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외전 1. 훔쳐 간 이름 (1)
2018.09.24.
“젤다, 잘할 수 있지?”
“네, 잘할게요.”
차분한 대답에 쟈넷이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젤다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맑은 목소리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은 예쁘고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귀족의 방이라기엔 다소 소탈한 방이었으나, 하녀인 젤다의 눈에는 그러했다.
그것을 둘러본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검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살을 머금은 검은색 머리칼에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새하얀 피부와 복숭앗빛 홍조, 새파란 눈은 마치 사파이어 같았으며, 입술은 붉디붉은 앵두 같았다.
그녀의 아가씨, 루아나 바네사는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오늘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젤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을 본 루아나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아나가 문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둘을 지켜보고 있던 쟈넷이 문을 닫았다.
그것을 확인한 루아나가 젤다에게 다가왔다. 젤다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였다. 루아나가 덩달아 허리를 숙이며 속삭였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거야, 젤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리를 숙였던 젤다 역시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젤다, 누가 보면 진짜 얌전한 하녀인 줄 알겠어.”
“아가씨야말로 누가 보면 천상 레이디인 줄 알겠어요, 정말!”
루아나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성공했다, 성공했어!”
“맞아요, 아가씨, 성공했어요!”
젤다는 오래전부터 이 저택에서 살고 있었고, 같이 자라왔다. 또한 저택에서 유일한 루아나의 또래였다. 친구가 안 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들은 동무가 되었으며, 루아나는 그녀와 함께할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간단했다. 젤다를 자신의 수발 하녀로 해달라고 조르는 것.
루아나의 생떼에 남작부인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딸을 귀애하는 남작 역시 그녀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열셋, 어린 나이에도 젤다는 루아나의 하녀가 될 수 있었다.
젤다는 그녀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녀와 귀족 레이디라는 신분의 격차를 뛰어넘어서 자신을 친구로 여겨주는 루아나. 그런 아가씨를 모신다는 것은 그녀 평생의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
젤다에게는 루아나가 좋아하는 간식인 ‘젤리’라는 애칭이 붙었고, 그들은 가까운 만큼 더욱 돈독해졌다.
젤다가 루아나를 모시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운 일이었다.
“젤리, 이 옷 좀 입어봐!”
“네? 아이고, 아가씨, 저는 이런 거 못 입어요.”
“아니야, 젤리가 입으면 정말 예쁠 거야.”
루아나가 든 옷은 새하얀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의 옷이었다. 장식 없는 칙칙한 옷만 입던 그녀가 절대 입어보지 못할 옷이었다.
그녀라고 이런 옷을 입는 것을 꿈꾸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을 길러준 알토가 분수에 맞는 삶을 살라고 엄격하게 훈육했기에 그것은 잘못처럼 느껴졌다.
“젤리, 어서 입어봐.”
입어보고 싶다. 정말로 입어보고 싶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을 본 루아나가 말했다.
“응? 명령이야, 아가씨의 명령.”
명령이라니, 어쩔 수 없지. 젤다는 루아나의 고집에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이게 저한테 맞을까요?”
“당연히 맞지. 젤리랑 나랑 키가 비슷하잖아. 그리고 젤리가 나보다 살짝 말랐고.”
“…….”
“어서 입어봐. 젤리를 꾸며주고 싶어.”
젤다는 망설이다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비록 화려한 연회용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젤다에게는 이것마저도 커다란 호사였다.
항상 입는 것만 도와주다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옷을 입어보았다. 살결에 닿는 옷감의 촉감은 너무도 부드러웠다.
“젤리, 너무 예쁘다!”
그녀가 화장대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루아나가 그녀를 막아섰다.
“어허. 안 되지, 안 돼! 머리도 예쁘게 묶어야지!”
“하, 하지만.”
“머리 만지는 거 싫어?”
“아, 아니요.”
“그럼 이리 앉아봐.”
“음…….”
“이리 오세요, 젤리 아가씨, 저는 젤리 아가씨의 수발 시녀인 루아나입니다.”
루아나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젤다는 결국 한숨을 쉬며 앉았다.
“머릿결 진짜 좋다.”
“아가씨만 할까요.”
“아니야, 젤리. 정말 부드러워. 머리카락 색도 예쁘고. 어디 보자, 분홍색 드레스니까 분홍색 리본이 어울리겠지.”
“…….”
루아나는 한참 동안 공들여 그녀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는 동안 루아나는 콧노래를 불렀다. 참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놀이’로 즐기는 게 루아나는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젤다는 갑자기 문득 든 냉소적인 생각에 깜짝 놀랐다.
이런 주인이 어디 있는가. 그녀는 천사처럼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런 드레스는 평생 입어보지도 못할 게 뻔했다. 황송해야 마땅한 것이다.
황송?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다 됐다!”
그때, 루아나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려는 그녀를 다시 앉히고 루아나가 재빨리 손거울을 가져왔다.
“여기 봐봐, 젤리.”
젤다가 거울을 들자마자 루아나가 커튼을 확 젖혔다.
햇빛이 들어오자 거울 안에 있는 소녀가 보였다. 어여쁜 소녀가.
“어…….”
“저기 큰 거울을 봐.”
루아나가 거울을 가리키자, 젤다는 그곳으로 홀린 듯 걸어갔다.
거울 속에 있는 귀족 레이디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거울에 비친 사람이 자신인가 싶어 놀라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정말로 예쁘다. 그렇지?”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이상하게도, 너무나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드레스가 제 몸에 꼭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젤다도 드레스를 입으니 레이디 같아.”
“…….”
젤다는 루아나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바로 옆에 서 있는 루아나를 바라보았다.
외형만 보면 그리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비슷한 느낌마저 들었다.
진짜 레이디인 루아나.
레이디의 옷을 입은 가짜인 자기 자신.
젤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루아나의 외모보다는 떨어지지만 자신 역시도 예쁘장했다.
귀족은 귀족 나름의 우아한 예법이 있다지만, 루아나는 예법을 잘 지키지 않는다.
이렇게 비슷한데 루아나와 내가 무엇이 다를까?
젤다는 자신의 생각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랐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녀는 자신이 주제넘음을 반성했다. 하녀는 하녀의 분수를 알아야만 했다.
“우리, 나가자.”
“아, 아가씨. 하지만 바깥으로 나가면, 제가 혼나요!”
“아니야, 내가 떼썼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같이 드레스 입고 산책하자.”
“아니……!”
루아나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끌고 나갔다. 젤다는 할 수 없이 이끌려 나갔다.
그러면서도 내심 사람들이 루아나와 자신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주지 않을까, 어린 마음에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관에 나갈 때였다.
“루아나!”
“아버지!”
아뿔싸! 바네사 남작과 마주했다. 며칠간 출타 중이던 남작이 지금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옆에는 알토까지 서 있었다.
알토는 루아나를 보더니 드레스를 입은 젤다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바네사 남작도 마찬가지였다. 바네사 남작이 뭐라 하기 전에 알토가 소리쳤다.
“젤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 아니. 저는…….”
아가씨가 억지로 옷을 입혔어요.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였다.
“보나마나 루아나가 억지로 입힌 거겠지. 그렇지 않으냐?”
바네사 남작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남작의 다정한 말에 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의 품에 안겨 있던 루아나가 말했다.
“잘 어울리지요? 드레스는 제가 골랐어요.”
“그래, 잘 어울리는구나.”
바네사 남작이 잘 어울린다고 하자 젤다는 조금 뿌듯했다. 이 저택의 주인이 그렇게 말했다니 이보다 더 큰 칭찬은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어요!”
“그래, 나도 보고 싶었다.”
“선물 사오신다고 하셨지요?”
“녀석, 이 아비보다 선물이 더 좋은 거냐.”
“물론, 아버지가 더 좋지요. 하지만 아버지가 준 선물도 그만큼 제겐 중요한걸요. 아버지가 주신 선물이니까.”
루아나의 말에 남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젤다는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다정한 부녀의 모습이었다. 사랑받는 딸, 사랑을 아낌없이 주는 아버지. 너무나 이상적인 그들의 관계.
아버지, 아니, 부모가 없는 젤다는 평생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리 오너라, 젤다.”
알토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루아나를 쳐다보니, 루아나는 남작과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서!”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갔다.
알토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집사의 방에 들어간 그녀는 알토의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아가씨의 드레스를 탐내다니, 분수를 모르는 것이냐?!”
“아저씨도 들으셨잖아요. 그건 아가씨가 그런 거예요.”
“거짓말하지 말거라. 너 역시도 동의했으니 그런 거 다 안다!”
“하지만!”
그녀는 변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토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아가씨가 설령 그러셨더라도 끝까지 안 된다고 했어야지! 네가 아가씨 성정을 몰라서 그리한 것이냐? 네가 탐내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 옷을 입은 것이지.”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알토가 그렇게 말하니 자신이 정말로 커다란 잘못을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입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그녀는 거절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녀가 명령이라는 말을 담은 이상 그랬다.
알토는 그런 상황을 믿어주지 않았다.
“주인의 것을 탐내게 하려고 내가 너를 데려온 게 아니다!”
왜 바네사 남작은 자신을 바로 믿어주고, 아버지처럼 따랐던 알토는 자신을 믿지 않는가.
정작 바네사 남작은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알토는 그것이 무슨 커다란 잘못이라도 된다는 듯 말했다.
“탐내지 않았다니까요!”
정말이다, 탐내지 않았다. 그저 조금 비교를 했을 뿐이었다.
알토는 거의 주문처럼,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그녀를 훈육해 왔다.
그랬기에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반성할 때까지 네 식사는 없다!”
알토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가 버렸다.
젤다는 억울해서 흐느껴 울었다. 잘못 하나만 해도 밥을 굶어야 하는 삶.
그녀는 그것이 억울해 일을 마친 쟈넷이 와서 달래줄 때까지 목 놓아 울었다.
***
“쟈넷, 나는 나만을 사랑해 주는 남편을 만날 거야. 많은 돈 따윈 필요 없어.”
차를 내오던 쟈넷은 재잘재잘 떠들던 루아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남작부인에게서 결혼에 대해 교육받은 모양인지 열세 살이 된 루아나는 ‘결혼’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젤다, 너는?”
“저는…….”
젤다는 쟈넷의 눈치를 보았다. 아가씨의 말에 감히 대답해도 되는 것일까?
티 파티를 열어 그녀의 건너에 앉아 있는 것도 알토에게 한 소리를 들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녀가 주눅 든 표정으로 눈치를 보자 쟈넷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젤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저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족해요.”
거짓말이었다. 젤다는 적어도 루아나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사줄 수 있는 남자를 원했다.
루아나가 사랑만 필요하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좀 더 자라자 젤다는 자신과 루아나의 명확한 차이를 알았다. 그리고 그 차이를 납득하지 못하며 그녀를 부러워하는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젤다는 루아나를 완벽하게 미워하지 못했다.
루아나는 언제나 그녀를 아끼고 챙겼으며, 배려했다.
천사같이 사랑스러운 루아나.
그녀를 자매처럼 여기는 다정한 루아나.
알토는 루아나의 배려를 볼 때면 언제나 젤다를 혼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루아나는 처음으로 알토에게 화를 냈다.
그것은 ‘떼’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귀족으로서의 고상하고 품위 있는 태도와 서늘한 목소리로 루아나는 ‘주인으로서’ 알토의 태도를 지적했고, 알토는 그 이후로 젤다를 혼내지 않았다.
이후, 루아나는 더욱 젤다를 아껴주었다.
소중한 사람은 소중하게 대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어여쁜 아기를 낳을 거야. 아기는 딸을 낳았으면 좋겠어.”
“꼭 그렇게 되실 거예요. 아가씨가 낳은 딸은 얼마나 어여쁠까요.”
루아나의 천진난만한 말에 쟈넷이 맞장구를 쳤다.
“젤다가 낳은 딸 역시 참 예쁠 거야.”
젤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를 닮은 딸이 더 어여쁠 거예요.”
그 말에 루아나가 무어라고 더 말하려다 이내 행복하게 웃었다.
“그럼, 우리 딸들은 다 예쁠 거야.”
“그래요.”
“그렇지만 예쁘기만 한 건 소용없어. 여자라면 자고로 강해야지.”
“네?”
여자가 강해야 한다니? 젤다와 쟈넷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루아나는 단호한 표정이었다.
“여자란 자고로 이슈타르처럼 강해야지. 나는 몸이 약해 아버지처럼 검술을 배울 수도 없으니, 내 딸은 검술도 배워야 해.”
“그렇다면 아들을 낳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젤다! 나는 딸을 낳고 싶어! 건강한 딸을 낳아서 검을 휘두르게 하고 싶단 말이야. 나는 못 하는 걸 내 딸은 할 수 있게 할 거야.”
그녀의 고집스러운 말에 젤다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자신은 그런 딸은 별로 낳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딸을 낳더라도 원하는 것은 루아나와 같이 어여쁜 아이였다.
루아나는 참으로 특이했다. 여자가 남자 같은 것은 드세고 천박하다고 불리는 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검을 휘두르는 딸을 원했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모두의 보호를 받는 레이디로 있을 수 있는 게 얼마나 귀한 특권인지 루아나는 모른다.
젤다는 루아나의 순수한 무지가 싫었다.
“내 남편도 우리 아빠처럼 나랑 내 딸을 사랑해 줄 거야.”
루아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행복이 당연하게 약속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본 젤다는 우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루아나가 소리쳤다.
“그래, 그게 좋겠다!”
“뭐가요?”
“아스트라의 가호를 받기 위해서 아이의 이름을 별로 짓는 거야!”
“별이요?”
“그래, 아스트라는 별의 여신이니까 아이들의 이름을 별로 지으면 더 잘 봐줄 거야. 이름이 별이라니, 분명 반짝거리는 삶을 살 거라고.”
별의 여신의 이름이라.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런 걸 짓는다고 인생이 반짝반짝 빛날까?
그녀가 깨달은 것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반짝거리는 인생이 허용된다는 것이었다. 루아나처럼.
“젤다도 같이 짓는 거지?”
“네?”
“우린 자매 같으니까, 딸을 낳으면 꼭 ‘별’에서 이름을 따서 짓자.”
젤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젤다가 자신의 말에 동의하자 루아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그럼 이름을 생각해 보자! 뭐가 좋을까?”
사실 젤다는 마땅한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녀는 일개 하녀였고, 루아나처럼 지식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국 루아나가 이름을 짓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텔라? 타라? 이슈타르? 이슈타르는 너무나 대단한 이름인 것 같고, 아리스타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
“아, 에스텔! 에스텔이 좋은 것 같아. 여자아이 이름 같지 않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에스텔. 정말 좋은 이름이네요.”
에스텔. 어쩐지 루아나가 좋아하는 이름이라고 하니까 아주 대단한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별에서 따온 반짝거리는 이름. 그녀는 어쩐지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어서 계속 되뇌었다.
***
“아버지를 잘 부탁드려, 젤다.”
“꼭 가셔야 하나요?”
젤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루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에서 받은 돈으로 다 함께 살아야지. 어쩌면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만한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더욱 좋고.”
루아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젤다는 남편감으로 돈이 필수적이지 않다고 말하던 어린 루아나를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이것은 현실이었다.
남작부인이 병으로 죽자, 상심한 남작 역시 병으로 앓아누웠다.
또한 잇달아 벌어진 흉작에도 나라는 똑같은 세금을 걷어갔고, 곳간이 텅 빈 영지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즉, 바네사 남작가는 몰락하기 직전이었다.
사용인들은 모두 떠났고, 알토와 쟈넷, 젤다만이 남아 저택을 지켰다.
루아나의 예쁜 드레스는 어느새 낡았으며, 식사는 평민들이 먹는 식사로 변했다. 그러나 루아나는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결국, 루아나가 선택한 건 왕궁행이었다. 왕궁의 급료는 꽤나 높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얀스가르에서 온 이소타 공주는 자신을 모실 시녀들을 필요로 했고, 루아나는 아름다운 외모 덕분인지 시녀로 지원하자마자 바로 낙점되었다.
그녀는 왕비를 모시게 될 것이다. 젤다처럼.
젤다는 그런 루아나에게 연민과 더불어, 꼴좋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고고한 귀족이던 아가씨가 자신처럼 왕비를 모시러 간다. 자신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아가씨, 걱정 마세요. 주인님은 제가 잘 모실게요.”
“고마워. 알고 있니? 너는 내 자매와도 같아.”
루아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젤다도 그녀를 끌어안았다.
젤다는 루아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선한 사람임을 알고, 그녀를 사랑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젤다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지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루아나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그녀를 순수하게 좋아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상 이제 그녀 역시도 자신이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녀 주제에, 그녀는 루아나가 가진 모든 것을 질투하고 있었다.
빛을 뿌리는 그녀의 밝고 상냥한 성격, 아름다움, 고귀한 신분, 그리고 모든 이에게 받는 무한한 애정. 그 모든 것을.
그런 자신이 과연 그녀를 ‘친자매’처럼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도 그래요, 아가씨.”
그러나 언제나 거짓말은 매끄럽게 나왔다. 그녀는 헤어지는 이 순간까지도 자신의 비틀림에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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