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Epilogue
2018.09.20.
“아이딘 백작이십니까?”
루시펠라는 눈을 껌뻑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얼굴에 홍조를 띠고 루시펠라를 바라보는 사람의 두 눈은 분명 ‘초롱초롱’했다.
초롱초롱.
그래, 눈빛이 반짝거리는 건 좋다. 그런데 왜 그녀를 보고 눈이 그렇게 되느냔 말이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아, 저는 카라얀의 탄달 백작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루시펠라가 마주 손을 잡았다.
카라얀에서 사자가 온다더니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역시. 손을 잡는 데 주저함이 없으시군요.”
“네?”
루시펠라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레이디들은 아무래도 이런 접촉에 민감하잖습니까.”
“탄달 백작, 저도 레이디입니다만.”
루시펠라가 웃으며 말하자 탄달 백작이 머쓱해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과연 백작위를 인정받으신 분답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악수를 하시는 게 아무래도 다른 전형적인 레이디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뜻으로…….”
이 인간, 뭐지?
루시펠라는 짜증 섞인 한숨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켰다.
“아, 한데 지금 레이디라면 아직 결혼은 안 하신 겁니까? 분명 하인트 공작과 함께…….”
“곧 할 예정입니다.”
루시펠라는 표정 관리가 더더욱 힘들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짜증이 나 있는데, 지금 처음 보는 이 남자까지 저런다. 방금도 이오지프와 한판하고 오는 길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루시펠라의 성이 바뀌어야 하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땅은 모두 하인트 공작가의 소유가 된다. 그 부분 때문에 그들은 쉽사리 결혼하지 못했다.
이오지프를 믿고 그 결혼을 기꺼이 미뤘건만, 그 법에 대한 개정은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그놈의 결혼, 결혼은 언제 한단 말인가!
“그렇습니까. 야∼ 공작도 정말 대단한 분을 얻게 되어 참 좋으시겠습니다.”
“…….”
“백작의 위명(偉名)은 카라얀에서도 들리고 있습니다. 레이디가 작위 승계를 위해서 혼자 싸우다니, 우리나라의 레이디들도 백작님을 선망하고 있지요.”
아니, 이 사람, 대체 언제까지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지? 이젠 대놓고 표정을 굳히는데 자꾸 눈치 없이 말하고 있다.
“저도 어린 나이에 백작위를 물려받아 잘 알고 있습니다. 군대를 움직이고 전투를 한다는 건 상당히 힘들지요. 레이디들도 그저 선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싸워 쟁취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무서운 건 더 안 하려 드니. 쯧, 한심할 따름입니다.”
“…….”
“하여튼 지켜지기만 하는 인간들이 뭘 알까요.”
루시펠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남자들은 작위를 그냥 승계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목까지 내걸어야 했지요. 애초에 작위를 받기 위해 그렇게 싸워야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네, 네?”
“싸움을 멀리하라고 교육받고 자란 레이디들이 전쟁과 전투에 소극적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제가 특이한 경우고, 그 사람들이 무서운 걸 안 하려 드는 게 아니라요.”
“어, 기분이 나쁘셨습니까? 저는 백작의 위명을 이야기하고자…….”
“레이디를 지키는 게 아니꼬우면 그럼 황제께 이의를 제기하십시오. 레이디를 지키는 기사도가 잘못되었다고. 애먼 레이디들을 한심하다 하지 마시고.”
“배, 백작, 대체 왜 화를…….”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루시펠라가 말했다.
“아, 그리고 그 사람이 저를 얻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얻어지는 보상품이 아니랍니다.”
진짜 괜히 열려 있는 척, 인정하는 척하고 있어.
그녀는 얼떨떨해하는 백작에게서 등을 돌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배, 백작!”
그가 쫓아오려 하자 루시펠라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 탄달 백작이 멍하게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루시펠라가 왜 날카롭게 대답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백작이 되면서 저런 사람은 엄청 많이 봤다. 루시펠라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온갖 욕을 투덜거리면서 걸어갈 때, 루시펠라는 어느 순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제드를 보았다.
“뭐야, 다 보고 있었어?”
“그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또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보고도 왜? 아니, 왜 그런지 알겠다.”
루시펠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서 제드가 나타난다면 꼭 구해지는 것 같지 않은가. 제드는 루시펠라를 도와주는 것에 신중해졌다.
작위를 승계받은 이후 루시펠라에 대한 잣대는 더욱 가혹해졌다.
그녀가 미흡한 행동을 하면 여자라서 그렇다. 완벽하게 하면 제드나 이오지프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다는 등, 엄연히 그녀가 스스로를 증명했음에도 그러했다.
그녀로선 에스텔이었을 때 숱하게 당했던 일이라 괜찮았지만, 제드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루시펠라보다 더욱 주변을 신경 쓰며 자신의 행동을 점검했다.
자신의 도움이 행여나 루시펠라에게 다른 의미가 되지 않는지. 사람들이 비난할 거리가 되지는 않는지.
남자가 레이디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남자가 남자의 영역을 넘보는 여자를 도와주는 것은, 여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얼샤에 갈 준비는 다 되었어?”
“응. 한데 이런 걸 왜 나를 시키는 건지.”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나도 같이 가고 말이야.”
“왜 이렇게 신이 나 있어?”
루시펠라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제드를 바라보니, 제드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서로 마음을 확인한 곳이잖아.”
“아.”
“그리고…….”
제드가 허리를 숙이더니 루시펠라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고 보니 그렇네.”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라니. 꼭 나만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내가 같이 가는 게 싫은가? 아니면 우리의 추억이 별로라는 건가?”
이상하게도 제드는 루시펠라보다 더 섬세했다.
오래 관계를 맺고 나니 그게 잘 보였다. 그녀는 혹시라도 제드의 기분이 상할까 봐 솔직하게 말했다.
“아니, 아니야. 그냥, 맡은 임무가 막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야. ‘소왕(小王)’ 선출이라니, 부담스러운 게 당연하잖아.”
칼리드 루이르크가 사망함으로써 얀스가르의 왕족은 실질적으로 모두 죽었다.
나라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오지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투표를 통한 소왕 선출이었다. 투표권을 가진 얼샤의 귀족들이 다섯 공작 중 한 명을 선택하여 투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루시펠라는 이오지프 대신 그 소왕 선출의 입회자 자격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내 어머니가 얼샤 출신이라는 게 그 이유라니, 진짜.”
“네게 힘을 실어주려는 거겠지.”
제드의 말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루시펠라의 권한에 대해 의혹의 시선을 던지는 이는 많았다. 그렇기에 이오지프는 루시펠라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소왕 선출의 입회자 자격을 주는 것이었다. 황제를 대리한 이의 자격을 대놓고 의심할 수는 없으니까.
각오는 했지만, 정치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웠는데, 특히나 그녀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얼샤에 가게 된다면 적어도 수도와 멀어지니 머리가 복잡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의 말을 들으니 생각보다 좋은 것 같네.”
치열하게 살고 있던 현재를 벗어나 얼샤로 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며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저 사람도 함께이고 말이다.
루시펠라가 제드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얼샤를 방문한 루시펠라는 예전 제드가 그랬던 것처럼 다섯 개의 공작령을 돌아보기로 했다.
투표일까지의 시간은 넉넉했고, 그녀 스스로 다섯 공작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라흐시 공작을 시작으로 나머지 공작들의 도시를 방문하며 얼샤를 돌아보았다.
그의 손을 잡고 다시 돌아보는 그곳은 새롭고도 여전했다.
얼샤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예전 방문했을 때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전쟁의 흔적 따윈 말끔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루시펠라는 이제 낯설어진 얼샤를 돌아보며 제드에게 말했다.
“좋아 보인다, 그렇지?”
“그래.”
제드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것이 루시펠라의 마음을 신경 써주는 것 같아 루시펠라는 미소 지었다.
이 나라가 독립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방문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 얼샤를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그녀가 도시의 시장을 돌고 있을 때였다.
“어?”
그녀의 두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설마, 아니겠지. 그녀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아니야, 아무것도.”
제드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머물다가 금세 떨어졌다.
“제드, 이 사과 맛있는데 살까?”
“그래. 마차 여행할 때 먹기로 딱 좋겠군.”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잠시 동안 떠오른 과거의 흔적 따윈 금세 사라져 버렸다.
***
“아네트는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재수가 없는 날이 틀림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그는 아침부터 노름에 돈을 모두 잃었다.
한참을 씩씩거리다 밥이라도 먹을 요량으로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었다. 딸년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아비의 밥도 차려놓지 않고 농땡이를 피운 것이다.
딸년을 찾으니, 그녀는 사내자식처럼 막대기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분노했고, 딸을 친히 훈육했다.
그러나 고분고분할 줄 알았던 딸은 악다구니를 쓰며 처음으로 반항이라는 걸 하더니, 집을 나가 버렸다.
돌아오면 가만두지 않을 거라며 한참을 씩씩대고 있자, 이번에는 집에 웬 청년이 방문하며 딸, 아네트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청년은 좀, 아니, 꽤나 곱상한 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오뚝한 코, 푸른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
멍청한 여자들이 환장할 만한 생김새였다.
“댁이 아네트한테 검술인지 뭔지를 알려준 사람이오?”
“그렇습니다.”
“계집애한테 그런 쓸데없는 걸 가르치는 이유가 뭐요!?”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나, 아쉽게도 장신의 청년에게는 전혀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자는 청년이 검을 다룰 줄 알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멈추며 투덜거렸다.
“계집애 따윈 남자 수발이나 잘 들어주면 되는 걸 괜히 헛바람을 넣어서 말이야.”
“헛바람이라니요?”
“이 못된 계집년이 그런 거나 배워서 애비한테 대들지 않소! 내가 내 딸을 꼭 훈육해야겠소?!”
“훈육이라면, 때렸다는 말씀이십니까?”
청년의 음성의 높이가 달라지자 순식간에 청년을 감싸던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그러나 남자는 되려 더 크게 소리쳤다.
“왜, 내가 내 딸을 교육시키는데 뭐가 어때서!”
청년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만으로도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겁에 질려 말했다.
“나, 날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오?”
남자가 일부러 소리치자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굳이 왜, 손을 더럽히겠습니까?”
청년은 더 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집 밖으로 나갔다.
청년이 집 밖으로 나가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밖으로 나간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친 몸으로 어딜 간 걸까. 설마 손을 다친 건 아니겠지? 검에 특출난 재능이 있어 보였던 소녀였다. 그런 재능은 흔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초조해져서 도시를 구석구석 찾아 헤맸다. 대낮이지만 세상은 어린 여자에게 너무나 잔인한 곳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아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일행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망설였다.
“칼 아저씨!”
그때,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에게 뛰어왔다.
“저 찾아다니셨다면서요?”
“그래. 너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걸 들어서 말이야.”
“아, 맞다! 아빠한테 맞았네! 하지만 괜찮아요!”
칼은 소녀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아버지에게 맞았을 터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지? 그러고 보니 눈이 이상하게도 빛이 나 보였다. 그것은 마치……
“저한테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아세요?”
“무슨 일?”
“제가, 이슈타르를 보았어요!”
“이슈타르?”
칼의 두 눈이 커졌다.
“네, 이슈타르! 제가 도망치다, 사실 영주님의 기사들과 부딪쳐서 크게 혼이 날 뻔했는데 이슈타르가 절 구해줬지 뭐예요! 기사들한테 호통도 쳐주셨어요.”
“……그래?”
“아빠는 언제나 여자는 남자 아래라고 했는데, 다 거짓말이지 뭐예요. 그 기사들이 이슈타르 앞에서 깍듯하더라고요! 심지어 시장님도 그 사람에게 벌벌 기었다니까요! 상상이 가요? 우리 아빠가 보면 눈이 튀어나왔을 거야!”
그녀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왜 그 사람을 이슈타르라고 부르는 거지?”
“그야 그 귀족님보고 얀스가르의 이슈타르라고 하는 걸 들었으니까요.”
얀스가르의 이슈타르.
청년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겨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슈타르는 네게 어떻게 했니?”
“절 치료하라고 하신 뒤에 바로 떠나셨어요. 대화를 많이 나누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
“아저씨?”
한참 동안 청년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소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정신이 화들짝 든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이슈타르, 나도 보고 싶구나. 어디 있니?”
“시장에 가신다고 했어요.”
“그래?”
“제가 데려다줄게요!”
소녀가 칼의 손을 이끌었다.
그 이슈타르가 있는 곳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은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얼굴, 그 얼굴을 어떻게 잊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이전 생, 삶의 전부였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미칠 듯 사랑했고, 사랑하는 이였다.
그러나 다신 볼 일이 없을 이였고.
왜 그녀가 여기 있을까,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동료들이 지나가듯 소왕 선출로 인해서 얀스가르의 사자가 방문할 거라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사자가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기사들을 대동한 채 거리를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관심 따윈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짧았던 머리는 어느새 길어서 한쪽으로 묶어 내렸으며, 그녀는 화려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내디디려 하다가 멈추었다.
이제 와서 만나서 무엇을 하자고? 얼굴을 봤으니 대화라도 하자는 건가?
스스로 물었지만 정확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그는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멍하게 서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하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는 그 안에 있는 병증과도 같은 갈망을 주체할 수 없으리라.
그녀의 의사에 상관없이 그녀를 붙잡아 가두고, 마음껏 취하고 삼킬지도 모르지. 이슈타르를 탐닉하고 싶어 전쟁을 일으켰던 아레스처럼.
그때, 그녀가 따르던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그들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어딘가로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이가 바로 보였다. 너무나 익숙한 이, 제더카이어 하인트였다.
그가 무어라고 말하자 그녀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아저씨, 저도 저렇게 되고 싶어요.”
그 말에 칼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루시펠라 아이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요?”
소녀의 물음에 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넌 꼭 그렇게 될 거야.”
칼은 확신을 담아서 이야기했다.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소녀처럼 다른 여자아이들도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한 동경이 서린 표정. 그 표정을 홀린 듯 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길잡이가 되었고, 그녀가 치열하게 살아온 삶은 누군가가 꿈을 꾸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이제 죽음으로 향한 비뚤어진 갈망을 지닌 이들은 없고,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 기적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녀는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에스텔 슈페르트가 얼샤의 이슈타르였듯, 루시펠라 아이딘 역시 얀스가르의 샛별에서 얀스가르의 이슈타르가 되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꿈을 꾸게 하는 이로써.
그러나 이제 그녀는 마냥 살아 있는 우상이 되어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옆에 있는 존재가 있으니까.
그때, 루시펠라가 그들이 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약 이대로 서 있는다면 그는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돌아가자, 아네트.”
칼이 자신의 손을 잡은 소녀에게 속삭였다.
“벌써요?”
“응, 얼굴을 보았으니 됐단다.”
저 사람은 얀스가르의 이슈타르. 떠돌이 검사인 칼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사람이다.
루시펠라 아이딘은 행복해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원하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칼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렇게,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된 이들의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結>
#d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