요!”

“아가씨를 생각해라! 이래서 욕심을 가지지 못하게 키우려고 했건만.”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알토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루아나의 것을 탐내면 그렇게 엄격하게 혼냈던 것이다.

그녀는 왜 화를 내지 않던 알토가 루아나와 관련한 일에 대해서만 화를 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어렸을 때부터 저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아저씨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 넘어갈 수 있는 말이지만, 되짚어보면 이상했다.

“그래.”

“왜 이 저택에 절 데려온 거죠?”

“부녀가 함께 지내길 바랐단다.”

참으로 따스한 배려였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까지 아버지를 앞에 두고도 모른 채 살았다. 아버지가 아버지인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존재를 그리워했던 거다.

“왜 처음부터 저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마님과 아가씨가 상처를 입지 않느냐.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어.”

알토의 말은 냉정했다. 젤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모두에는 제가 없잖아요, 아저씨.”

그 말에 알토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저씨, 아버지를 옆에 두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던 저는 없잖아요! 제 동생의 시중을 들어주고 살았던 저는 없잖아요!”

“젤다.”

“루아나의 것을 탐낼까 봐, 그렇게 혼내시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 아이, 아가씨의 것을 부러워했어도 뺏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단 말이에요!”

“…….”

“너무 잔인하잖아요!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가족 없이 몇 년을 살아왔는데!”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용서하려무나.”

알토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사과했다.

결국, 그녀는 뭐였을까. 이 가족을, 이 남작가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당했단 말인가? 아버지를 앞에 두고도 아버지를 그리며, 이복자매의 시종을 들어주며 그렇게?

“나, 나는 뭐예요? 루아나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면 나는 뭐예요?”

그녀는 울부짖었다. 그동안 살아왔던 세월은 보상되지 않는다.

루아나와 그녀는 자매였고, 그녀는 여동생의 시중을 들었다. 루아나에게 품었던 동경과 질투는 죄악이라고 죄책감을 느끼면서, 행여나 그녀의 것을 탐낼까 봐.

사실, 모두가 처음부터 그녀의 것이었는데! 그녀는 울부짖었다.

***

이젠 아가씨로 대우를 받고 싶어도, 몰락한 남작가에선 그녀가 부러워하던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었다. 자신을 아가씨로 대할 사용인들도, 아름다운 옷들도 사라진 지 오래였으니까.

그러나 남작의 앞에서 그녀는 남작가의 아가씨가 될 수 있었다.

“이리 오려무나, 내 딸.”

남작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래, 예쁜 드레스와 반짝거리는 장신구가 무슨 소용인가. 아버지가 있으면 되는 것이다.

루아나. 자, 봐. 너는 아버지 곁에 없지만, 나는 이렇게 아버지 곁에 있을 수 있어.

그녀는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그렇게 그녀는 아버지 없이 살아왔던 설움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초에 그녀가 그와 재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였다.

일주일간의 꿈과 같은 시간 후, 남작은 결국 정신을 놓아버렸다.

“루아나, 루아나, 내 딸을 불러줘!”

죽음을 앞두고 정신을 놓은 남작은 루아나만을 찾았다. 딸인 젤다가 옆에 있는데도.

“아버지, 루아나는 곧 올 거예요, 사람을 보내뒀어요.”

“루아나, 루아나, 네가 보고 싶구나!”

남작은 눈물을 흘렸다.

“내 딸, 내 유일한 딸! 루아나를……!”

유일한, 이라는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아버지의 딸이 여기도 있어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정신을 놓은 남작은 이성 따윈 없었다. 그것을 젤다는 알고 있었다.

남작이 핏발 선 눈으로 소리쳤다.

“너는 루아나의 하녀지 않느냐! 하녀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그러나 그것을 안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루아나를 불러다오!”

“루아나는 곧 온다니까요! 아버지, 그러니까 제발……!”

그녀는 남작의 손을 잡았다. 그러나 남작은 손을 내치며 젤다를 바라보았다.

“이 무엄한 것! 넌, 내 딸이 아니야! 내 딸, 내 딸을 불러줘.”

서로를 인식하고 부녀로서 행복하게 살아왔던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그랬기에, 넌 내 딸이 아니라는 말은 젤다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루아나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다오.”

그렇게 남작은 루아나를 찾다가 죽어버렸다.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그녀에게 남긴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이.

그것으로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진정한 딸이 아니었던 것이다.

“루아나 아가씨가 곧 오실 텐데! 주인님!”

“아아, 주인님! 불쌍하신 주인님, 불쌍하신 아가씨!”

쟈넷과 알토 역시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젤다의 슬픔과 비참함에 대해서 위로하지 않았다.

엇갈려서 임종을 같이하지 못한 부녀에 대한 안타까움뿐이었다.

그리하여 젤다는 깨달았다.

이곳은 애초에 그녀를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일이면 온다는 루아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루아나에게, 자신의 이복동생에게 증오를 쏟아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루아나는 마지막까지 젤다가 원했던 사랑을 독차지했으니까.

루아나의 자리를 넘본 게 잘못이었다. 애초에 반짝거리며 빛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을 탐내자 결과는 참혹하게 돌아왔다.

그녀는 루아나로부터 도망치듯 유년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유일한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것이 그녀의 가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애정이라고 생각하며.

***

세상은 어린 여자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 나라 얼샤에서는.

나라는 흉흉하고 인심은 각박했으며, 그녀는 약자로서 당할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당했다. 그 험한 세상, 그녀는 뒷골목에서 근근이 살아갔다.

너무 힘들 때면 그녀는 남작가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루아나를 떠올리자마자 그녀는 이를 으득 깨물었다.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다짐하며.

그런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슈페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온갖 달콤한 말로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가 그 꼬드김에 넘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비록 루아나처럼 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은 열렬히 사랑했다. 젤다는 그에게 완전히 몸과 마음을 다 주었다.

“나, 아이를 가졌어.”

남자는 그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억지로 짓는 미소였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들은 결혼을 했고, 아주 작은 집에서 살았다.

아이를 가진 초반엔, 그는 퍽 다정한 남편이었다. 먹을 걸 구해다 주고,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세 가족이 자리를 잡게 돈을 벌어오겠다고 말한 후 젤다가 모아둔 돈을 가지고 떠나 버렸다.

젤다는 자신의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남자가 젤다를 버렸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다.

그 남자가 사실은 여러 여자에게 사기를 친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듣는 순간, 그녀의 행복한 기다림은 악몽이 되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이미 아이는 뱃속에서 거의 다 자란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목숨을 걸고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딸이야.”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출산의 고통과 더불어 그녀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채 자신처럼 구질구질한 인생을 살게 될 딸이 너무나 가여웠기 때문이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아이의 이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절망에 허우적대느라 그 이름을 생각해 두지 않았다.

“에스텔.”

그때, 루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텔. 그 고귀한 아가씨가 지은 이름.

“에스텔.”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말했다.

결국, 젤다는 루아나가 딸의 이름으로 지을 거라던 그 이름을 훔쳤다.

진이 빠진 그녀는 엉엉 우는 작은 핏덩이를 바라본 채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아가씨, 아가씨는 아이를 낳으면 별로 지을 거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아가씨, 제가 낳은 제 자식의 이름을 아가씨가 지으려던 대로 짓는다면 제 자식도 그렇게 빛날 수 있을까요? 아가씨처럼 그렇게 사랑받는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끝내 빛나는 인생을 살지 못했던 그녀가, 루아나의 빛을 조금이라도 덜어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반짝이는 이름을 지으면 저 아이 역시도 반짝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잘 알고 있었다.

구질구질함 속에서는, 구질구질한 것밖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이에게 과분한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자조했다.

***

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자기 자식에 대한 애정은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귀찮고 거슬렸다. 혼자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세상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았다.

아이는 뒷골목 사람들의 자비를 먹고 자랐다. 그 시궁창 속에서도 언제나 활기찼으며 활짝 웃고는 했다. 그것이 꼭 루아나를 떠오르게 했다.

에스텔은 떠나간 남자처럼 잿빛 머리카락을 지녔으며, 바네사 남작을 닮아 호박색 눈동자를 지녔다.

그녀는 힘든 삶에도 에스텔을 보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에스텔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에스텔을 사랑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사랑하는 딸을 버릴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그녀는 또다시 도망을 선택했다.

딸을 버리고 그녀의 인생이 행복해졌냐고 물어본다면, 젤다는 주저 없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여전히 그녀의 인생은 고단했고,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가끔은 눈물지었다.

자신이 불러주던 자장가를 행복한 표정으로 듣던 어린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밤마다 괴로웠다.

도망을 친다면 모든 것을 끊어내야 하건만, 그녀는 완벽하게 끊어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설령 그녀가 풍족하게 살 수 있어도 그녀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귀족의 횡포로 나라는 더욱더 황폐해졌고, 젤다 역시 황폐한 삶을 살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루아나가 그랬던가. 그 말 그대로 그녀는 더욱더 힘든 삶을 살았고, 더욱더 비참해졌다.

그렇게 구질구질한 삶을 이어 나가던 중 그녀는 결국 죽을병을 얻고야 말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맨 처음 했던 일은, 자신이 버린 딸을 찾아 헤맨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에스텔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바네사 남작저를 찾아갔지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루아나는 부강한 나라인 얀스가르로 떠났다고 한다.

이제 그 어디에서도 그녀가 있을 곳은 없었다. 그녀는 살아갈 목적을 잃어버린 채 그렇게 떠돌아다녔다.

병이 걸린 그녀를 사람들은 경멸하기도 했고, 동정하기도 했다.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갔고, 이따금 발작을 일으켰으며, 결국 그녀는 조용히 자신에게 징벌처럼 찾아올 죽음을 기다렸다.

“개선 행진을 할 거래!”

“마물을 물리쳐 준 기사님들이 여길 지나간다는데?”

“평민 여자 출신이래!”

“여자가 검을 써?”

“엄청 잘 쓴대. 그래서 기사단장이 됐나 봐.”

그녀는 거리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성에서 나오는 관리 중 한 사람이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

“이 재수 없는 여자야! 저리 꺼지지 못해!”

그녀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켜 더 안쪽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했다.

“저쪽에 오신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힘이 없던 그녀는 인파에 휩쓸려야만 했다. 그녀는 어쩌다 보니 맨 앞에 서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 그녀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그녀는 기사들의 진귀한 행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바네사 남작도 기사였다지?

힘없이 앞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구경이라도 하자고 생각하면서.

“여잔데도 검을 잡다니.”

“그래서 이슈타르라잖아.”

이슈타르라.

예전, 루아나와 딸의 이름을 지을 때, 가호를 받게 별의 이름을 짓자고 했었지. 이슈타르처럼. 에스텔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녀는 멍하게 서서 길 쪽을 바라보았다. 이슈타르건 뭐건 그녀는 이제 생각할 힘도 없었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그런 빛나는 것들과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멀리서 바라보던 때였다.

“아, 아아!”

젤다는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단어가 나오지 않았다. 분명 백마를 탄 것은 잿빛 머리칼을 지닌 여자 기사였다.

개선행진의 맨 선두에 선 그녀는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적색 망토를 두른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사는 특유의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도 알 수 있었다. 절대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 에스텔이었다.

“잠깐, 잠깐!”

그녀는 소리치며 사람들 앞으로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힘은 너무나도 약했다.

사람들은 이슈타르를 볼 기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인파에 떠밀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안간힘을 써서 기어코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이를 바라보았다.

딸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버렸음에도 언제나 그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그녀가 이런 모습일 줄 몰랐다.

“저 여자가 이슈타르라니.”

“검을 그렇게 잘 쓴대! 이번에 마물 토벌도 저 기사단에서 한 모양이야.”

“귀족을 제치고 기사단장 직에 올랐다지?”

사람들의 찬탄이 쏟아져 나왔다. 색색의 꽃잎이 흩날렸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녀를 환대했다. 그 길 속, 에스텔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구름에 가렸던 햇빛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녀의 잿빛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에스텔.

젤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고귀함을, 반짝임을 가지길 바라서 지었던 그 이름.

그녀는 자신의 딸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요, 아가씨.”

하지만 자신의 딸은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아나가 지은 이름을 훔쳐 왔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녀가 저리 빛나는 것일까?

그녀는 울음을 눌러 참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 못나고 추레한 어머니가, 혹여나 그녀의 빛을 꺼뜨릴까 봐.

이걸로 되었다.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텔.”

자신의 딸이 그 대단하다는 기사님들의 선두에 선 채, 그렇게 온 세상의 빛을 받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때, 호흡이 가빠져 오며 그녀는 피를 토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몸에 무리가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구역질을 해댔고, 피를 토하는 역한 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 이 여자가 어디서! 더럽게!”

결국, 그녀는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땅에 누운 뒤에도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피를 토했다.

하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사람들 다리 사이로 지나가는 백마의 말발굽을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던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의의를 발견했다. 세상의 모진 풍파 속에 버려두고 갔던 그녀의 딸, 그녀를 낳기 위해서 그녀는 존재했던 것이다.

빛이 날 수 있었다, 루아나처럼 되고 싶었지만, 루아나가 되지 못했음에도 그녀의 딸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훔쳐서 참 다행이었다.

참으로 이기적인 어머니였다. 딸과 재회해서 기쁜 게 아니라, 반짝거리며 빛나는 딸을 보고 행복을 느끼다니.

그러니 에스텔, 용서하려무나.

네게 다가가지 않는 것이 내 마지막 모정이란다.

쓰러지면서도 그녀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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