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들이 살아가는 법
2018.09.17.
1황자에 대한 조사는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황제 시해와 더불어 아이딘 백작 살해 사건, 루시펠라 아이딘 납치, 암살 사주 등 그가 암암리에 저질러 왔던 악행이 모두 밝혀지자 모든 이가 경악했다.
그 누구도 테미르를 변호하지 않았다. 또한 그가 처형당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1황자의 여죄에 대한 조사와 처분이 결정 내려짐과 동시에 이오지프의 즉위일이 결정되었다.
신왕이 드디어 즉위한다.
뒤숭숭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은 준비에 열을 올렸고, 그 덕에 그린힐은 축제 분위기였다.
즉위식 당일.
거리의 문 앞에는 모두 꽃이 장식되었고, 수도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은 더없이 맑았으며,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좋았다.
모두 가벼운 옷차림으로 대로에 나와 신전으로 향하는 황제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지붕 없는 마차에서 이오지프는 왕관을 쓴 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젊은 황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금발은 햇빛과 같이 찬란하게 빛이 났으며, 가까이서 보는 그의 얼굴은 준수했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아직 신전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게 아니건만, 사람들은 모두 이오지프를 바라보며 ‘황제’라고 했다. 황제의 유언과 국민과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가 이곳에서 드러났다.
그 옆을 지키는 이는 제더카이어 하인트를 위시한 1기사단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검은 정복을 입은 채 이오지프를 지키고 있었다.
“제드.”
이오지프가 속삭였다. 그에 제드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오지프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제드의 머릿속에 온갖 상상이 다 떠오를 때였다.
“나, 떨려.”
“…….”
“으흑, 나는 너무도 연약해서 곧 쓰러질지도 몰라. 대관식 때 내가 쓰러지면 알아서 수습해 줘.”
제드가 곁눈질로 그를 보자,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오늘마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제드는 문득 즉위식을 하러 가는 황제를, 그것도 이곳에서 치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그 왕관으로 맞기 싫으면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제드가 입을 꾹 다문 채 복화술로 그에게 대답했다. 겉보기에 이 둘은 엄격하고 근엄한 군신 관계로 보였으나 주고받는 말은 이렇게나 하찮기 그지없었다.
***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와 함께 연설대에 오른 이오지프를 바라보았다.
광장의 맨 앞은 귀족이 모여 있었고, 그 뒤는 국민이 바글바글했다.
금색 왕관을 쓴 이오지프는 마치 태양의 현신인 것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옆에 서 있는 클로렌스가 말했다.
“참 빛나네요, 저 사람.”
“어라, 나도 같은 걸 생각했어. 인정하기 싫지만 전하, 아니, 폐하, 좀 근사해 보인다.”
“맞아요. 근사하지요.”
클로렌스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를 보았다. 루시펠라는 클로렌스의 두 눈에서 그를 향한 애정을 느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되기까지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예요. 많은 것을 감내했을 거고 앞으로도 많은 것을 감내해야겠죠.”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클로렌스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폐하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제 곧 테미르의 처형일이죠.”
“…….”
“괜찮은 척하지만 분명 괜찮지 않을 거예요.”
“그래, 괜찮지 않겠지. 당연해.”
“그러니까, 저는 곁에서 같이 노력할 거예요.”
“응?”
“저 사람이 자신의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게 든든한 사람이 되어줄 거예요. 저 사람 옆에서, 저 사람이 지켜야 할 사람이 아닌 의지할 만한 사람이 되고 말겠어요.”
루시펠라는 클로렌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루시펠라는 빙그레 웃었다. 누가 레이디를 연약하다고 했던가. 이것이 클로렌스가 사는 방식이었다. 부드럽다고 강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새삼 그 진리를 되새기고 있을 때 클로렌스가 그녀에게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루시.”
“갑자기 왜?”
“루시가 아니었다면 저는 아마 제 운명에 순응하고 살았을 거예요. 분명 그 미래는 불행했겠지요.”
“…….”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말, 가문보다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이 나를 살렸어요.”
그 말에 루시펠라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클로렌스가 그 표정에 대해 물어보려는 찰나 이오지프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 이오지프 드나하 바히르는 오늘, 이 나라 얀스가르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이오지프는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여 짐은 이 자리에서 아스트라가 계신 하늘과 그대들이 살아 숨 쉬는 이 땅에 고한다!”
선황 바이두가 가진 카리스마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이오지프는 젊은이 특유의 패기와 위엄이 존재했다.
그의 손짓과 눈빛은 열정적이었고, 사람들은 태양을 닮은 찬란한 금발을 가진 젊은 황제에게 곧 매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정벌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지키는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이제 정복전쟁은 끝났다는 말이었다.
루시펠라는 무인들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짐은 선황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라가 뒤숭숭한 지금은 지키는 법을 배워갈 때! 창과 검 대신 꽃과 노래가 넘쳐 나는 나라. 나는 그런 나라를 만들 것이다.”
창과 검이 넘쳐 나는 나라가 아닌 꽃과 노래가 넘쳐 나는 나라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루시펠라는 이오지프를 바라보며 상상했다.
예전에 에스텔이 지키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이오지프가 말한 것은 코웃음 칠 만큼 유치했으나 모두가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인재들을 뽑는 데에 고려할 것은 최소한으로 줄일 것이다. 많은 인재가 적재적소에서 그 역량을 뽐낼 것이다.”
루시펠라는 어째서인지 이오지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한계를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는 나라.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는 나라. 이것이 짐이 만들어갈 나라다!”
그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귀족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이오지프가 한 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이오지프가 말하는 것은 명확했다. 이오지프는 인재를 뽑는 것에 차별을 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려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루시펠라는 그것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귀족들의 반발이 거셀 거예요, 그러니 이 변화는 차츰차츰 이뤄지겠지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하다고 해서 나아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세상은 급작한 변화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대개 점진적으로 변하니까.
그녀는 이오지프를,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저 사람을 모시게 되었지만 이 선택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그러다 루시펠라는 그 옆에 서 있는 제드를 바라보았다.
“……윽!”
“왜요?”
클로렌스가 물음에 루시펠라는 고개를 저었다.
제드가 굳은 표정으로 루시펠라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알 수 있다. 저건 질투심이 흘러넘쳐 강이 되었을 때의 표정이다.
“작정하고 투정 부리면 받아주기 힘든데.”
“네?”
“아, 아니야, 아무것도.”
벌써부터 몸이 피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간 두 사람 모두 이오지프의 대관식 준비를 하며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제드의 기분은 누가 봐도 상당히 저조했었다.
아무래도 오늘 대관식 끝난 후 제드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미안하군. 그래도 대관식이 끝나고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어.”
“폐하께서는 왜 항상 잘 아시면서도 이러시는지 궁금하군요.”
루시펠라가 뚱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현실이었고, 그녀는 비로드 위에 서 있는 이오지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즉위식이 끝나고 제드와 함께할 계획을 방해받았기에 도저히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보통 즉위식을 끝내면 가족과 있어야 하지 않나? 한데 제일 먼저 찾는 게 자신이라니……. 이러니 클로렌스가 오해하는 것이다. 게다가 제드도…….
루시펠라는 자신이 호출당했을 때 제드의 표정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젠 웃음으로 때울 수도 없었다. 제드는 자기 안에 있는 질투심을 온몸으로 표현할 것이다.
“응? 갑자기 왜 말투가 공손해졌지? 나, 아니, 짐에게 말을 편하게 한 걸로 기억하는데? 게다가 말투는 공손한데 내용은 그다지 공손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내 착각인가?”
“이제는 전하가 아니라 황제지 않습니까.”
“전하랑 황제랑 뭐가 다른가?”
“좀 다릅니다.”
그녀의 표정을 본 이오지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말 좀 편하게 하지? 이제 전하에서 폐하가 된 거 빼고는 딱히 달라진 것도 없잖아,”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는데 제 목숨을 이제부터 소중히 여기려고요.”
“하하! 내가 아이딘 백작의 목숨을 위협하면 하인트 공작이 내 목을 잘라 버릴걸!”
이오지프의 말은 농담치곤 살벌했으나 농담을 하는 쪽도 듣는 쪽도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까 부디 평소대로 해줘. 제드한테도 똑같이 말했으니까. 부부, 아니, 부부는 아니지만 한 쌍의 연인은 평등한 법이니까.”
“폐하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하면 또 말이 길어질 게 뻔했으니 루시펠라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걸 본 이오지프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루시펠라가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이오지프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비어 있는 황좌였다.
이오지프가 그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선황께서는 나보고 이겼다고 했지.”
“…….”
“그런데 딱히 이긴 것 같지는 않군. 난 선황에게 패했어.”
“……그게 무슨 소린데?”
루시펠라의 물음에 이오지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내 싸움에서 진 것 같지 않아서 만족 중이야. 그러나 만족에 취하기 전 마땅히 감사를 해야지.”
그 말과 함께 다시 자세를 바로 한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일으켜 세우곤 허리를 숙였다.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지.”
루시펠라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황족이나 왕족은 함부로 허리를 숙이지 않는 법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사를 받았기에 그녀는 당황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 생각해 보니 결정적일 때는 언제나 영애의 도움이 있었더군.”
그게 무슨 말이지? 루시펠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오지프를 바라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클로렌스가 형님에게 저항하고 나를 선택한 것도, 하인트 공작이 나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이드리스 공작을 없앴던 것도 말이야.”
“…….”
“그대는 언제나 누군가를 바꿔왔지. 그것은 그대가 그만큼 전력으로, 찬란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야.”
이오지프의 말을 들은 루시펠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누군가를 바꿔왔다고? 굉장히 고마운 말인데 그거 무서운 말이기도 하네.”
“…….”
이오지프가 루시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오지프의 의아한 시선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이오지프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펼치며 말했다.
“루시펠라 아이딘, 이오지프 드나하 바히르가 그대에게 고한다.”
자, 잠깐! 갑자기 칙령을 내리는 게 어디 있어!
그녀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이오지프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대는 오늘부로 아이딘 백작가의 정당한 작위 계승자임을 인정한다. 이로써 아이딘 가의 모든 권한은 그대의 것이니, 이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짐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오지프가 그녀에게 양피지를 내밀었다. 루시펠라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그대는 나라의 한 부분을 짊어진 귀족으로 그 의무를 게을리하지 말라.”
“명심하겠습니다.”
루시펠라는 이제 완벽한 아이딘 백작이 되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이오지프는 그녀를 불렀던 것이다.
온전한 노력으로 움켜쥔 자신의 자리. 그녀는 그 종이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
“대체 그대를 왜 불렀던 거지?”
“깜짝이야!”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불쑥 나타난 제드를 보고 루시펠라는 깜짝 놀랐다. 제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황제가 되었다고 남의 연인을 마구잡이로 부르다니 말이야.”
“아니야. 이거 봐.”
루시펠라가 칙령이 적힌 종이를 흔들었다.
“나 이제부터 진짜 아이딘 백작이 되었어.”
그것에 제드는 뚱한 표정을 풀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축하해야지.”
제드의 축하에 루시펠라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저택에 들어갈까 망설이던 그녀는 조금 더 이 순간을 누리고 싶었다.
“조금만 같이 걸을래?”
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은 벌써 저녁노을이 지며 밤이 다가옴을 알리고 있었고, 선선한 저녁 바람이 살랑살랑 머리를 간질였다. 산책하기 참으로 좋은 날씨였다.
그도 그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의 온기를 느낄 뿐.
말없이 산책하던 중 벤치가 보이자 루시펠라와 제드는 그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제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드 역시 루시펠라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행복을 음미하다 보니 해는 어느새 저물었고, 샛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침묵을 깬 루시펠라가 입을 열었다.
“제드.”
“응?”
“제드는 날 만나서 바뀌었다고 했지?”
“그래.”
“그래서 혹 후회한 적은 없었어?”
“많지.”
제드의 단답에 루시펠라가 그의 어깨에 기댔던 머리를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일단, 에스텔 슈페르트가 날 바꾼 걸 후회하지 않아. 하지만 루시펠라 아이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몇 번이고 내 속을 타들어가게 해서 몇 번이고 후회했지.”
마음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로구나. 루시펠라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눈을 굴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바뀌지 않은 것보다 바뀌어서 나쁘진 않은 것 같아. 미칠 듯한 분노와 기쁨도, 행복도 불행도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그렇구나.”
그렇다면 그 녀석들도 그랬던 걸까. 루시펠라는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설핏 떠오른 씁쓸함을 눈치챈 제드가 물었다.
“왜?”
“클로렌스와 폐하가 말했어. 나 때문에 변했다고.”
“그래서?”
“내가 남들을 변화시켰다는데, 이게 느낌이 이상해.”
“왜?”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도, 칼리드도 나 때문에 변화했다고 했거든.”
칼리드, 라는 말을 들은 제드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루시펠라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있어. 나는 주변을 보지 못했고, 앞만 보고 달려갔으니까.”
시토라 기사단 녀석들도, 칼리드도 에스텔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절망적이고 냉소적이던 그들이 기사도를 외치며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 그러나 이들은 결과적으로 얼샤의 멸망에 일조했다.
“조금이라도 주위를 둘러봤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야.”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스스로 반성할 줄 아는 모습이 참 아름답군.”
“이 와중에 아름답다니, 나랑 장난하자는 거지?”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연인은 걱정도 참 많지. 실수를 통해서 적어도 무엇을 고치면 되는지 배웠잖아.”
“그거야 그렇지.”
“멋대로 변화의 계기로 삼아놓고 멋대로 탓하는 놈들이 나쁜 거지, 거기까지 대체 왜 신경을 써.”
왠지 루시펠라는 제드가 자신의 고민을 하찮게 여기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때, 제드가 말을 이었다.
“에스텔 슈페르트가 안에 남아 있기에 클로렌스도 이오지프도 나도 변한 거야. 그녀가 불완전했다고 마냥 나쁜 영향을 미친 건 아니잖아. 그러니 거기까진 신경 쓰지 마.”
완벽하지 않았던 에스텔 슈페르트가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분명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다.
에스텔의 삶의 방식이 올곧은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부분을 발견하고 변화했다고 한다. 거기서 이상한 씁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제드는 그것은 영향받은 이들의 영역이라며 칼같이 잘라냈다. 루시펠라는 그 서늘함에 위안을 받는 느낌이었다.
“내 고민이 너무 바보 같나? 누군가 나한테 영향을 받는다는 걸 걱정하는 게 잘난 척하는 것 같아?”
문득 자신의 고민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고민인지 생각하자 제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텔이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지. 그런 고민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지. 그대가 어리석게 행동하면 바보 같다고 말해줄게.”
마지막 말에 루시펠라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말에서 어쩐지 루시펠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칼리드는 언제나 에스텔이 옳다고 했다. 그러나 제드는 루시펠라가 언제나 옳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녀가 설령 옆을 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가더라도, 그가 제어해 줄 거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 말인지 제드는 모를 것이다.
루시펠라는 새삼 옆에 있는 이 남자가 좋아졌다. 원래부터 좋아했지만, 지금 더 좋아졌다. 아마 계속 그렇게 되겠지.
“함께한다는 거 진짜로 근사하구나.”
루시펠라의 말에 제드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마치 그걸 이제 알았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자신의 손을 잡은 제드의 손의 감촉을 느꼈다.
든든한 느낌에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제드.”
“응?”
“얼른 결혼하자.”
루시펠라의 프러포즈에 제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제드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눈을 마주치며 벅찬 감동을 느꼈다.
“저 하늘의 별이 모두 다 사라질 때까지 내 목숨을 걸고, 죽어서도 당신과 함께할게.”
그 말을 들은 제드가 눈을 크게 뜨며 잔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에 루시펠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남은 진지한데, 지금!
“미안,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지금 하는 게 꼭 기사의 맹세 같군.”
루시펠라의 두 뺨이 붉어졌다. 남이 기껏 고백하는데! 진짜!
루시펠라가 자리에 일어나려 할 때, 제드가 그녀의 손을 잡더니 속삭였다.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 없이 네게 빠져 있나 보군. 좀 멋있었거든.”
그 말을 들은 루시펠라가 볼멘소리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을 때, 돌연 루시펠라의 입술에 제드의 입술이 닿았다.
서로를 탐색하듯 스치기만 하던 입술이 벌어지고, 그들의 입맞춤은 좀 더 진하고 애타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 관계가 영원할 수 없음을 루시펠라는 잘 알고 있다.
에스텔이었을 때 그녀는 시토라 기사단과 칼리드와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칼리드에게 최악의 배신을 당했고, 그와 영원히 헤어져야만 했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영원히 함께하자고 맹세하며, 사랑을 속삭이며 결혼한다.
루시펠라는 그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얼마나 단단하느냐였다.
루시펠라는 제드와 함께하는 이상 끝까지 이 마음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답은 안 해줄 거야?”
루시펠라가 재촉하자 제드가 말했다.
“기꺼이, 내 평생을 함께하도록 하지.”
그에 루시펠라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렇게 그녀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달리 빛나는 별이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한때는 자신의 별명이었던 ‘이슈타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삼 자신이 살아왔던 생애를 되돌아보았다.
기사 에스텔로서 비참하고 절망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꽤나 찬란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그녀는 얀스가르의 레이디 루시펠라 아이딘으로, 치열한 현재를 살고 있었다.
그녀는 얀스가르의 샛별에서 얀스가르의 이슈타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녀는 기사로 살아왔고 또 레이디로 살아가는 법을 익혔다.
그러나 삶의 방식이 기사와 레이디, 그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이 아니기에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습득하기 마련이었다.
기사로 사는 법도, 레이디로 사는 법도 아닌 새로운 방식.
그렇게 배우고 성장하며, 또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반성하고 후회하며, 그녀는 또다시 삶을 전력으로 살아갈 것이다.
바로 자신의 옆에 있는 이 사람, 제드와 함께.
그러니 그 길은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온몸을 감싸는 행복을 느끼며 루시펠라가 그에게 속삭였다.
“사랑해, 제드.”
두 번째 입맞춤이 시작되기까지의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시 열정적으로,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그녀는 더 이상 별이 되고 싶다고 소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죽기 위해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눈부신 목표가 없더라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리라, 루시펠라는 맹세했다.
그들이 만들어갈 이야기를 지켜보기라도 하려는 듯, 하늘의 별은 하늘에 가득 떠 있었다.
밤하늘 아래, 연인들은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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