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안녕, 에스텔
2018.09.13.
루시펠라는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무나 서글프고 애달픈 꿈을 꾸었다.
“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칼리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손을 잡아왔다.
“나 여기 있어.”
다정한 음성.
루시펠라는 고개를 돌려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야가 흐릿해 칼리드의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칼리드다! 칼리드가 여기 있다.
루시펠라는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 웅얼거리듯 말했다.
“왜 다시 여기 왔어?”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 대답에 루시펠라가 피식 웃더니,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꿈을 꿨어.”
“무슨 꿈?”
“그 아스트라라는 사람이 투덜거리는 꿈.”
그녀가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가 깨어난 것도, 여기 있을 리가 없던 칼리드가 이곳에서, 자신의 옆에 있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지금 꾸었던 이 꿈을 잊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거기서 너를 봤어. 네가 내 시체를 안고 우는 장면을 말이야.”
“…….”
“아스트라가 네 소원을 정말로 들어주었어. 나는 이곳에서, 레이디가 되어서 너를 다시 만났으니까.”
“……아스트라께서?”
“그 빌어먹을 목걸이. 그것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진 거래. 얼샤와 얀스가르의 건국왕들은 정말 땅에 내려온 신의 자식들이었나 봐. 그래서 아스트라는 그 자식들에게 소원을 이룰 목걸이를 주었고, 그렇게…….”
루시펠라는 자신이 말하고서도 칼리드가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웃기지 않아? 그럼 왜 그간 다른 소원은 이뤄주지 않았냐고 따지니까, 자기에게 와 닿지 않아서래.”
“와 닿지 않았다고?”
“네 소원만 그녀에게 와 닿았던 거지.”
“왜 내 소원만 닿은 건데?”
“네 슬픔과 비극과 통곡이 아스트라의 자식들을 생각나게 했으니까. 아레스가 이슈타르를 사랑했기에 자길 파멸시켰잖아. 네가 아레스와 겹쳐 보였대.”
“……정말, 웃기는군.”
“그렇지?”
칼리드의 말에 루시펠라가 다시 피식 웃었다. 칼리드가 루시펠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되살아난 거야?”
“맞아. 그래서 내가 되살아났어. 내 피를 이어받은 육체에 이렇게.”
“…….”
아스트라는 에스텔을 되살리려고 했다. 그러나 영혼을 담은 그릇은 함부로 선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릇을 찾아다닌 지 3년, 루시펠라 아이딘이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피가 이어지는 육체는 더할 나위 없는 그릇이었다.
그렇게 에스텔은 루시펠라 아이딘으로 다시 깨어났다.
칼리드 루이르크가 빌었던 소원, 레이디가 된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파비아누스가 진짜 왕족이 아니었던 것도, 이소타 왕비가 얼샤를 멸망시키기 위해 자살한 것도 나는 다 알아버렸어.”
“…….”
“아스트라는 모든 걸 알고 있었어. 왜냐면 별은 언제나 하늘에 떠 있으니까. 우리가 보지 못할 뿐이래.”
아스트라가 손짓하자 많은 것이 일시에 루시펠라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신은 말하지 않았다. 그저 보여주고 의사를 전달할 뿐. 그렇기에 이 진실은 너무도 귀중했다.
“칼, 그렇게 꿈을 꾸면서 내 모습도 보았어.”
“…….”
“내가 아기였을 시절부터 너를 만나고 나서 죽기까지의 과정을 전부 다.”
“…….”
“그랬더니 한 가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있더라.”
“어떤 걸 잊어버렸는데?”
“내가 별이 되고 싶다고 했던 이유 말이야.”
“…….”
“너 때문이었어, 칼리드.”
“나 때문이라고?”
“기억나? 내가 검술 수련이 힘들어서 가출하겠다고 짜증 낼 때, 네가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잖아. 용감하게 싸우다 끝내 아스트라의 품에 안긴 전사들의 이야기 말이야.”
“…….”
“너는 그게 멋있다고 했지. 나는 멋있다는 게 뭔지 잘 몰라서 네가 멋있다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어. 그러나 그저 그뿐이었지.”
“그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아니, 그냥 그건 이야기일 뿐이었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지. 칼리드, 너 말이야. 사실 죽는 걸 무서워했었지?”
루시펠라는 칼리드의 맞잡은 손이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적, 네가 악몽을 꾸면서 우는 걸 본 적이 있어. 너는 죽는 게 무섭다고 계속 울었지.”
“…….”
“그래서 그런 너를 위해 무얼 해볼까 생각했더니, 네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어.”
“…….”
“네가 멋있다는 이야기 속의 전사들처럼 싸우다 별이 된다면 죽음은, 후에 우리가 꼭 맞이해야 할 죽음은 최고의 보상이 되겠지. 그러면 죽음은 무섭지 않을 거라고. 어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뿐이었어.”
“…….”
“그때 내가 나라를 지키자고 했지? 당시 어린 내가 나라에 대해 뭘 알겠어. 그냥 네 자존심을 지켜주고 싶었으니 적당히 갖다 붙인 거지.”
“……에스텔.”
“하늘의 별은 혼자가 아니라 항상 모두와 함께 영원히 떠 있을 테니, 별이 되는 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인 거야.”
칼리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루시펠라는 자신의 손등에 따뜻한 액체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시야가 회복되지 않아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랬구나. 너는 그러면 나를 위해서, 나와 영원히 함께하자고…… 그렇게.”
그의 목소리는 목이 메어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말하지 않았고, 루시펠라도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약 기운 때문일까. 맑아지는가 싶던 시야가 다시 뿌옇게 흐려졌다. 루시펠라가 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졸리면 다시 자.”
칼리드의 목소리는 그 옛날처럼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자기 싫어.”
“잠을 자지 않으면 빨리 낫지도 않을 거야. 어서.”
“좀 느리게 나으면 어때. 내가 자면 네가 가버릴 거잖아.”
칼리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도 안 갈게, 그러니까 어서 자.”
“정말?”
“그래, 정말.”
“내가 깨어날 때까지 있을 거지?”
“그래.”
“그러면 됐어.”
루시펠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상처 입은 몸은 아직도 고통이 느껴졌지만, 말하고 싶은 걸 다 말했기 때문일까.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칼리드의 손이 기분 좋게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어서 자, ‘루시펠라.’”
마치 마법과도 같은 그 말에 루시펠라는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도 어째서인지 눈에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
루시펠라가 눈을 떴다. 환한 빛이 눈에 쏟아지자 그녀는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찌푸렸다.
시야가 돌아오자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시!”
클로렌스가 두 손을 모은 채 루시펠라를 보고 있었다.
“클로렌스.”
“아아, 아아! 다행이다! 아스트라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클로렌스는 루시펠라를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클로렌스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누군가를 찾으려는 듯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여기 누가 찾아오지 않았어?”
“당연히! 황후 폐하는 물론 전하도 다녀가시고, 공작 각하도 다녀가셨지요.”
“여긴 어디지?”
“황궁이죠. 황후 폐하께서 루시를 이곳에서 치료하라고 하셨어요.”
그 말에 루시펠라는 눈을 크게 뜨다 이내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
황궁에 칼리드가 올 리가 없지. 그를 만난 건 꿈이었던 것이다.
‘개꿈이네.’
루시펠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복부에서 통증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윽!”
“괜찮아요?”
“아, 괜찮아. 용케 살았네.”
“그 와중에 급소를 비껴 맞았다고 해요. 그래도 한 열흘간을 잠들어 있었으니, 사람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열흘이나 잤어? 세상에.”
“정말 난리도 아니었다고요. 하인트 공작 각하는 1황자를 당장 죽여야 한다고 펄펄 뛰었어요.”
“하하…….”
제드에 대해 듣자 루시펠라는 새삼 제드가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저도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두 번 다신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클로렌스의 말에 루시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나갔기에, 비슷한 상황이 와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좋은 관계에는 적당한 거짓이 필요한 법이었다.
문득 루시펠라는 자신의 옆쪽에 있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빛이 평화롭게 정원을 내리쬐고 있었다.
클로렌스가 루시펠라의 시선에 웃으며 창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흘러들어 와 그녀의 머리를 간질였다. 꽃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다.
“날씨 좋다. 봄 날씨네.”
“그러네요. 참 평화롭고 좋네요.”
클로렌스가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답했다. 둘은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루시펠라의 말에 문이 열리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청동색 머리카락이 빛났다. 제드였다.
그는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다 깨어난 루시펠라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멍하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루시, 저는 가볼게요. 둘만의 시간 잘 보내세요.”
클로렌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더니 쏜살같이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순식간에 단둘이 남은 루시펠라와 제드는 어색한 침묵 아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제드?”
그 말이 신호라도 되듯, 그는 순식간에 루시펠라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몸은, 지금 상처 부위는 어떻지? 아프진 않나?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어? 지금 말을 할 수는 있나?”
방금 그녀가 정확히 제드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한 것을 잊어버린 건가?
횡설수설하는 제드를 보며 루시펠라가 차분하게 말했다.
“몸은 아픈데 괜찮아. 그러니 진정해.”
그 말에 제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텔, 본인의 육체가 바뀌었다는 자각을 좀 했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가 평정을 되찾자 가장 먼저 한 것은 잔소리였다.
고의가 아니었음에도 무분별하게 뛰어들어서 다친 잘못도 있으므로 루시펠라는 멋쩍은 미소를지으며 말했다.
“미안. 많이 걱정했지?”
“당연히.”
제드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따스한 품이 느껴지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항상 내가 없는 사이에 사고를 치는 것 같아. 정말이지, 위태로워 두고 볼 수가 없군.”
“걱정시켜서 미안해.”
“남의 속도 모르고 그렇게 웃지 마.”
“그래, 미안해. 미안하니까 대신 이제 꼭 붙어 있을게.”
루시펠라의 대답에 제드는 그녀로부터 몸을 떼었다.
왜, 말실수라도 한 건가? 루시펠라가 슬며시 불안해할 때 제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픈 사람을 꽉 끌어안을 수도 없고. 날 고문하려는 건가?”
그 투덜거림에 결국 루시펠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드의 걱정과 서운함이 담긴 투덜거림이 끝나자 루시펠라는 그의 어깨에 기대 이 순간을 음미했다.
창 너머로 스며드는 봄바람에 미처 다 젖히지 못한 커튼이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꺼졌다.
꿈 때문일까. 아직도 나른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은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그때, 루시펠라는 눈을 굴리다가 이내 단단히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드,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뭐냐고 물어보는 시선에 그녀는 설핏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날 에스텔로 불러주지 않았으면 해.”
그 말을 들은 제드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대신 루시펠라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에스텔 슈페르트가 진정한 네 이름이잖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너는…….”
“에스텔은 이미 죽었어. 죽은 사람은 보내줘야지.”
“…….”
“내가 결정했어. 이제 내 이름은 에스텔 슈페르트가 아니라 루시펠라 아이딘이야.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내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 에스텔임을 고집할 필요가 없지.”
“…….”
“그렇게 보지 마. 에스텔을 아는 모두가 에스텔을 보냈다면 나도, 당신도 에스텔과 제대로 작별해야지.”
“…….”
“그렇다고 에스텔이 걸어온 길과 생각을 부정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에스텔이 가졌던 미련이나 미움 같은 감정은 이번 생에 끌어오지 않을래. 사실 진즉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잘 안 됐어.”
“……,”
“그렇게 해줄 거지?”
제드는 루시펠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은청색 눈은 여전히 별을 빼다 박은 것처럼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렇게 원한다면, 기꺼이.”
생각해 보면, 제드가 불러주는 ‘루시’라는 이름은 참 좋았다.
또한 사람들은 에스텔을 모두 떠나보냈다. 시토라 기사단도, 칼리드도. 그렇다면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안녕, 에스텔.’
루시펠라는 들리지 않는 작별 인사를 자신에게 했다.
그렇게 에스텔 슈페르트는 진정한 죽음을 맞았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숨기려 제드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작별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맑고도 따스한 봄날의 오후였다.
***
“제대로 얼굴을 보고 온 거냐?”
리엄의 말에 칼리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다행이다. 하인트 공작에게 부탁하길 잘했군.”
“그 사람이야 그녀가 바라는 건 뭐든 들어주려고 할 테니까.”
“그래서 우리가 쉽게 포기한 거니까.”
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영지전이 벌어지기 전, 제드와 리엄은 투덕거리면서도 꽤나 서로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리엄이 깨달은 것은 제더카이어 하인트는 루시펠라의 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죽일 놈이고 짜증 나는 놈이지만, 동시에 인정할 만한 놈이었다.
‘게다가 질투에 졸렬하게 구는 인간도 아니지.’
리엄은 칼리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날, 테미르에 의해 상처를 입고 쓰러진 루시펠라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다.
누워서 잠들어 있던 루시펠라는 언젠가부터 계속 칼리드를 찾았다고 했다. 그것을 본 제드는 망설이지 않고 리엄에게 연락해 왔다.
“네가 어떻게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걸 알았지? 정말 대단한 통찰…….”
“그녀가 내게 말해줬어.”
제드는 그렇게 말하며 당장 칼리드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그에게 루시펠라가 깨어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어 보였다.
상처가 회복되어 가고 있던 칼리드는 그 소식을 듣고 황궁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들의 재회가 이루어졌다.
“그녀와 직접 대화까지 했어.”
그때,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리며 회상에 잠겼던 리엄이 현실로 돌아왔다.
대화를 했다고? 그녀가 깨어난 것인가?
“또 죽으라고 폭언이라도 듣지 않았냐?”
리엄의 말에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발데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있으면 좀 닥쳐라.”
“맞아, 눈치가 있으면 좀 닥쳐.”
아니카가 동의하자 발데르가 그녀를 바라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오이겐이 미소 지으며 묻자, 다른 이들도 칼리드의 얼굴을 보았다.
“그게…….”
“그게?”
“비밀이야.”
칼리드의 얼굴은 홀가분했으며, 심지어 행복해 보였다. 그걸 본 리엄이 그의 뒤통수를 퍽 쳤다. 칼리드가 윽,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너는 항상 그놈의 비밀이 문제야. 그거 알아?!”
“맞아. 그러다가 또 인생 조지려고 그래?”
발데르가 가세했다. 아니카와 오이겐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칼리드는 언제나 비밀을 만들어서 문제였다.
에스텔에게 비밀을 만들었고, 시토라 기사단에게 비밀을 만들었다.
루시펠라와 오이겐이 털어놓은 진실에 그들은 얼마나 괴로워했던가.
칼리드는 배신자였다. 그러나 정작 그 고뇌를 떠안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었다.
언제나 외롭게 살아온 칼리드. 잃을 것이 두려웠던 칼리드.
필사적으로 거짓을 말해와 언제나 불안했던 칼리드.
증오스럽고 미운 놈이었지만, 그렇다고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참으로 모나고도 애처로운 놈이었으니까.
“그 녀석이 그놈의 비밀을 만들어내서 숨기려 하거든 두들겨 패서라도 제대로 교화시키도록 해. 너흰 정확히 말하면, 납치범들이야.”
루시펠라는 그렇게 말했다.
그를 살려서 데려가라는 루시펠라의 말에 거절 못 한 것은 그들의 마음도 루시펠라의 마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저 녀석이 에스텔에게만 미쳐 있던 삶을 벗어나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면, 서로의 길을 걷는다면 가장 행복한 결말이겠지.
애초에 상대를 자신보다 아꼈던 두 사람이니,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 따윈 리엄도 내키지 않았다.
리엄은 칼리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칼리드는 이제껏 본 것 중에서 가장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직은 그 얼굴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미소인지 진짜 미소인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의 귀재였으니까. 그러나 앞으로 그렇게 부딪치며 투덕거리며 함께 살아간다면 서로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으리라.
“리엄, 슬슬 출발해야지.”
“어?”
칼리드가 말의 고삐를 잡아끌며 말했다.
“얼샤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해. 곧 황사가 다가오잖아.”
“그, 그렇지.”
“어서 가자.”
칼리드가 말을 몰자, 오이겐이 그의 곁을 따랐다. 아니카와 발데르는 시선을 교환하더니 칼리드를 따라 말을 몰았다.
미련. 칼리드에게는 이제 그것이 없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린힐의 성문을 빠져나갔다.
왁자지껄 떠드는 동료들 틈에서 칼리드는 고개를 돌려 그린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도시였다.
결국, 그렇게 모질게 말하면서도 에스텔은 칼리드를 죽이지 못했다.
화살을 맞고 깨어나자마자 보이는 것은 이전의 동료들이었고, 그는 아픈 몸으로 리엄의 주먹과 발데르의 발차기를 맞아야 했다. 아니카는 정신적으로 듣기 힘든 폭언을 퍼부었고, 오이겐은 그들을 막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루시펠라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깨달은 칼리드는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것은 루시펠라의 의지라는 말을 리엄에게 듣고, 그는 차마 목숨을 끊을 수가 없었다.
루시펠라에 의해 칼리드 루이르크는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칼리드는 칼리드 루이르크라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그녀의 복수일까, 자비일까.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기에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누군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냐고 물어본다면,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그를 할퀴고 있노라고 답할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녀에 대한 그리움에 칼리드는 남은 생을 미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스텔을 잃고 조용히 미쳐 갔던 3년 전과는 다르게 이젠 저놈들이 곁에 있을 것이다. 에스텔로만 가득했던 그의 삶에서, 이놈들이 강제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하게도 그녀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에스텔 슈페르트는 이제 없다. 그가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죽음에서 다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도, 그들은 함께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고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는다. 그의 사랑은 이기적이었고 폭력적이었으니까.
먼 훗날에도 그들이 재회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안녕, 에스텔.’
칼리드는 소리 없는 인사를 건넸다. 그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따스한 바람에 나무에 피어 있던 분홍 꽃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그 흩날리는 꽃비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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