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기사가 레이디로 사는법-160화 (160/173)

#160화 황제의 길

2018.09.10.

“그게 사실인가?”

제드의 물음에 버나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1황자 테미르가 황제를 시해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겨우 말을 꺼냈다.

“……거기 있던 기사들은 대체 무얼 했지?”

“폐하께서 1황자와 단둘이 이야기할 일이 있다며 호위를 멀리 물리셨습니다.”

테미르가 황제를 시해했다. 황자가 황제를 죽였다. 좀 더 나아가 생각하면, 아들이 아비를 죽인 것이다.

“별로 놀랍지도 않군.”

너무 엄청난 사실이었지만, 사실 황제가 자식을 대하는 꼴을 보며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다. 버나드가 그의 눈치를 보자 제드가 말했다.

“또 뭐가 더 있나 보군.”

“그게…….”

“이번 일보다는 더 놀라지 않을 것 같으니까 말해.”

버나드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겨우 말을 뱉었다.

“아이딘 백작께서, 1황자에게 상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제드의 눈이 커졌다. 버나드가 말을 이었다.

“황제를 시해한 뒤 1황자는 황후 폐하까지 시해하려 시도했으나, 마침 거기 계셨던 아이딘 백작께서 대신 칼을 맞으셔서…….”

버나드는 여기서 제드가 당황해서 말을 못 하거나 아니면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드가 한 것은 재빨리 말을 몰아 달려가는 것이었다.

“가, 각하!”

버나드가 감히 따라잡지도 못할 정도로 제드는 저 멀리 앞서 가고 있었다. 버나드가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하나가 끝나면 왜 하나가 또 터지는 건데!”

그는 소리치며 고삐를 당겼다.

***

“죽여 버릴 거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테미르를 바라보며 이오지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발이 묶인 채 차가운 감옥에 갇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테미르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춘 이오지프를 노려보았다.

“형님.”

“오냐, 이오지프! 내가 네 형님이다!”

사건이 일어난 후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에 아직도 테미르의 얼굴이나 옷에 묻은 피는 흥건했다. 이오지프는 그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아바마마와 네가 둘이서 날 농락하니 좋더냐?! 나를 황태자로 세워두고! 아바마마와 네놈이 그렇게!”

“형님!”

그가 소리를 질렀다. 테미르가 이를 갈았다.

“너는 다 가졌잖아! 다 가져놓고선 대체 뭐가 그렇게!”

“내가 무얼 다 가졌단 말입니까!”

이오지프가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처음부터 세가 강한 외가와 ‘왕세자’의 지위. 심지어 이오지프와 테미르는 비교조차도 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같은 또래의 제드와 테미르를 비교할 정도였다.

황족임에도 언제나 은근슬쩍 무시당하며 소외당했던 이는 오히려 이오지프였다.

“이 황궁에서 프리실다와 너만 행복했던 걸 모를 줄 알아?”

테미르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본 이오지프가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아직도 기억해…….”

테미르가 더듬거리며 ‘그날의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따스한 봄날, 색색이 피어나는 장미. 망할 수업을 땡땡이친 테미르는 어쩌다 장미원으로 도망쳐 왔다.

기사들의 눈을 피해 화려한 장미 덩굴 뒤에 숨어 있던 그는 프리실다가 산책하며 장미를 구경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죽고 왕궁의 안주인이 된 프리실다.

외숙부는 그녀를 죽은 어머니의 자리를 탐내는 여자라 경계해야 한다고 했기에, 그는 그 말에 충실히 따랐다.

프리실다는 말하자면, 테미르의 화풀이 대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테미르의 폭언에도 화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프리실다를 본 그의 얼굴은 굳었다.

저 여자라면 자신을 기사들에게 보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꼭 숨어서 프리실다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머니!”

이오지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정원을 걷던 프리실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본 테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저 사람, 저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나? 언제나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여긴 어쩐 일이니?”

“어머니는 장미를 좋아하시잖아요. 이맘때는 항상 장미원에 계시다는 걸 알고 있어 몰래 빠져나왔어요!”

테미르는 프리실다가 몰래 빠져나온 이오지프를 혼낼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프리실다는 쿡쿡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그랬니? 이리 오렴, 우리 아가.”

이오지프가 기다렸다는 듯 뛰어들어 그녀의 목을 끌어안았다.

테미르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프리실다는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오지프를 끌어안으며 그의 통통한 뺨에 얼굴을 비볐다.

그가 경험한 세상과는 달리 맑고 밝은 수채화 같은 세상.

그 안에 속하고 싶었다. 테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에게 발을 내디뎠다.

“형님!”

이오지프는 반가운 목소리로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환하게 웃던 프리실다의 표정은 굳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던 그 아름다운 세상이 갑자기 사라졌다.

테미르는 자신과 이오지프를 다르게 대하는 프리실다의 간극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수업은 다 하시고 오신 건가요, 테미르?”

우리 아가, 라는 말은 나한테 하시지 않는 건가요?

테미르는 그 말을 삼켰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 하마터면 저 여자에게 넘어갈 뻔했다. 저 여자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 수업을 왕비께서 무슨 상관이신지?”

순간이나마 프리실다의 관심이 필요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테미르의 입에선 저절로 비꼬는 말이 나왔다.

“……기사들을 불러야 할 것 같군요.”

프리실다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부터 테미르는 프리실다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테미르의 말을 들은 이오지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전혀 기억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오지프는 테미르에게 미안함보다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에 테미르의 멱살을 틀어잡고 이오지프가 버럭 소리쳤다.

“형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잖아!”

이오지프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이 형이라는 작자의 얼굴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었다.

항상 화려함과 풍족함에 둘러싸인 테미르는 모른다. 그들 모자가 얼마나 소외되었는지.

그 누구도 그들 모자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들을 동등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황족은 허울일 뿐, 힘이 약하면 언제든지 무시당한다.

황제의 냉대와 방치 속, 그 외로운 궁에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했다.

“형님, 아니, 형도 알고 있었잖아! 사랑받고 싶었으면 마땅히 그럴 행동을 했어야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그렇게 업신여기고! 그러는 형을 대체 누가 사랑해 주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랑받은 새끼가 뭘 알아! 이오지프, 너와 내 아비라는 작자도, 나를 네 장애물로 썼을 뿐이야! 결국 다 네가 가졌잖아!”

“이 멍청한 새끼!”

이오지프가 욕설을 내뱉으며 테미르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테미르가 엎어지는 것을 본 이오지프의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기적인 새끼!”

“…….”

“만약 나한테 처음부터 후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부황께선 형을 왕세자라고 공표하지 않았을 거야! 형은 조금만 노력했다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지위에 있었어!”

“아니! 아바마마는 너를 선택했다! 내가 지금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게 그 증거야!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아바마마가 그렇게 만든 거야!”

이오지프가 다시 멱살을 잡아 테미르를 일으켜 세웠다.

“그건 아바마마가 아니라 형이 그렇게 만든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내 약혼녀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면 로에르 후작가는 형 편이었다고!”

“닥쳐!”

“선대 아이딘 백작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 재산은 다 형 것이 되었을 거야! 아니, 적어도 이드리스 공작가와 바반드 백작의 분쟁을 조정해 주었다면 바반드 백작이 이드리스 공작에게 조언이나마 해줘서 아이딘 백작이 고전했겠지!”

테미르가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자 이오지프는 그의 옷을 더 세게 쥐었다.

“어머니가 사랑을 안 줬다고? 형은 내 어머니가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형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왜 몰라! 다 형 때문이잖아!”

프리실다의 가문은 한미했다. 그렇기에 1왕비 루크레치아가 죽고 그녀의 가문과 그녀는 이드리스 공작가에 숱한 수모를 견뎌야만 했다.

이드리스 공작부인은 언제나 사교계에 군림하려 했고, 이드리스 공작은 프리실다의 친정 가문을 견제했다. 황후였음에도 언제나 그녀는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어머니는 형을 두려워했지만, 적어도 노력은 했어! 공식 석상에서는 최대한 차별하지 않으려고 했고! 내게 사랑을 드러내는 것도 최소한으로 삼갔어!”

“…….”

“그렇지만 어머니라고 모든 걸 감싸 안을 순 없어! 어머니도 황후이기 전에 사람이니까! 그따위로 행동해 놓고 지금 누구 탓을 하는 건데!”

그 어린 날, 또 사고를 친 테미르를 살짝 나무라자 테미르는 그녀에게 꽃병을 던졌다.

꽃병은 깨지기 쉬운 유리로 되어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녀의 얼굴에 맞아 깨졌다.

왕비의, 나라 안주인의 이마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테미르는 사과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 버렸고, 프리실다는 혼자 남아 흐느꼈다.

테미르가 남긴 상처는 깊었고, 그녀의 이마에는 흉터가 남았다.

프리실다는 공들여 화장하여 그 흉을 가렸으나, 일국의 안주인의 얼굴에 새겨진 그 흉은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나도 형이 내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을 거야! 형의 자리를 탐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이오지프라고 모든 걸 감내할 수는 없었다. 그는 테미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만약 테미르와 그의 사이가 좀 더 좋았다면, 이오지프는 ‘세상을 바꾸자’라고 생각했을 때 황위를 탐내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형이 조금만 노력했다면, 모든 게 다 형의 것이었어! 아바마마는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형은 노력하지 않았던 것뿐이란 말이야! 우리 둘 다 아바마마의 천칭 속 추에 불과했어!”

“…….”

“바보 자식! 멍청한 자식! 아직도 자기 잘못도 모르고! 어렸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왜, 이런 멍청한 짓을 해서는!”

이오지프가 이를 악물며 멱살을 놓고 눈물을 닦았다.

이오지프가 우는 것을 보고 테미르의 두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라고? 이오지프에게 치우친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황제는, 자신의 아버지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거지?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떠올렸다.

“대체 나는 뭐였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나를 사람으로 생각하시긴 했습니까!”

황제는 테미르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참 어리석다는 것이다. 테미르, 너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더구나.”

“아바마마!”

“모든 게 이오지프를 위한 발판이었냐고? 그렇게 여긴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 그랬느니라. 네가 귀족을 적으로 돌린다면 모두 이오지프를 선택하겠지.”

“…….”

“짐은, 짐의 나라를 그냥 물려주고 싶지 않았느니라. 삶은 쟁취하는 것! 그래야 귀족놈들이 우리를 얕잡아보지 못할 터. 나라를 얻기가 쉬운 줄 알았더냐!”

“…….”

“루크레치아의 마지막 부탁에 기껏 왕세자로 만들어줬거늘, 너는 네가 가진 게 뭔지도 몰랐다. 그러다 종내에는 모든 걸 다 잃어버렸지. 네 그 어리석은 모습은 내 형을 닮았더구나!”

그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테미르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익었다. 몸에 열이 오르자 숨이 가빠졌다.

애초에 저 사람을 아버지라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황제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그는 도저히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이 재빨리 무언가를 찾았다. 마침 협탁 위에 놓인 단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이 왜 때마침 거기 있는 것인지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충동에 몸을 맡겼다. 그 일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 동안에도 황제는 웃고 있었다.

“형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아바마마에게 이용당했어. 아바마마는 그냥 이 제국을 이끌 강력한 황제가 필요하셨을 뿐이야. 형이 노력해서 세력을 잡아도, 내가 노력해서 형의 세력을 빼앗아도 둘 중 하나는 커다란 세력을 가지게 될 테니까. 나를 생각한 게 아니란 말이야!”

“아아아아악!”

이오지프는 테미르가 괴로움에 비명을 지르자 참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황제라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양자택일의 선택지에 올라 있었다.

이겨도 져도, 모든 게 다 황제의 안배대로 된다.

이 거대한 제국을 이어받을 이는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이오지프에게도 테미르에게도 이런 가혹한 시험을 내렸던 것이다.

심지어 황제의 죽음마저 황제가 원하는 바대로 되었다.

왜 황제의 침소에 흉기가 놓여져 있었겠는가?

왜 황제는 자신을 지킬 기사들과 시종을 물렀겠는가?

황제는 테미르가 분노할 것을 알았다. 그에게 혈연이라는 것은 모두 이용 대상에 불과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마저도!

어떻게 이런 인간이 존재하는가!

이오지프는 화가 났다.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어리석은 자신의 형이었다.

테미르가 궁에서 그렇게 행패를 부리는 와중에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패악을 떨었음에도 그는 이오지프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가 이오지프를 업신여기고 비웃긴 했지만, 그래도 그를 직접 괴롭히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귀족 자제들에게 심하게 무시당할 때는 황족을 모독한다며 같이 분노해 주기도 했다.

분명 그들 사이에는 그런 순간도 존재했다.

때로는 같이 손잡고 정원을 거닐었다. 그때, 테미르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자랑하며 소위 말하는 ‘형 노릇’을 하려고 했다.

훗날 후환이 될지도 모르는 이오지프 따윈 진즉 제거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미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마냥 어리석음에 비롯된 방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오지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멍청한 인간.”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이오지프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애써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닦았다.

테미르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 루시를 불러줘.”

“…….”

“루시를 불러줘. 이오지프, 루시를 불러줘. 그 애가 필요해. 그 애는 나만 사랑해 줄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없어. 형이 루시펠라 아이딘을 죽였으니까.”

이오지프의 덤덤한 말에 테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아, 내가 그 애를 찔렀지.”

“…….”

“내가, 루시를 찔렀지.”

“…….”

“그래, 그랬지…….”

“…….”

“그 애가 죽었구나. 유일하게 날 사랑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이제 날 사랑해 줄 이는 아무도 없구나.”

테미르는 넋을 잃은 듯했다. 그것을 본 이오지프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가 루시펠라에게 저질렀던 짓을, 사랑을 주려 했던 이들에게 했던 짓을 반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이오지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감옥의 복도를 걸으며 이오지프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바마마, 이것이 내게 준 선물입니까?”

황제는 최고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이오지프가 황위 때문에 형제를 죽였다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그렇게 모든 것을 안배해 놓았다.

테미르는 결국 스스로가 지은 죄로 인해 처형당하는 것이다.

이오지프는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였다.

테미르와의 대화는 묻을 것이다. 테미르가 프리실다를 가장 강하게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프리실다가 알게 된다면 평생 죄책감을 가질 테니까.

그는 문득 자신의 방에서 클로렌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마 루시펠라 때문이겠지.

웃음과 울음을 번갈아 가며 터뜨리던 이오지프가 흘러나오는 흐느낌을 애써 삼켰다.

모든 것을 저곳에 두고 오리라.

황제의 도구로써 쓰이고 망가졌던 형에 대한 원망도, 그에게 품었던 죄책감도.

이것은 어머니도, 자신의 연인과도 공유하지 않을 것이다.

이윽고 눈물을 닦아낸 그의 얼굴에 단호한 빛이 서렸다. 숙였던 허리를 펴고 그는 똑바로 복도를 걸었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지만 이제 그는 얀스가르의 유일무이한 황제였다.

#d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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